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media.daum.net/v/20170518222128169

[인터뷰] 전남대병원 레지던트 1년차로 겪은 5·18은..
손석희 입력 2017.05.18 22:21 

김영진 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어린아이도 총상으로 내원..결국 사망"
"병원 향해 2차례 총격..조준사격도 직접 목격해"



[앵커]

80년 5월. 광주 전체가 마치 전쟁터 같은 풍경이었겠지만 병원이야말로 생과 사를 오가는 가장 참혹하고도, 또한 가장 긴박했던 장소였습니다. 당시 레지던트 1년 차로 전남대병원에서 광주 시민들을 치료했던 한 분을 만나보겠습니다. 전남대병원 전 병원장이기도 한 김영진 외과 교수가 연결돼 있습니다. 김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안녕하십니까?]

[앵커]

80년 5월 당시에 레지던트 1년 차였다고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계엄군이 투입된 날이 18일이었고 도청 앞의 집단발포가 21일에 있었는데 환자들은 18일부터 바로 들어왔습니까?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5월 18일에는 주로 곤봉에 맞은 환자들이 많이 있었고요. 19일에 첫 총상 환자가 왔습니다. 그리고 21일에는 이제 집단 발포로 총상 환자들이 밀려들어 오면서 병원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앵커]

19일에 첫 총상 환자, 김영진 교수께서 직접 받으셨다면서요.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19일에 복부 총상을 입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인데 본인 말로는 장갑차에서 총을 쐈다고 하였습니다.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주치의를 맡아서 2번의 수술을 마치고 다행히 회복되어 직후 다른 질병으로 병원에 내원해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그 실려 온 환자들의 나잇대가 어땠습니까? 혹시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있었습니까?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10대 미만의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있었고요. 20대가 절반에 육박하고 그다음이 30대가 많았습니다.]

[앵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고 지금 말씀하시기를 10대 미만, 그러니까 한 7, 8, 9살 정도. 그런데 혹시 그 7, 8, 9살 정도의 환자들도 혹시 총상 환자가 있었습니까?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네.]

[앵커]

그렇습니까?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아주 어린 아이가 총을 맞아서 내원한 경우가 하나 있었습니다.]

[앵커]

어떻게 됐나요?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결국은 사망하게 됐습니다.]

[앵커]

대부분 총상환자들이었다면 상태가 굉장히 심각했을 것 같습니다.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머리에 총상을 입은 환자들이 상당히 많았었는데요. 뇌가 노출된 환자들이 있어서 그 환자들은 대부분 사망했고 다음이 복부 총상이 많았는데 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환자들도 있었고 또 심한 경우는 간이나 내부 장기에 총상을 입어서 출혈로 많이 사망을 했었습니다.]

[앵커]

굉장히 끔찍했던 상황인데. 머리 총상이 많았다는 것이 굉장히 뭐랄까요, 좀 의외이기도 합니다.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할 때 군중들을 향해서 총을 난사해 버렸기 때문에 아마 머리 부상이 많았을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앵커]

그런데 계엄군이 병원을 향해서도 총을 쐈다는 증언이 이미 나온 바가 있습니다. 병원을 향해서 조준 사격했다는 얘기인가요, 어떤 얘기일까요?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병원을 향해서는 2번 총을 쐈는데요. 21일에 집단 발포를 하고 퇴각하면서 병원을 향해서 이제 사격을 하고 퇴각을 했었고요. 그다음에 27일에는 이제 다시 광주시로 진입을 하면서 저희들이 11층에서 이제 밖을 내다보고 있었거든요. 거기를 조준해서 사격을 해서 유리창이 깨지고 천장에 총알이 박히는 그런 것을 제가 목격을 했습니다.]

[앵커]

저희들이 그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인도적인 입장에서 병원에 총을 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김 박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는 당연히 그 당시에 계엄군이 의도적으로, 특히 퇴각하면서부터 총을 쐈다고 하니까 의도적으로 병원을 조준 사격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요?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그렇습니다.]

[앵커]

총상 환자들이 많았다면 당연히 피가 부족해서 수혈이 굉장히 급한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은 어땠습니까?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21일에 피가 많이 필요하게 됐었죠. 그래서 가두방송을 했었는데 시민, 학생, 이렇게 줄을 서서 엄청나게 많이 몰려들어서 오히려 피가 남아서 나중에는 돌려보내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앵커]

그랬군요. 아무튼 37년이 흘렀지만 당시 상황은 당연히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계시는 것 같고. 혹시 개인적으로 그 기간 동안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면 뭘까요?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저희들이 환자가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응급처지 이후에 수술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일반적으로 수술을 하게 되면 마취과에 먼저 수술 스케줄을 넣고 이제 상의를 해서 수술장으로 올리는데 그 당시에는 우선 수술장으로 급한 환자들을 옮겨놓고 마취과하고 상의를 했었습니다. 그때 한 40대 남자 환자가 총상 환자가 제 손을 잡더니 자기를 먼저 치료해 줄 수 없겠느냐, 이렇게 부탁을 했었는데 제가 답변이 '그래도 심한 환자부터 먼저 해야 되지 않겠냐' 이렇게 답변을 해서 거절을 했던 그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눈망울이 떠오릅니다.]

[앵커]

그분은 결국 사망하셨나요?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네.]

[앵커]

알겠습니다. 5·18 기념식 오늘 여러 가지 달라진 풍경이 보도가 되기는 했습니다. 감회도 좀 남다르셨을 것 같기도 하고 또 정부는 발포 명령자를 가려내겠다, 오늘 선언을 했는데 그런 뉴스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간단하게 말씀을 해 주신다면?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과거에 제가 5.18 기념식에 몇 번 참석을 했었는데요. 그때는 서로 비난하고 삿대질하고 싸웠는데 오늘 보니까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같이 손을 잡고 같이 부르는 것을 보고 이런 것들이 돌아가신 분들과 또 한을 안고 사는 유가족과 부상자들에 대한 어떤 사랑이나 배려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5·18 특별법 이후에 저희들이 부상자 등급심의위원을 저희들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보면 부상자들뿐만 아니고 광주 시민들도 여러 가지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평생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모두 같이 노력을 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5·18 당시에 레지던트 1년 차로 광주시민들을 치료했던 전남대병원 원장을 지내신 바 있는 김영진 교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김영진/전남대병원 외과 교수 : 감사합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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