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미 “전두환, 사실상 군 통수…계엄군 과잉반응도 의도”
최민지·이유진 기자 ming@kyunghyang.com 입력 : 2017.04.13 19:12:00 수정 : 2017.04.14 02:30:01
ㆍ경향신문, 미 정부 군사·외교 비밀문서 분석
▲미 국방정보국 비밀문서 계엄군의 폭력적인 진압이 ‘전두환의 게임 플랜’이었다고 분석한 미 국방정보국(DIA)의 1980년 6월4일 기밀문서.
경향신문은 미국의 언론인 팀 셔록이 최근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제공한 미국의 외교문서 3800쪽에 대한 분석을 진행했다. 이 가운데 3600쪽가량은 1996년 셔록의 보도 직후 미국 정부가 한국에 제공한 자료들과 겹치며 당시 국내 언론에도 소개됐다. 당시 공개되지 않았거나 그 후 추가 공개된 국방정보국(DIA)·중앙정보국(CIA)·국무부 문서들에서도 5·18 당시 정황을 담은 유의미한 외교기록들이 목격되고 있다.
■ “계엄군의 과잉진압은 전두환의 ‘게임 플랜’”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자신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서울에 있었을뿐더러, 보안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군에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시각은 달랐다. 전씨가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며 사실상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당시 미국의 판단이다. 1980년 5월 작성된 여러 건의 DIA·국무부 문건은 계엄군을 움직이는 조종자로 전씨를 지목하고 있다.
▲미군 태평양 합동정보센터 기밀문서 미 태평양사령부 산하 합동정보센터(JICPAC)가 공개한 광주 5·18 당시 일본 자위대의 동향을 담은 문서.
미국 DIA의 한국 내 요원이 1980년 6월4일 보고한 ‘한국 혼란 업데이트’에는 5·18 당시 발생한 시민에 대한 계엄군의 발포와 학살의 배후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있음을 적시했다. 이 문서에는 한국군 관계자로 추정되는 복수 정보원의 얘기가 인용돼 있다. 한 정보원은 “5월17일 광주에 배치된 7공수여단은 초반에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했다”며 “(군이) 과잉반응을 보인 것은 맞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 ‘과잉반응’이 전두환의 ‘게임 플랜(game plan)’의 일부”였다는 분석을 덧붙였다. 1980년 5월20일 작성된 ‘광주 상황 업데이트’에서는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대응을 전하며 “군대는 그들의 힘을 자제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당시 광주시민에 대한 군의 대응이 지나치게 폭력적이었음을 뒷받침한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보낸 외교문서 1980년 5월9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가 본국에 보낸 기밀문서.
폭력진압에 열의를 보인 당시 한국 군인들의 태도도 보고서로 전달됐다. 5월8일 작성된 문서에서 요원은 전국의 대학생 시위 진압에 파견된 한국 공수부대원들에 대해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특수부대에서 파견된 군인과 남성들은 기꺼이 ‘머리를 깨부술(breaking heads)’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묘사했다.
1980년 6월9일 작성된 DIA 문서에는 5·18 당시 한국군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한국군 관계자들의 신랄함과 비통함이 담겼다. 이 문서는 계엄군의 잔인한 대응을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사정권의 지배자들이 베트남전에서 얻은 전투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5월22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이 내부 치안 유지를 위해 추가적인 군 투입을 요청할 경우 전두환 일당의 편집증을 고려해 그들에게 훈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5월18~27일 사이 작성된 DIA 문건에도 “전두환은 광주와 관련해 극도로 격렬한 태도를 보였다”며 “광주사태의 성공적인 처리에 그의 미래가 달렸다”는 분석이 실렸다.
■ “광주는 폭도 아닌 자유시민의 도시…‘보스턴 차 사건’과 비슷”
미국은 5·18 당시 광주를 “폭도가 아닌 자유시민의 도시”로 묘사하고 ‘보스턴 차 사건’에 비유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6월10일 본국에 보고한 ‘광주사태에 대한 내부 정보원의 기록’ 문서에서 “5·18사태는 공산주의자가 선동하거나 개입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는 당시 광주에 체류했던 익명의 정보원 증언을 글라이스틴 대사가 정리한 글로 5월18~27일 광주 상황을 서술했다. 글라이스틴은 이 문서를 “가장 균형 잡힌 기록이자 분석”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이 정보원은 5월21일자 기록에서 “5·18사태는 광주시민 전체의 문제이며 일부 학생들의 문제로 논의돼서는 안된다”면서 “우리가 광주에서 본 것은 (공권력에 의해) 극도로 몰아붙여진 시민들의 시위였다. 이 시위는 정책과 계획이 없는 폭력적 분노였으며,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의 일시적인 무법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5·18사태는 ‘보스턴 차 사건’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1773년 보스턴 시민들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차 판매권 독점에 항의하자 영국 정부가 무자비하게 진압해, 결국 미국 독립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광주의 시위는 “정책과 계획이 없는, (평소에는)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의 일시적인 무법”이며 “자유로운 시민들이 짓밟힘을 거부하면서 생긴 자발적 연소”라는 것이다.
이 정보원은 ‘광주 공산주의자 개입설’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는 “5·18을 두고 공산주의자가 선동하거나 개입했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정보이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군은 민간인 사상자를 최소화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 혹은 북한 개입설을 반박하는 내용은 국무부 문서뿐 아니라 DIA와 CIA 문서에도 등장했다. 1980년 6월2일 DIA 요원이 정보원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문서에는 “공산주의자가 광주사태에 개입했는지를 묻자 정보원이 ‘공산주의자 개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시민들이 보인 행동의 동기는 공산주의가 불어넣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산당의 노리개가 아니었다’고 답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한 CIA 요원은 1980년 5월21일 문서에서 “북한이 전두환이 계엄령을 확대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진압한 것을 비난했지만 남한 상황에 개입할 어떠한 의도도 부인했다”고 적었다. 글라이스틴 대사 역시 같은 달 문서에서 ‘남한에 난관이 생기더라도 개입할 의도가 없으며, 남한 당국이 남한 내부의 위기를 우리와 연결시켜선 안된다’는 북한 성명을 소개하며 “북한의 발언은 걸러 들어야겠지만 그럼에도 위안이 된다”고 했다.
<최민지·이유진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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