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02703

이완용과 친박집회, 그들의 똑같은 주장
[주장] 1919년과 2017년, '이러다간 나라 망한다'는 수구세력은 똑 닮았다
17.03.01 18:28 l 최종 업데이트 17.03.01 18:28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도균(capa1954)


▲ 독립기념관. 유관순 투옥 일지 천안 목천 독립 기념관에서 유관순 투옥 일지를 공개했다. 1986.8.2 ⓒ 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98년 전, 1919년 3월 1일. 이날 오후부터 서울 시내는 온통 만세 소리로 뒤덮였다. 고종 장례식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순식간에 시위대로 돌변했다. 그러면서 서울은 만세 소리의 천지로 바뀌었다. 

유관순의 학교인 이화학당은 덕수궁 서쪽에 있었다. 서양 선교사 프라이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였다. 프라이 교장은 신변 안전을 이유로 학생들의 교문 밖 외출을 제지했다. 두 팔을 벌리고 정문에 서서 그는 학생들을 막아섰다. 

학생들은 "우린 우리나라를 위해 나가려는 겁니다"라면서 "비켜 주세요"라고 고함쳤다. 그래도 교장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학생들은 정문을 포기하고 담장을 넘어 시위대에 파묻혔다. 그 속에 열여덟 살 유관순도 있었다. 이것이 유관순의 파란만장한 3·1 투쟁의 출발점이다. 

불법정부, 조선총독부에 맞선 유관순의 투쟁은 휴교령이 내려진 3월 10일 이후로는 고향인 천안에서 계속 이어졌다. 그는 그날 이후 아우내 장터 시위를 비밀리에 기획·준비했고, 4월 1일(음력 3월 1일)에는 부모님과 함께 장터의 광장으로 나가 열렬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 현장에서 유관순은 경찰이 쭉 내민 칼에 찔렸다. 그러고 쓰러졌다. 잠시 뒤 아버지가 총알을 맞아 고꾸라지고, 어머니도 뒤따라 쓰러졌다. 이날 시위에서 순식간에 부모님을 잃은 유관순은 그 자신도 중상을 입고 도망자 신세가 됐다가, 얼마 안 있어 경찰에 체포되고 재판에 회부됐다. 

유관순은 법정에서도 열심히 투쟁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부당하다면서 법관한테 맞섰다. 서대문감옥에서도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만세운동으로 끌려온 동료 수감자들까지 귀찮아할 정도로 열심히 만세를 외쳤다.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에는 3천 명 이상의 수감자들을 조직해서 만세시위를 벌였다가 간수들한테 집중적인 구타를 당했다. 이날의 구타로 그는 방광이 파열되었다. 간수들이 그쪽만 집중적으로 구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때문에 몸져눕게 된 그는 그해 가을, 눈을 감았다. 

1920년 10월, 이화학당 학생들은 "관순이가 돌아온다"는 누군가의 외침을 듣고 학당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 내려갔다. 반가움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신이 되어 돌아온 친구의 모습을 보고 그들은 대성통곡으로 그날 밤을 지새웠다. 


▲  감옥에서 외치는 대한독립 만세.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1919년 3월, 우리 국민이 열심히 싸운 이유

1919년 3월에 유관순을 포함한 우리 국민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열심히 싸운 것은 식민지배자 일본의 지배가 외세의 지배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우리 국민의 재산권을 빼앗았다. 또 한국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한국의 자원을 강탈했다. 이 과정을 통해 대다수 한국인들을 개·돼지처럼 취급하는 동시에, 일본인과 친일파한테만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 대다수 한국인들을 위한 땅이 아니라, 소수의 일본인 및 친일파를 위한 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1910년 당시만 해도 조선왕조의 멸망에 대해 덤덤한 반응을 보였던 일반 국민들이 1919년에 그렇게 극렬하게 저항한 것은, 일본의 처사가 너무도 부당하고 불법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수의 한국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기마 헌병대의 총칼에 달려들며 만세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3월 1일 그날, 서울 탑골공원과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에 참가한 사람 중에 연희전문학교 2학년 정석해가 있었다. 해방 뒤에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고, 1960년 4·19 혁명 때 교수단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다. 

정석해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광화문 앞에서는 '독립 만세'라는 구호와 더불어 '왜놈 물러가라'는 함성도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우리의 발걸음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왜놈 물러가라'는 함성이 지축을 진동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그날 우리 국민들이 외친 '왜놈 물러가라'란 구호는 다른 말로 하면 '왜놈 하야하라', '왜놈 퇴진하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우리 국민들이 조선 총독과 일본 지배자들의 하야 및 퇴진을 외친 것은, 그 지배의 본질이 우리 국민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16년 가을부터 우리 국민들이 하야와 퇴진을 외친 것과 비슷한 동기로, 1919년의 유관순과 우리 국민들도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쳐댔던 것이다. 

지난해 연말 이래, 촛불의 열기에 당황한 친박 세력은 촛불 집회장 근처에서 집회를 여는 한편, 촛불집회를 헐뜯는 데 여념이 없다. 그들은 말로는 박근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그렇게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다.  

유관순과 만세 시위대를 바라보는 1919년 당시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금의 친박세력처럼 그때의 친일 세력도 시위대를 향해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왜놈 퇴진', '왜놈 하야'를 외치는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나라를 망치고 세상을 망치는 세력'이라고 험담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들 중의 대표주자가 바로 이완용이었다. 1905년에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더니 1910년에는 조선의 국권마저 일본에 팔아넘긴 그는, 1919년에는 3·1운동을 탄압하는 데도 남한테 뒤질세라 앞장섰다. 

매일 같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만세 시위는 3월 1일 제1차, 3월 2일 제2차로 시작해서 3월 31일에 제31차를 기록하더니, 4월에 들어선 뒤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자 겁이 난 이완용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여러 차례 글을 실었다. 시위 열기를 가라앉힐 목적이었다. 


▲  이완용.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이완용과 친박집회의 '똑같은 주장'

4월 5일 자 <매일신보>에서 이완용은 시위 참가자들을 "무지하고 몰지각한 아이들"로 폄하했다. 유관순을 포함해서 시위대의 주력을 형성한 10대 학생들을 그렇게 깎아내린 것이다. 

이완용은 "무지하고 몰지각한 아이들이 망동을 벌이자, 각 지방에서 뜬소문을 듣고 함께 움직여 치안을 방해하고 있다"며 탄식했다. 사실도 아닌 뜬소문에 근거해서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지금의 친박 집회에서 나오는 것과 똑같은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 뒤에 이완용은 "농사철이 임박하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업에 종사하면 안락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학생들을 따라 시위에 나가지 말고, 논밭으로 돌아가 일이나 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동포여! 내 말을 듣고 앞으로는 후회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까지 남겼다.  

이완용은 5월 29일 자 <매일신보>에서는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로 요란을 떨었다. "앞뒤 이해관계를 분간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는 무리가 생기면, 이는 조선 민족을 멸망시키고 동양평화를 파괴하려는 우리의 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왜놈 하야, 왜놈 퇴진을 외치는 것은 민족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동양평화를 망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의 친박집회 연사들과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이다. 

유관순을 비롯한 우리 국민들은 불법 통치를 몰아내고 정상 상태로 되돌릴 목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왜놈 나가라'를 외쳤다. 그러다가 목숨까지 잃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친일 수구세력은 '나라를 망칠 사람들'이라며 불순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지금과 너무도 유사한 상황이 98년 전에도 있었던 것이다. 

1919년의 유관순과 우리 국민들은 태극기를 들었고, 이완용과 친일 수구세력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2016년 연말부터는 수구세력이 태극기를 들었다. 유관순의 뜻을 따라 불법 통치에 대항하는 3·1 정신의 계승자들은 태극기 대신 촛불을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저세상의 유관순이 2017년 3월 1일에 환생하게 된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잡으려 할까? 답은 명확하다. 유관순은 수구세력이 아니다. 불법 통치에 맞선 선의의 국민 편이었다. 그래서 1919년에 태극기를 들었고, 같은 이유로 2017년에는 태극기를 들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수구세력이 태극기를 집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관순은 이번에는 당당하게 촛불을 높이 치켜들 것이다. 그것도,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들고 2017년 3월 1일의 광화문에 나타날 것이다. 1919년에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와 '왜놈 나가라'란 구호 대신, 이번에는 '박근혜 나가라!'란 구호를 외칠 것이다. 그런 뒤에 덕수궁 앞으로 넘어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완용을 따라 하지 말라"는 강력한 호소를 던질 것이다. 

2017년 3월에도 계속될 촛불집회 현장에서 유관순은 참가자 전원의 몸에 들어가 목청껏 박근혜를 성토할 것이다. 그것이 유관순식의 2017년 환생이 될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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