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1645
'불온한 조선인' 9명 배출한 기와집, '반토막' 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축사에서 언급한 이상룡과 임청각, 이런 사연이
17.08.20 20:02 l 최종 업데이트 17.08.20 20:02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예지(jeor23)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독립투사 이상룡의 생가를 거론했다. 임청각으로 불리는 이곳을 노블레스 오블리주(귀족적 사명)의 상징으로 평가했다.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이런 집이 일제의 보복을 받았고, 이상룡의 후손들도 고난을 겪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아흔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 손녀는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가 그토록 포섭하려던 이 사람
▲ 임청각.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사진. 사진 왼쪽의 문 앞으로 철길이 나 있다. ⓒ 문화재청
임청각은 조선 중종 임금 때인 1519년 세워졌다. 지은이는 이상룡의 18대조인 고성 이씨 12대손 이명이다. 당시의 규모는 99칸이었다. 기둥 2개 사이의 공간이 1칸이다. 기둥이 3개면 2칸이다. 오래 되고 규모도 커서 건축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이런 집을 일본제국주의가 반 토막을 냈다. 철로를 깐다는 이유였다.
일제가 귀한 저택을 함부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은 이 집에서 불령선인 즉 '불온한 조선인'이 아홉 명이나 배출됐기 때문이다. 그 아홉 불령선인에 대해 <민족사상> 제8권 제1호에 실린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의 논문 '석주 이상룡의 선비정신과 구국운동'은 이렇게 말한다. 문장을 이해하기 쉽게 약간 교정했다.
"석주의 독립운동이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등으로 이어지면서 3대에 걸친 독립유공자 명문가가 되었으며, 동생과 조카 등까지 합하면 임청각은 모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일 뿐만 아니라..."
일본 입장에서, 임청각에 분탕질을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본은 국제정세가 조선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틈을 타, 사기·공갈로 나라를 편취 혹은 갈취했다.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은 게 아니라 지배력이 그만큼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약점을 만회하고자 조선 지배층인 양반 지주계급을 회유했다. 그들의 지위와 재산을 건드리지 않고 협력을 얻어내는 방법으로 이 땅에 대한 지배력을 구축했다. 토지조사사업 명목으로 땅을 빼앗을 때도, 양반 지주의 땅은 가급적 건드리지 않고 주로 서민층의 땅만 빼앗았다.
양반 지주계급과의 제휴로 지배권을 구축했기에, 양반들은 자기네 편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지주계급에게는 아주 못 되게 대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문가의 며느리로서 시아비지 김가진 및 남편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정정화의 <장강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본은 당시 독립운동에 귀족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을 대외에 내세웠었다. 물론 실제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다수가 일반 평민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은 양반 귀족들처럼 고상한 사람들은 절대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선전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양반 지주계급과의 제휴관계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본을 낯뜨겁게 만드는 양반들이 있었다. 세상이 흠모하는 양반 명문가 출신으로서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데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이들이었다. 정정화의 시아버지인 김가진의 가문도 그랬고, 일가 59명이 단체로 망명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회영의 가문도 그랬다. 그리고 임청각에서 태어나 혈족들과 함께 민족사랑을 실천한 이상룡도 그랬다.
▲ 이상룡. ⓒ 위키커먼즈
1858년 안동에서 출생하여 선비로 성장한 이상룡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키고자 의병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말로만 애국하는 사람은 참다운 선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념을 행동으로 표현해야 진정한 선비라고 생각했다. 이상룡의 글을 모은 <국역 석주유고> 상권에 이런 시가 있다.
"옛 사람들은 앎과 행함에 대해서
이는 양 날개와 같다고 비유하였네.
······
앎이라는 것은 행함의 시작이 되고
행함이라는 것은 앎의 끝이 되네.
······"
행함은 앎의 끝이므로 민족에 대한 지식은 민족 사랑의 실천으로 결실을 이뤄야 한다고 이상룡은 생각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53세의 이상용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전쟁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1911년 6월 이회영·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처음엔 신흥강습소)를 세운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은 홍범도나 김좌진 등의 독립군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로 세워진 임시정부가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무책임 및 좌우 노선 대립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1925년 이상룡은 대통령제가 폐지된 뒤의 국무령 체제에서 국무령에 취임해 좌우 통합을 시도하고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만주로 돌아가 독립전쟁 준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1932년 75세 나이로 만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국역 석주유고>에 따르면 이런 유언을 남겼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돌아가서는 안 되니, 우선 이곳에 묻어두고 기다리도록 하라."
철도 깔아 신념을 두 동강으로 쪼개려 한 일제
▲ 국립서울현충원의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있는 이상룡 무덤. ⓒ 김종성
이상룡의 무덤은 현재는 서울시 동작동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그는 안동 명문가 출신으로서 일제의 회유 대상인 양반 지주계급이었다. 일본이 부와 명예를 제시하고라도 포섭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당장의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가족과 재산을 민족에 바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랬으니 '양반 귀족들은 우리 편이다. 이분들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일제의 입장에서, 이상룡은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지주들한테만큼은 잘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건만 이상룡이 가족과 재산을 바치며까지 독립운동하니, 보복하기 위해 그가 살던 곳을 반 토막 내고 마당에 철로를 깔았다. 독립운동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독립투사가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하에서 고생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독립투사로 인해 그 가족이 고초를 겪는 것도 일제강점기 하에서는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지금도 여전히 당연하다. 1945년 해방 뒤에도 독립투사와 그 유족들은 여전히 고생과 고초를 겪고 있다. 1945년이 '고생 끝, 행복 시작'이 돼야 하는데도, 그들의 시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945년에 해방된 게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기가 사랑하고 헌신한 민족이 자신과 가족을 홀대하는데도, 이상룡의 민족사랑은 여전히 절절하기만 하다. 한반도와 만주와 중국을 무대로 펼쳐진 그의 민족사랑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이상룡 묘비에 아래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호! 슬프다
한민족 사랑하는 조국이여
차라리 칼을 빼 목숨 끊고 싶어도
이 한 몸 죽음
적이 바라는 바
피함이요
곡기 끊어 굶어 죽고 싶으나
나라 팔고 이름 사는 일 차마 할 수 없구나
이제 분루 삼키며 하늘 끝 치욕을 받을 것인가
끝내 힘 길러 밝은 결과를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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