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Ⅴ.백제의 성장과 교통로 - 2.소금 통로의 확보"을 가져왔습니다.
백제의 소금 통로의 확보
이도학 1997년
이도학 1997년
국읍연맹단계에서 백제는 수계(水系)를 개척하게 된다. 소금은 인간생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식품이었던 만큼 국가의 성장 또한 부(富)의 요체가 되는 소금산지의 확보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었다.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백제의 경우에도 그것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백제의 영토팽창 과정에서 최우선적으로 지목한 복속 지역이 소금 생산과 관련한 서해안 일대였으리라고 간파된다. 백제가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관내의 왕성을 기준으로 할 때 가장 가까운 서해안 일대를 개척하여 소금산지를 확보하였거니와, 그것의 증산과 원활한 수송을 위한 통로개척에 각별히 주력하였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백제가 공급받았던 소금과 관련해 그 왕성인 몽촌토성을 기준으로 할 때, 인천에서 생산된 소금은 경기만을 거슬러 올라가 한강수로를 이용하면 백제 왕성 구간으로 용이하게 운송될 수 있다. 혹은 육로를 이용하여 김포 지역까지 운송된 소금은 한강수로를 이용한다면 손쉽게 백제 왕성 구역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백제가 서해안 방면에 진출하여 개척하였을 여러 소금산지 가운데서도 그 최고 지배층이 공급받았던 소금은, 한강수로와도 연결이 가능한 인천 일원이 산지(産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인천에 거점을 두었다는 비류계세력과 서울 지역의 온조계세력을 연결시키고 있는 형제설화가 반영하는115) 연맹결성은, 백제가 진출하여 가장 먼저 부딪쳤을 소금 생산이나 그 통로의 확보와 관련지어 이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
백제의 왕성을 기준으로 해서 가장 근거리에 있는 서해안 지역은, 계양산 너머에 있는 지금의 인천시 서구 공촌동 일원이다. 공촌동 일원에서 채취된 소금은 백제 왕성으로 운반되는 과정에서 먼저 계양산 서쪽 지역과 지금의 인천시 북구 계산동을 이어 주는 통로인 ‘장명이고개[경명현(景明峴)]’를 넘어야만 한다. 이러한 소금 통로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방어시설이 경인 지역에서 가장 높은 350m 고지에 테뫼식으로 축조된 계양산성인데, 한강 하구와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요충지이다.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촌동 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은 계양산 밑의 장명이고개를 넘어 신정동토성 옆을 지나 서울로 운반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백제 때의 소금통로 또한 이같은 노정을 밟았으리라고 짐작되어진다. 실제 장명이고개를 제외하고는 공촌동 지역과 서울로 이어지는 통로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계양산성과 중심성(衆心城)이 축조되어 있는 것도 그 비중을 일깨워 주고 있다.116) 결국 이 통로를 거쳐 신정동토성 구간으로 운송되어 온 소금은, 다시금 육로로써 한강까지 수송되어 선편으로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토성 구간을 비롯하여 하남시 일원까지 도달한 것으로 짐작된다.
장명이고개와 이어지는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의 신트리 마을 야산(해발 82m)에는 둘레 약 540m 규모로 토성이 축조되어 있다.117) 신정동토성이 되겠는데, 북쪽으로는 한강과 연결될 뿐 아니라 동쪽으로는 안양천과도 근접하고 있어 일찍부터 강변생활권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18) 신정동토성은 게다가 인천시 서구 공촌동 지역과 시흥시 소래(蘇來) 방면의 소금길을 모두 장악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백제는 인천 지역을 장악하여 얻어지는 소금을 교역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백제가 소금을 공급할 수 있는 대상은 우선적으로 해안을 끼고 있지 못한 한반도 중부내륙 지역 가운데서도 수로(水路)를 배경으로 교역이 발달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북한강과 남한강수계 지역들이 백제로부터의 직접적인 소금 공급 대상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들 지역은 인천 일원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한강수로를 이용하여 육로보다 비교적 용이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육상교통은 한반도의 남북을 이어주는 간선도로가 확보되어 가는 과정이었던 만큼, 소금과 같은 대규모 물자의 수송이 가능한 동서연결 통로의 존재는 취약한 형편이었다. 게다가 육로수송에는 통행세의 부과와 같은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침탈과 같은 위험성도 함께 고려되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자연 수로를 선호하게 되었을터인데,119) 소금 교역권은 가항수로(可航水路)인 북한강 상류 지역의 춘천 방면과 남한강상류 지역인 영월 방면까지 미쳤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120)
소금은 백제로부터 직접 공급받은 강변 지역에서 내륙 요지로, 여기서 다시금 벽지로까지 먹이사슬식으로 해서 실핏줄처럼 뻗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대규모 유통망의 형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운송로가 개설되기 마련이고, 소금공급의 단계에 따라 정치적 우열관계도 연쇄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단계는 실핏줄마냥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체로 말한다면 피를 공급하고 생산하는 심장마냥 백제가 자리하면서, 소금공급을 매개로 중부내륙 세력들을 점증적으로 예속시켜 나갔으리라고 본다. 한강을 대동맥으로 하여 공급되는 소금의 가격은 그 상류로 갈수록 상승하였던 만큼121) 백제는 지리적 원격석(遠隔性)을 뛰어넘어 중부내륙의 벽지세력들에까지도 통제력을 행사하는 게 가능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이처럼 백제는 남․북한강의 내륙수로를 이용한 소금 공급을 통해 세력성장의 기본토대를 마련해 나간 것이다.
백제가 소금공급로로 이용한 남․북한강의 길이는 자그마치 한반도 전체 수로의 약 1/4에 이르는 규모였으므로12) 그 유역에 미치는 백제의 영향력을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백제를 축으로 한 소금교역로의 확대는 자원의 지역적 재분배를 촉진시키는 역할, 이를테면 문물의 활발한 교류를 가져왔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만큼 한강을 중심으로 한 동일 문화권 형성의 한 요인으로도 작용한 것 같다. 이는 일본의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이 소금 통로를 개설하고 난 후 문화의 전파로(傳播路)가 형성되어 문화의 지역성을 잃어버렸다는123) 지적을 통해서도 뒷받침되지 않을까 한다. 백제의 독점적인 소금교역의 이익은 경제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금통로 또한 단순한 교역로에 그치지 않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로가 되었던 만큼 소금교역망의 보호를 위한 관방시설(關防施設)을 한강 연변에 축조하였다. 남한강수계만 보더라도 양평으로부터 영월에 이르는 강변을 따라 많은 성곽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성곽은 수로(水路) 뿐 아니라 소금 하역장(荷役場)인 도진(渡津)까지를 보호하는데 있었다.124)
백제는 이 밖에 안산을 비롯한 서해연안을 따라 계속 잠식해 가면서 소금산지의 독점 뿐 아니라 중국과의 교통로까지 장악하는 성과까지 올렸다. 그럼에 따라 백제는 노령산맥 이북의 마한제국이125) 개별적으로 누리고 있던 중국과의 교역창구에 대한 독점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경기도 전역과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 일부 지역에까지 직접적인 무력의 행사없이, 백제가 비교적 용이하게 세력을 미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하겠다. 백제의 세력확장 비결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소금을 자체 조달할 수 없었던 중부 내륙 지역에 대한 장악 배경은 이러한 선상에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고 본다. 요컨대 백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통합의 규모는, 소금통로를 통한 그 교역체계의 범위에 의해서도 규정되어진다.
백제는 내륙수로를 통한 소금의 독점적인 공급과 병행하여 서해연안을 장악해 나갔다. 그 장악 방식은 전면적인 해안선 통제라기 보다는 대(對)중국교역로, 그러니까 항구에 대한 지배라는 거점 지배 형태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굴곡이 많은 서해의 해안선을 모두 통제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체 의미가 없는 만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이나 서산․대천․군산과 같은 항구(港口) 위주의 장악을 시도하여 점재적(點在的) 식민도시를 해안 요로마다건설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해 준다. 즉, 해안선을 따른 점(點)의 지배 형태라고 하겠다.
주석
15) 이 설화는 당초 백제국과 미추홀 세력간의 연맹을 반영하고 있지만, 뒤에 인천 지역이 비류계와 연관을 맺게 되었으므로, 인천 지역이 비류계의 고지(故地)인양 문헌에 등장하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16) 李道學, 伯濟國의 성장과 소금 交易網의 확보 (백제연구 23, 1992) p.13.
17) 韓宗燮, 위례성 백제사(1994) p.150.
18) 신정동토성에 관해서는 李道學, 앞의 논문(1992), pp.1~12를 참조하기 바란다.
19) 이 점은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지는데, 美川王(乙弗)이 즉위 전에 船便을 이용하여 압록강을 따라 소금장사를 하던 데서 알 수 있다(三國史記 권17, 美川王 즉위년조).
120) 擇里志 卜居總論, 江居條.
121) 崔永俊, 南漢江水運硏究 (地理學 35, 1987) p.76.
122) 朝鮮總督府, 朝鮮土木事業誌(1928) pp.176~178.
123) 平島裕正, 鹽(法政大學 出版局, 1990) p.106.
124) 崔永俊, 南漢江水運硏究 (地理學 35, 1987) pp.58~59.
이와 관련해 백제의 왕성이 소재한 지금의 서울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그 윗쪽인 한강하구 지역의 경기도 고양군을 달을성(達乙省), 그리고 그 아래 쪽인 남한강 상류 지역의 충주를 미을성(未乙省)이라고 불렸던 점이 주목된다. 여기서 達乙省은 ‘고화(高烽)’으로, 未乙省은 ‘저화(底烽)’의 뜻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지명은 한강 수계를 따라 형성된 봉수체계선상에서 달을성은 그 首點에, 미을성은 그 終點에 자리잡고 있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李道學, 고대․중세의 역사 (일산 새도시 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 2, 1992, pp.13~14).
125) 백제가 노령산맥 이남 즉 영산강 유역을 영토적으로 직접 장악한 시기는 5세기말로 간주한다 (李道學, 百濟의 交易網과 그 體系의 變遷, 韓國學報 63, 1991, pp.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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