출처 : http://www.inhakoreanology.kr/science/kor_study_dn.php?sq=37&att_sq=322 (문서파일)
* "북한지역의 부거석성 고찰 - 윤현철"중에서 "2.문헌사료와 동경용원부"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문헌사료와 동경용원부
2012 윤현철  

동경용원부는 발해국의 네 번째 수도이며, 발해가 동남쪽 연해지역에 건설한 통치중심지이기도 하다. 동경용원부의 지리 위치에 대한 문헌사료들로는 대체로 아래와 같다.

정원 연간(785~793년)에는 (상경을 떠나) 동남쪽의 동경으로 천도하였다. 흠무가 죽은 후 시호를 사사로이 문왕이라고 하였다.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 족제 원의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의심이 많아 국인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굉림의 아들 화여를 추대하여 왕으로 하고 다시 상경으로 천도하였으며 연호를 중흥으로 고쳤다.12)

예맥의 옛 땅을 동경으로 정하였는데 용원부라고 하고 또는 책성부라고도 하였다. 경, 염, 목, 하 4개주를 다스렸다.13)

용원은 동남으로 바다에 면하였는데 일본도이다.14)

당나라 지리학자 가탐의 '고금군국지'의 기사에 의하면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다. 신라의 천정군으로부터 책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다.”15)

개주진국군절도는 본래 예맥의 땅인데 고구려는 경주라고 하였고 발해는 동경용원부라고 하였으며 궁전이 있었다. 경, 염, 목, 하 4주의 일을 도독하였다. 옛 현이 6개이다. 즉 용원, 영안, 오산, 벽곡, 웅산, 백양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돌을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둘레는 20리이다.16)

개원현은 본래 책성의 땅이다. 고려(고구려)시기에 용원현이라고 하였는데 발해가 계승하였으며 요나라초기에 폐지되었다.17)

발해국이 동경을 수도로 하던 시기의 주요사건들은 다음과 같다.18)


위의 사료들에서 발해의 동경용원부는 예맥의 고지에 있으며 책성부라고도 하는데 산하에 경・염・목・하 4개 주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경주는 수주로서 부와 치소가 같으며 산하에 용원・영안・오산・벽곡・웅산・백양 등 6개현을 관할한다. 용원은 부곽현으로써 부와 치소를 같이한다. 지리적으로 동경은 상경의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라 천정군으로부터 39개 역(1,170리)이 있으며, 동남쪽으로 바다와 가까이 하고 있다.

'신당서・발해전'의 기록에 의하면 대흠무는 당 덕종 정원연간에 상경에서 동남쪽의 동경으로 천도하였다. 이것은 발해국 역사상의 세 번째 천도이다. 발해가 두 번째로 상경으로 천도한 것은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발생한 후, 안록산 세력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상경용천부로 옮겨간 후 대흠무는 당 왕조와 안록산의 전쟁에 대하여, 처음에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다가, 후에는 당 왕조에 충심을 표시하였다. 대흠무가 실시한 외교정책으로 발해는 안전을 확보하였으며, 당 왕조의 신임을 얻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안사의 난 이후, 762년에 대흠무는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되었다.

이로 인해 발해와 당 왕조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으며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안록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흠무는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강화하였다. 758년부터 780년 사이에 발해국은 양승경(楊承慶)・고남신(高南申)・왕신복(王新福)・일만복(壹萬福)・오수불(烏須弗)・사도몽(史都蒙)・장선수(張仙壽)・고양필(高泮弼) 등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연락을 강화하였다. 일본에서도 오노 타모리(小野田守)・고원도(高元度)・양후사령구(陽侯史令璆)・고마노 오야마(高麗大山)・판진겸속(坂振鐮束)・타케후노 도리모리(武生鳥守)・고마도노쓰구(高麗殿嗣)・대강광도(大綱廣道) 등을 발해에 파견하였다. 양국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대흠무는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수도를 양국의 통행이 편리한 지점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발해의 국내외 형세가 안정되며, 세 번째 천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발해가 동경용원부로 천도한 것은 국가 내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발해국의 서쪽에는 강대한 거란이 있었고, 북쪽에는 흑수말갈 부락들이 있었다. 동경용원부로 천도하기 전에 발해국은 불녈부・철리・우루와 월희부를 통제하여 후방을 든든히 하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올라 갈수록 기후가 더욱 추웠기 때문에 발해가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는 데는 불리하였다. 한편 발해의 동남쪽에는 예맥족 부락과 신라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어업과 제염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농업생산에 유리한 많은 여건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때문에 동남쪽으로 천도하는 것은 발해의 대내통치 정비의 필요성과 대외교류가 활발해진 당시 상황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했다.

785년에 문왕 대흠무는 수도를 상경용천부에서 동경용원부로 천도하였다. 이번 천도로 인해 발해의 정치・경제의 중심은 동해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채태형 선생이 제기한 부거석성설의 주요한 근거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부거리에는 고구려와 발해시기의 성터가 있는데, 그것은 팔련성과 같은 토성이 아니라 석성으로 '요사' 지리지의 기사와 부합한다. 또한 성내에는 여러 개의 작은 성들이 있다. 둘째, 부거리는 바다에 면하고 있으며 겨울에 얼지 않아 연중 계속 일본에 배를 띄워 보낼 수 있는 용제항과 여진항을 끼고 있다. 셋째, 부거리 내의 역참 수도 참고하여 볼 만한 점이 있다. 이 관점에 대하여 조선학자 이태희도 동감을 표시하였다.19) 필자도 2003년에는 이 관점에 동의하였으나, 2009년의 현지답사 이후 부거석성을 동경으로 비정하는 설에 대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래에서 동경용원부로 비정되어 오던 부거석성과 그 주변 유적을 소개하려 한다.


주석

11) 沙弗庫諾夫 著, 宋玉彬 譯, '渤海國及其俄羅斯遠東部落', 東北師範大學出版社, 1997, 70쪽.
12) '新唐書・渤海傳': “貞元時, 東南徙東京. 欽茂死, 私諡文王. 子宏臨早死, 族弟元義立一歲,猜虐, 國人殺之. 推宏臨子華璵爲王, 複還上京, 改年中興.”
13) '新唐書・渤海傳': “濊貊故地爲東京, 曰龍原府, 亦曰柵城府, 領慶, 鹽, 穆, 賀四州.”
14) '新唐書・渤海傳': “龍原東南瀕海, 日本道也.” 
15)'三國史記' 卷37 雜志 第6 地理4. “渤海國南海, 鴨淥, 扶餘, 柵城四府幷是高句麗舊地也.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 凡三十九驛.”
16) '遼史' 卷38 地理2 東京道 開州 鎭國軍條. “開州, 鎮國軍, 節度. 本貊地, 高麗為慶州, 渤海為東京龍原府. 有宮殿. 都督慶, 鹽, 穆, 賀四州事. 故縣六: 曰龍原, 永安, 烏山, 壁谷, 熊山, 白楊, 皆廢. 疊石為城, 周圍二十裏.”
17) '遼史' 卷38 地理2 東京道 開州 鎭國軍條. “開遠縣, 本柵城地, 高麗為龍原縣, 渤海因之,遼初廢.”
18) 金毓黻, '渤海國志長編', 社會科學戰線雜誌社, 1982년 翻印本.
19) 李泰熙 著, 文一介 譯, 「渤海的對日交通路: “日本道”」, '歷史與考古信息・東北亞', 1992년 제1기, 89쪽; 譯自조선 '력사과학', 1990년 제4기; 李泰熙 著, 文一介 譯, 「渤海的驛站路」,'歷史與考古信息・東北亞', 1992년 제2기, 63쪽; 譯自조선 '력사과학', 1991년 제3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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