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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후손들이 줄지어 한국을 떠났던 2000년대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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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친일 후손, 그 성공의 비밀
1. 1957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 웰슬리(Wellesley) 대학
서울대 사학과를 3학기까지 마치고 이곳 웰슬리 대학으로 유학을 온 지 이제 1년이 지났다. 방학 중이라 남의 집에 들어가 ‘아이 돌보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방학 동안 번 돈으로 학기 중의 책값과 생활비를 충당한다. 이곳 미국은 나의 조국 한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세상이다. 한국은 폐허에서 겨우 벗어난 반면, 이곳 미국은 그림 같은 집들이 있는 나라다.
한국의 국민 소득이 50에서 60달러인데, 내가 다니는 대학의 학비와 기숙사비는 한 해 2천 달러가 넘는다. 나도 전액 장학금을 받지 않았다면 유학을 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힘들기는 해도, 지금의 이 시기는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지금까지 태어난 뒤에 제일 운이 따랐던 게 웰슬리 대학의 장학금을 받은 일인 것 같다. 지난주에는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베이비시터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네가 남의 집살이를 한다니 무슨 일이냐’며 속상해하셨다.
할아버지는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유학자이시지만 교육에는 남녀 차별을 두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내게 한글을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집에는 책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은 독서량을 쌓을 수 있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방정환 선생 동화라든가 요즘 아이들이 읽는 피터팬과 백설공주, 소공녀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린이 책이 성에 안 차면 집에 있는 어른들 잡지를 읽었다. 아버지 서재에 있던 역사소설과 역사책도 읽었다. 그게 아마 내가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인호 kbs 이사장 유학 시절(오른쪽 가운데 여성)과 현재 사진
이 비범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KBS 이사장 이인호다. 한 언론에 나온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이인호 이사장이 유학을 떠난 시기는 1956년,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아 한국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이 이사장은 당시 일반인들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교육 기회를 누렸다. 국민소득의 40배나 되는 학비 등을 장학금과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충당했다고는 하지만 집안의 뒷받침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요즘 말로는 속칭 ‘금수저’다.
이인호 이사장은 오늘날 자신이 있기까지 큰 도움을 준 사람으로 그녀의 할아버지를 꼽았다. 이 이사장의 할아버지는 이명세,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들어가 있다.
이 이사장은 KBS 이사장 선임 당시 역사관과 조부의 친일 행적 문제가 제기되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겨레 2014년 9월9일, 이인호 “내 조부가 친일이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에서)
이명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유교의 황국 식민지화를 위해 만든 조선유도연합회의 상임이사를 지냈고, 조선 유림연합회의 대표도 지냈다. 조선 유림연합회의 강령은, 천명황도 존정국시(闡明皇道尊定國是), 즉 천황의 도를 천명하고 국시를 존중해 세울 것, 후원황군 앙양국위(後援皇軍昻揚國威), 즉 천황의 군대를 후원하고 국위를 떨칠 것 등이었다.
이인호의 친할아버지 이명세
다음은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가 이명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하면서 그 근거를 담은 결정문이다.
결정문
이명세는 1939년 11월 1일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유림 조직을 통제, 지배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에서 상임참사, 1941년에 상임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에는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의 사성으로 활동하였다. 이명세는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의 자격으로 지방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응하는 시국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유도연합회에서 간행하는 기관지인 『유도(儒道)』 제1호에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과 유교(儒敎)의 역할(役割)’이라는 논설과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한 것에 대한 기쁨을 노래한 한시(新嘉坡陷落日志喜)를 게재하였다. 두 편의 글의 요지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유교를 통한 황국신민의 본분을 다하자는 것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동아공영을 만들자는 것이다. 기관지 『유도』외에 조선유도연합회에서 발간한 『봉전남총독각하(奉錢南總督閣下)』, 『봉전대야총재각하(奉餞大野總裁閣下)』에서 이명세는 미나미 총독과 오노 정무총감을 칭송하는 한시를 게재하였다. 또한 『유도』 제 5호에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합함대사령장관의 죽음을 추모하는 한시를 게재하였다. 역시 조선유도연합회에서 간행한 『축징병제실시(祝徵兵制實施)』에 이명세도 일제의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한시를 게재하였다.
이와 같이 이명세는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참사, 상임이사, 경학원 사성으로서 활동을 하며, 일제의 침략전쟁과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고 일제의 고위 관료를 칭송하는 한시를 작성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러한 이명세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7호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
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4권
이명세는 결정문 내용처럼 조선 유도연합회 기관지인 『유도(儒道)』 등에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를 찬양하는 글과 한시를 잇따라 실었다. 창간호(1942)에선 '동아공영권, 유교의 역할'이란 기고문을 통해 일제 침략군을 옹호하기 위해 엉뚱하게 맹자 『양혜왕편』을 인용한다.
우리 황군은 인의를 위하여 싸우기 때문에 무적이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고 말한 선현의 격언이 현재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이명세는 조선총독의 치적을 찬양하고, 일제 침략군 사령관의 전사를 애도하는 한시를 수시로 발표했는데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시는 그가 일제에 어떻게 부역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축징병제 실시
해마다 북벌(北伐)하고 또 남정(南征)하다가
이제야 반도에 새로이 징병제 실시하네.
내외가 일체가 되어 은혜를 고루 입으니
앞뒤로 서로 호응하며 한 목소리로 의를 외치네.
집안에선 아들 난 것 중요하다는 걸 더욱 깨닫고
나라 위해 적과 싸워 죽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리
우리들은 유감 없으나 바라는 것 있으니
하루빨리 전란 끝내고 승평의 시대로 돌아오는 것이라네.
1943년 1월, 조선유도연합회
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4권
이명세는 이같은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해방 뒤에 승승장구한다. 1946년 성균관대학교의 상임이사, 54년부터 62년 사이에는 두 차례에 걸쳐 5년 동안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또 같은 기간 성균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마 유학 중인 손녀, 이인호 KBS 이사장에게 편지를 보냈던 시기도 이 때였을 것이다.
이 이사장은 유학 뒤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1972년 귀국한다. 그 뒤 고려대 교수, 서울대 교수를 지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핀란드 대사,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러시아 대사로 부임한다. 그 뒤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을 거쳐 마침내 2014년 공영방송 KBS의 이사장이 된다.
이명세와 그의 손녀 이인호 이사장의 인생 행로는 친일파와 그 후손들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 2015년 7월, 서울대학교
지난 ◯◯일, 뉴스타파 취재진은 서울대를 찾았다. 친일파 후손으로 확인된 몇몇 교수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미 수차례 이메일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어 직접 만나 인터뷰를 요청할 계획이었다. 무척 덥고 습한 날이었다. 취재 내내 땀이 줄줄 흘렀다. 결국 인터뷰는 하나도 성사되지 않았다. 촬영을 마친 취재진은 파김치가 됐다.
캠퍼스 곳곳을 활보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무더운 날씨에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현재 서울대 학부 신입생 정원은 3천 명 정도, 우리나라 전체 수험생은 60만 명이 넘으니 이곳의 학생들은 성적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최상위권이다. 단순하게 계산해서 우리나라 수험생들의 서울대 진학 확률은 0.5%가 되지 않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특정한 사회 집단의 서울대 입학 비율이 20%가 넘는다면? 엄청나게 학습 능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적 지원을 받은 집단일 것이다. 뉴스타파가 학력과 직업 등을 확인한 친일파 후손 1,177명 가운데 268명이 서울대 출신으로 나타났다. 비율로 따지면 22.8%다. 연세대학교 68명, 고려대학교 51명을 합치면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물론 이 1,177명은 각종 검색 작업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 이미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SKY 출신이 ⅓ 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단순한 개인적 재능 이상의 배경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는 역대 총장 가운데 3명이 친일파 후손으로 나타났다. 서울대의 전현직 교수 36명도 친일파 후손으로 조사됐다. 단일 대학교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다.
친일 후손들의 화려한 학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아니 현대도 한국 사회에서 성공의 확실한 보증 수표는 명문대 졸업 경력과 선진국 유학의 조합이다. 그래서 친일 후손들의 유학 경험 비율을 조사해 봤다. 결과는 1,177명 가운데 319명, 비율로는 27%였다.
우리 사회에서 유학을 경험한 사람들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 통계청에도 해당 자료는 없다. 다만 연도별 유학생 출국자들의 숫자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한 해 유학생이 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많게 잡아서 천 명이라고 치면, 50년대와 60년대를 통틀어 20년 동안 유학을 경험한 인구는 2만 명 정도 되는 셈이다. 70년도 당시의 인구가 3천 2백만 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70년대 이전까지 유학을 경험한 사람은 전체 인구 대비 0.06%에 불과하다. (1971년부터 2000년까지 유학생 출국 숫자는 모두 125만 명이다. 2000년 당시 인구가 4천 7백만 명이므로 2000년 시점에서 그 이전 30년 사이 유학을 경험한 사람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2.6%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뉴스타파가 찾아낸 친일 후손들의 유학 경험 비율을 출생연대별로 보면, 1900년대생부터 1940년대 생의 유학 경험 비율이 30%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유학 경험이 매우 희귀했던 70년대 이전을 비교 대상으로 상정할 경우 친일 후손들의 유학 경험 비율은 일반인들보다 무려 500배 높은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의 유학 국가를 보면 전체의 64%가 미국이었다. 두 번째로 많은 국가는 17%를 차지한 일본이었고 독일, 프랑스, 영국이 뒤를 이었다. 일본 유학의 경우 80% 이상이 해방 전 세대였다.
3. 2015년 8월 초, 뉴스타파 사무실
이제 마무리할 시점이다. 찾을 수 있는 데까지는 모두 찾았다. 2015년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뉴스타파 해방70년 특별기획 취재진은 신원이 확인되는 친일 후손 1,177명의 명단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직업 분석을 시작했다.
“이거 재미있네요. 의사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지?”
확인해보니 1,177명 가운데 의사가 147명이다. 정치인이나 법조인, 공직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던 취재팀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의사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뉴스타파가 만난 여러 전문가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친일 후손들의 경우 선조의 친일이라는 흠결이 있기 때문에 정치가나 공직자처럼 선대의 이력이 노출되기 쉬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엘리트를 지향하기보다는 비정치적인 직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정치적인 변화에 영향받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의사라는 직업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 중 하나는 아마 왕이나 대통령의 주치의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주치의는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의사로 인식되기 때문에 대통령 주치의 교체 시기가 되면 서울대 의대나 연세대 의대 같은 대표적 학교들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의사로서의 최고 명예직인 대통령 주치의는 역대 16명뿐이었는데, 이 가운데 2명이 대통령 소속 반민규명위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고, 또 다른 2명은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간 친일파의 후손으로 확인됐다.
색깔 별로 직업을 분류했습니다.
(출처 사이트 http://815.newstapa.org/#/2에 직접 가시면... 직업에 속한 후손이 많을 수록 상자는 커집니다. 상자를 누르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뉴스타파가 찾아 낸 친일파 후손의 직업 중 가장 많은 것은 기업인이었다. 376명으로 전체의 32%였다. 이 기업인 가운데 1/3 이상은 상장기업의 대표나 주주, 임원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기업 330만 여 개 가운데 상장기업은 2천 개가 채 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경우는 친일파 김신석의 외증손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포함한 삼성 가문이다. 또 친일파 김연수가 설립한 가족기업 삼양사의 경우 전현직 대표나 임원 가운데 김연수의 후손이 12명이나 있었다. D그룹의 총수, S 건설의 회장 역시 친일파의 후손으로 드러났다. 친일 후손 중 상무 이상의 임원만 따져도 80명이 넘었다. 삼성, LG, 현대, SK 계열사에 적어도 한 명씩은 모두 있었다.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을 움직이는 파워 엘리트, 즉 정치인과 법조인, 공직자, 언론인은 각각 31명, 30명, 55명, 46명이었다. 뉴스타파는 여러 전문가들과 협의해 결정한 기준에 따라 이들 가운데 공인으로 볼 수 있는 인사들을 공개한다. 전체 명단은 뉴스타파 해방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친일파 후손 공개 대상자 명단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먼저 전현직 국회의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빠져 있는 이유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분석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와 정부부처, 검찰법원, 군 등 정치인 이외 나머지 명단 명단이다.
우리 사회의 파워 엘리트 직군에 진출한 친일파 후손들은 전체 친일 후손의 14% 정도였다. 취재진의 예상을 밑도는 수치였다. 이는 “친일파 후손들이 여전히 우리 정관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속설과도 다른 분석 결과다. 특히 이들 파워 엘리트의 비율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낮아졌다. 과거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 시절만 해도 총리나 장관, 고위 법조인 중 상당수가 친일파 후손이었지만 90년대 이후부터는 그 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선대의 이력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정관계로 굳이 진출할 필요는 없었고, 자본 권력이 사실상 정치 권력을 지배하게 되면서 기업 경영이나 금융 분야 선호도가 높아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친일파 후손 중 언론인들은 이른바 ‘조중동’과 KBS에 소속된 비율이 높았다. 조선일보 9명, 중앙과 동아는 8명, KBS는 6명으로, 이들을 합치면 언론인의 2/3를 차지한다. 언론인 가운데는 지상파 방송의 앵커 출신 언론인도 있었고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 언론인도 있었다.
친일파 후손들의 직업 분석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 사회의 최상위 계층에서 활약하는 ‘잘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의 비율이 높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취재과정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떠올라 씁쓸한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1부에서도 소개한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선생의 장남인 김정륙씨는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다.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역임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느라 오랫동안 집을 떠나면 남은 가족들은 생계유지가 곤란했다. 가장 먼저 쓰러진 것은 어머니였다. 불과 39살이었던 어머니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숨졌다. 당시 세 남매의 나이는 9살과 7살, 3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밥을 굶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어머니를 잃고 6개월 뒤, 세 살배기 막내 여동생이 영양실조로 숨졌다. 말이 영양실조지 굶어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 뒤 김상덕 선생은 남아있던 두 남매를 고아원에 맡겼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온 아버지는 국회의원이 되어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살림살이도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좌절됐고 곧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상덕 선생은 납북되고 만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빨갱이’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학비가 없어 중퇴했고, 빨갱이라는 멍에 때문에 번듯한 직장에 취업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평생 막노동과 신문배달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4. 2000년 7월 2일 낮 12시, 서울 신라호텔
32살의 신랑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친 뒤 스탠퍼드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전도유망한 청년이다. 27살의 신부 역시 미국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뒤 일본 게이오대에서 어학 연수를 받은 유학파. 분명 평범하지는 않은 한 쌍의 첫 출발, 신랑 신부의 일거수일투족에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의 둘째 아들 김재열과 삼성 이건희 회장의 둘째딸 이서현이다.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 그룹과 대표적인 족벌 언론 동아일보의 사돈 맺기, 동시에 이 혼사는 두 친일 가문의 결합이기도 했다. 김재열은 대통령 소속 반민규명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김성수의 손자다.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의 창업주인 김성수는 일제 시대 총독부 기관지 매일 신보 등에 일제의 징병제를 찬양하고, 학병 지원을 권고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다.
김성수, 김신석, 홍진기
이서현은 친일파 김신석의 외증손자다. 외할아버지인 홍진기는 국가가 결정한 1,006명의 명단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돼 있다.
김성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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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광복70주년 취재팀은 이렇게 친일 집안끼리 얽힌혼맥을 20건이나 발견했다. 혼맥을 통해 서로 연결되는 가문은 모두 35개다. 대표적인 게 친일파 방응모의 증손자인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이다. 방상훈 사장은 또다른 친일파인 윤치호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방상훈 가계도
일제 강점기 최대의 거부이자 세도가였던 민영휘 집안은 다른 친일파 가문과 3건의 혼맥을 맺었다. 우선 일제 강점기 남작이었던 김춘희 가문의 딸과 손자를 결혼시켰고, 중추원 참의를 6번 지낸 장헌식의 아들과 손녀를 결혼시켰다. 또 그의 증손자는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복무한 조성근의 손녀와 결혼하기도 했다. 민영휘의 후손들은 선대에서 물려받은 사학재단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
민영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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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집안 끼리의 혼인은 아니지만, 친일 가문이 ‘잘나가는’ 유력 가문과 혼맥을 통해 연결되는 경우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친일파 현준호의 가문이다.
현준호는 아들인 현영원을 당시 재계의 실력자였던 김용주의 딸 김문희와 결혼시킨다. 김문희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누나다. 그리고 현영원과 김용주 사이에서 난 딸 현정은은 현대가의 5남인 정몽헌과 결혼한다. 친일 집안과 재벌가의 혼맥이 구축된 것이다.
김용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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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15년 7월 16일 오전, 서울 신촌의 한 커피점
어렵게 약속을 잡았다. 취재진이 친일파 후손 수백 명에게 보낸 이메일 가운데 답변이 돌아온 것은 몇 통 되지 않았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취재진이 보낸 최초의 이메일을 본 뒤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오랜 시간에 걸친 통화 끝에 그는 고민해보고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뒤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오전 10시, 신촌 로터리에 있는 ◯◯ 커피점에서 만나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10시 5분이었다.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가 한 바퀴 둘러보니 와이셔츠 차림의 점잖아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혹시 이◯◯ 선생님 되시나요?”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 상대를 살펴보니 백발에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이 척 봐도 대학교수나 선생님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그는 대학교수를 지내고, 한 국책연구원의 원장까지 역임한 지식인이다. 그는 가장 먼저 프로그램의 제작 방향을 물었다.
“우선 친일파 후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 인구 사회학적인 특징을 소개할 거고요, 재산 문제도 다룰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친일파 후손들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고 그 얘기들을 소개하기도 할 겁니다.”
기자의 설명을 들은 뒤 차분한 어조로 얘기를 시작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분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분들이라고 믿고 지냈던 자신의 증조부와 조부가 친일파로 선정되고,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산까지 환수당한 뒤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재산환수위원회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포장만 다르게 해서 누구 말대로 하면 과거사 가지고 먹고 사는 애들이지. 그냥 자기네들 일자리 아닙니까. 조직도 몇 개씩 만들고 예산도 엄청 가져다 쓰고. 무슨 근거로 100년 전의 자료도 없이 역적 집안으로 만들고 재산을 환수해요. 무슨 근거로.. 수백 억 쓰면서 장관급 만들어 놓고 고작 삼 년 동안 조사해서 너네 집은 죽일 놈 집안이야, 이거는 참..내가 글도 못 쓰는데 진정서를 수없이 냈어요. ”
그러나 그의 진정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소송도 해봤지만 결국 패소했다.
“내가 후손된 도리로서, 내가 이렇게 무능력하고 무력하고. 이래도 되는 건지, 잠이 안 와요. 솔직하게”
그의 불만은 주로 반민규명위가 분명한 근거도 없이 자신의 선조를 친일파로 몰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일까?
이재완
그의 증조부 이재완은 조선 왕실의 인척으로, 일제 강점기 후작 작위를 받았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철도 부설권을 넘길 때 일본공사관과 각서를 교환했다. 그 공로로 대한철도회사 사장에 임명됐다. 일제의 국권강탈 후 그는 일본 육군 중장의 예우를 받았다.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는 그의 비망록에서, 이재완을 이렇게 평했다. “실로 일본에 대한 공로가 크다”
그의 조부 이달용은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했다. 일제가 만든 친일 유학 단체인 조선 유도연합회에서 참의로 활약했고, 일제의 전쟁 준비를 위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재완 결정문
이재완은 1910년 10월 7일 일본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와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이었던 점이 고려되어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22년 8월 11일 사망할 때까지 작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한일합병 직후 일본정부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은 이재완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에 해당된다. 이재완은 일본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1911년 1월 13일, 은사공채 33만 6천원을 받았으며, 1912년 8월 1일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이재완은 같은 해 12월 7일 정4위, 1918년 12월 20일에는 종3위에 각각 서위되었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특별법⟩ 제2조 제19호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의 조항에 해당한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이재완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7호, 제19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결정문 중 이재완 부분 발췌
이달용 결정문
이달용은 1922년 8월 11일 부친인 후작 이재완이 사망함에 따라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1922년 10월 20일 작위를 계승하였다. 이달용이 작위를 계승함으로써 이재완이 수작할 당시 받았던 은사공채에 대한 권리를 동시에 승계받았으며, 조선귀족에 대한 예우 역시 계승하였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귀족이자 후작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이달용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말 소장 귀족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인 ‘동요회’ 활동에 참여하여 국방헌금을 헌납하였다. 또한 그는 1922년 10월 작위를 계승한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종4위, 정4위, 종3위의 서위를 받았다.
따라서 후작의 작위를 계승하고, 동요회를 통해 국방헌급을 헌납하였으며, 일본정부로부터 귀족으로서 서위를 받은 이달용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에 해당한다.
(중략)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이달용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7호, 제13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결정문 중 이달용 부분 발췌
그의 친척 가운데는 이민을 간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진정서를 낸다거나 소송을 진행하는 작업을 혼자서 감당하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친척들이 이민을 간 이유는 무엇일까?
뉴스타파 취재진은 친일파 후손 가운데 국적을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엄청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관보에 나온 수십만 명의 국적 포기자를 일일이 엑셀에 입력한 뒤, 확보된 친일파 후손들의 명단과 맞춰보는 일이다.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생년월일까지 확인해야 한다. 한 해 국적 포기자가 2만 명 가량인데, 그 2만 명을 다 입력해서 비교해 봐도 국적을 포기한 친일 후손이 단 두 명만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밝혀낸 국적포기자의 숫자는 346명이나 된다.
국적을 포기한 친일파 후손들의 국적 포기 시점을 분석해보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십 명 수준에 불과했던 국적 포기자가 2000년대에 급증한 것이다.
2000년대 벽두부터 시민단체와 국회가 친일청산의 기치를 들기 시작했고, 이어 노무현 정부가 본격적으로 국가 차원의 과거 청산 작업을 진행됐다. 친일 후손들은 이 같은 친일청산 작업에 대한 불만 때문에 한국을 떠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추정해볼 수 있는 단서는 있다.
우리나라의 전체 국적 포기자 그래프다. 이 그래프를 보면 확실히 2000년대 들어 국적 포기자가 늘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90년 대 후반 외환위기의 영향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친일 후손들의 국적포기자 증가폭은 전체 국적포기에 비해 훨씬 가파르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2010년대의 추세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간이 종료되는 등 친일 청산 작업이 일단락되자 그 이후 친일 후손들의 국적포기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러나 전체 국적포기 추세는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6. 2015년 8월 6일 새벽, 서울 반포동 ◯◯ 아파트
뉴스타파 취재진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새벽같이 반포동 ◯◯ 아파트로 왔다. 이인호 KBS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어제는 아침 7시 반쯤 왔지만 이 이사장을 만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이사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경원선 철도복원 기공식에 참석하느라 새벽 일찍 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아예 새벽 6시부터 기다리기로 했다. 연일 계속되는 야근에 새벽 출근까지.. 자꾸 눈이 감겼지만 그래도 이 이사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아파트 현관문을 노려봤다.
8시 10분쯤 드디어 이인호 이사장이 나왔다. 이인호 이사장을 기다리고 있는 제네시스 차량에서 아파트 현관까지의 거리는 불과 5미터 정도, 이 이사장이 차에 타기 전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예의바르게 인사를 던지자 이 이사장도 환하게 웃어줬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자 이 이사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친일파 후손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조부의 친일 논란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건 이 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그런 분들이 여러 분 계신데..제가 국제 회의에 참석해야 해서 지금 빨리 가야해요.”
차에 올라타려는 이인호 이사장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질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친일청산에 반대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셨는데, 혹시 조부의 친일행적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닙니까?”
“천만에요. (반대한 적 없어요???) 나는 역사학자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얘기한 것 뿐이에요”
“천만에요. 나는 역사학자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얘기한 것 뿐이에요”
그 답변을 끝으로 이인호 이사장은 승용차 문을 닫은 뒤 아파트를 떠났다.
이인호 kbs 이사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친일청산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혀왔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발언에) 감동을 받았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를 비판하면 제정신 아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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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후보자가 낙마해야 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 때”
- 2014년 6월 19일, TV 조선 시사토크쇼 ‘판’
(박헌영이 이승만의 합작 제안을 물리치면서) 내세운 명분이 친일파 청산부터 해야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 그건 결국 소련에서 내려온 지령 때문이었어요. 공산주의 입장에서 보면 소위 민족주의 부르주아 세력을 약화시켜야 되는데 친일파 청산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내세우기 좋은 명분이었기 때문에...
- 2014년 9월 23일, 전경련 강연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수반까지 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대단히 훌륭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 독립에는 반대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공로자로 거론한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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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는 임시정부로도 평가받지 못했다
- 2014년 10월 22일 kbs 국정감사
일제 강점기 친일파였던 선대가 이룬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에 힘입어 누구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온 이인호 KBS 이사장. 그의 인생은 뉴스타파가 추적해 확인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 1,177명의 모습을 대표해서 보여준다. 물론 이인호 이사장에게 할아버지의 친일 행적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손으로서 선대의 행위를 겸허하게 인정하기는커녕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를 폄훼하고, 친일청산의 정당성을 매도하는 것은 공영방송의 이사장으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언행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공인으로서 우리나라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의 이 같은 행태는 과거 청산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해방 70년을 맞은 지금, 진정한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은 친일파 후손들이 선조의 잘못을 인정하고, 과거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에서 시작돼야 한다.
“할아버지하고 아버지가 전쟁에 협력을 했거나 반인륜적인 행위를 했거나, 이것에 대해서 저는 후손들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상은 밝혀줘야 되는 게 이분들이 사회 중추에 계시잖아요. 이분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사실은 한국의 미래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거든요. 이분들을 비난할 문제가 아니고, 이분들의 윗세대 분들이 어떻게 했느냐에 대해서도 이분들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다음 장 ‘부역의 대가, 부의 대물림’ 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 1,177명의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취재, 글 : 김강민 김용진 박중석 송원근 심인보 이보람 최윤원
디자인 : 최미정
사진 : 김남범 최형석
출판 : 임종헌
자료조사 : 김민정 김태민 박단비 박주은 임세지 서가람 정상석 제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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