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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주목할 만한 인물]황이라씨
글 권기정·사진 서성일 기자 kwon@kyunghyang.com 입력 : 2011-12-22 21:48:14ㅣ수정 : 2011-12-22 22:35:33

학비없어 비정규직 취업, 해고 뒤 농성
묵묵히 309일간 크레인의 ‘그’를 수발

황이라씨(31)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99년이었다.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었다.

집안형편은 어려웠다.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버거웠다. 결국 3학년 때 휴학했다. 아르바이트 급여로는 생활도 힘들었다. 2004년 부산지하철 매표소원으로 취업했다. 민간위탁회사에서 고용한 비정규직이었다. 하루 2교대, 급여는 100만원. 월 70만원씩 악착같이 모으면서 복학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2005년 추석을 보름 앞두고 일자리를 잃었다. 부산지하철공사가 매표업무 무인화를 추진하면서 매표소 직원 100여명을 집단 해고한 것이었다.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지기 2년 전 일이다. 

해고자들은 그해 겨울부터 부산시청 광장에서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부산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루 열 시간 노동에 월 100만원. 그 소박한 삶을 이어가게 해달라고 생애 가장 혹독하고 서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농성은 423일간 이어졌다. 해고자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황씨는 이 과정에서 당시 47세의 한 여성을 만났다. 두 사람은 26세에 해고가 됐다는 것만으로 친구가 됐다. 고단한 삶을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멘토와 멘티’가 됐다. 

 

올 1월5일. 오후 5시쯤 그가 전화를 했다. ‘저녁이나 하자. 따뜻한 걸로.’ 생태탕을 먹었다. 목욕탕에도 함께 갔다. 그는 ‘기분이 좋다’고 했다. 그는 일주일 전부터 대기업이 운영하는 조선소의 생활관에서 철야시위를 하고 있었다. 사측의 갑작스러운 정리해고에 대한 항의였다. 이튿날인 6일 새벽 문자가 왔다.

“책상 위에 편지가 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스물한 살에 입사한 이후 사측과 참 질긴 악연이다. 해고되고 징역 갔다 오고, 수배되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한 살이 됐다. 이번 결단을 앞두고 많이 번민했다. 이렇게 조합원들 잘려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다.” 잘하고 내려올 테니 걱정마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는 이날 조선소의 크레인에 올라갔다. 35m의 고공.

황씨는 눈물이 핑 돌았다. 따뜻한 밥·목욕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의 ‘싸움’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고 지루하게 계속됐다. 황씨는 하루도 크레인 옆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 세 끼는 물론 옷가지와 대소변 등을 밧줄에 달아 올리고 내렸다. 본인은 노조사무실과 농성장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사실상 그의 생명줄이었다. 

황씨는 자신의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여준 신뢰와 믿음에 보답하는 길로 여겼다. 

계절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봄이 되면서 그의 고공농성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됐다. 보통 사람들이 그의 진정을 이해했다. 지지자들이 버스를 타고 몰려왔다. 휴대전화에는 격려 메시지가 끊이지 않았다. 정치권도 주목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측은 해고자들의 복직을 약속했다. 크레인에 오른 지 309일째 되던 11월10일 그는 다시 땅을 밟았다. 

“힘들었던 때요? 법원에서 퇴거명령을 내리고 강제집행을 하는 날(6월27일)이었어요. 경비용역이 들이닥치고, 아수라장이었어요. 크레인 아래 컨테이너 창고로 숨었지요. 깜깜한 창고에서 하루를 보냈어요. 저까지 끌려나가면 그를 지킬 사람이 없잖아요. 살아남아서 밥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당시 사측은 전기를 차단하고 음식 공급을 막았다. 하지만 곧 비난에 휩싸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나서면서 음식과 물 공급이 허가됐다. 이후 황씨는 하루 세 번씩 밧줄에 밥과 옷가지 등을 달아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건강을 해친 탓인지 위가 좋지 않았다. 식사 도르래에는 주로 고구마와 죽이 올라갔다. 황씨는 그의 고공농성을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한 투쟁”이라고 했다. 자신이 한 일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했다.

“투사가 된 것이냐”는 질문에는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섭고 두려웠고 불안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투사라면 저희를 도와준 국민들이 모두 위대한 투사죠.” 황씨는 그와 지낸 1년을 회고하면서 ‘약속’ ‘사람답게’라는 말을 여러 차례 꺼냈다. 회사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노동자들은 차디찬 거리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 이 같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기 위해 저항하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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