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55337

[사진] 상처 입은 '국보 1호'의 민낯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4] 전란 속의 서울 2
17.09.01 14:31 l 최종 업데이트 17.09.02 12:22 l 박도(parkdo45)


1950. 10. 서울. 전화에 그을린 중앙청 앞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NARA

전황에 따라 바뀌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만 다치는 게 아니다.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도 전란의 화마에 온전치 못하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우리나라 산에는 늑대, 여우 등 맹수들도 흔했지만 전쟁을 겪는 동안 이런 동물조차도 수난을 당해 거의 멸종됐다고 한다. 

도시나 촌락도 마찬가지였다. 수도도 전선의 이동에 따라  여러 차례 옮겨졌고, 서울 중앙청 광장의 국기 게양대의 깃발(국기)도 그때그때 전황에 따라 태극기, 미 성조기, 유엔기, 인공기 등이 번갈아 게양되기도 했다.


1950. 9. 29. 서울. 미군 병사들이 서울을 수복한 뒤 환도식에 앞서 전화로 그을린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미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다. ⓒ NARA


1950. 9. 27. 서울. 서울 수복 후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유엔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 NARA


1950. 6. 인공 치하 서울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다.ⓒ NARA

이번 회에서는 전란 속에 깊은 신음을 했던 서울의 모습과 그때 인공치하를 몸소 겪었던 분들의 증언을 들어본다.

김성칠 - 의용군 지원 동기

1950. 7. 12.

신문에 보면 어느 대학에서 몇 십 명, 어느 중학(당시 6년제)에서 몇 백 명, 심지어 동덕 같은 여자중학이면서도 5, 6학년 전원 2백 명이 미적(美敵)과 이승만 도당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자진 의용군에 지원하였다는 시세 좋은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게재되고 있다. 

지원하면 그날로 곧 출진(出陣)하는 것이 이 나라의 특색이다. 마을에선 학교에 나간 자녀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서 부형들이 야단법석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서 학교에 찾아가 보면 이미 지원한 그 길로 바로 가서 영예스럽게도 전원 심사에 합격하여 곧 입대하였다는 것이다. 

철없는 어머니들은 눈물을 짜면서 "글쎄 그 몹쓸 것이 마지막으로 애비 에미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간단 말이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 다 떨어진 신발을 끌고, 대관절 어디로 간지 알아야지만 면회라도 갈 수 있지, 이런 답답한 노릇이 있나" 하고 넋두리를 늘어놓지만 그건 시국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52. 8. 8. 서울. 종로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본부로 전란 중에는 미8군 사령부가 주둔했다. 건물 국기 게양대에는 성조기와 유엔기가 펄럭이고 있다. ⓒ NARA

… 대학생들이 의용군을 지원하게 된 동기는 이른바 '세위(세포위원(細胞委員)의 준말)'의 끊임없는 선전으로 "적어도 대학생 된 자는 지금 의용군으로 나가서 한번은 치르고 와야지만 앞으로 인민공화국에서 사람값에 가지, 그렇지 않으면 이미 대한민국의 백성질은 했겠다, 무엇으로 이를 속죄할 길이 있으며, 반동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냐, 적어도 묵은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그도 지도층이 되려면 의용군 지원은  필수의 길이다. 그리고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이러한 줄기찬 선전이 그들의 불안한 심리를 채찍질하고 그들의 공명심을 부채질한 것이다.

-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조교수였던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 98~99쪽


1951. 4. 서울. 전란 중 서울 반도호텔(현,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 일대로 매우 고즈넉하다.ⓒ NARA

김원일 - 하룻밤 사이에 날아간 집 

인공치하 석 달을 서울에서 살며, 나는 후방의 전쟁 상황을 많이 목격했다. 7월 중순부터 시작된 미군 비행기의 공습은 대단했다. 처음 한동안은 창공에 비행기가 뜨면 공습 사이렌이 길게 울렸으나, 비행기들이 서울 하늘을 점령하다시피 떠 있고 시도 때도 없이 폭격을 해대자 사이렌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대여섯 대씩, 어떤 때는 열 대가 넘는 비행기들이 나타나 기총소사를 쏟아 붓고 포탄을 주르르 떨어뜨리곤 사라졌다. 

서울은 차츰 잿더미로 변해 갔다. 북한군이 남한 어디까지 해방시켰는지 지도까지 그려 넣은 뉴스판이 거리 담벼락에 자주 바뀌어 붙여졌다. 영진공업사 앞 길거리에는 부서진 북한군 탱크가 한 대 방치되어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에게는 그 탱크가 훌륭한 놀이터였다. 당시 충무로 길은 포장되지 않은 상태로 장충동 빨래터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학교가 징발 당하자 피란을 못 간 초등학교 학생들은 방학 때임에도 교회에 매일 등교했다. 북에서 내려온 여선생이 공부를 가르쳤는데, 특히 북의 노래를 많이 배웠다. 오후에는 열지어 거리로 나가 비행기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차도를 점령한 벽돌더미 치우는 일을 했다. 비행기가 나타나면 재빨리 건물 안으로 숨었다. 

용산에 있던 저유소와 탄약저장창이 항공 공격을 받아 낮 내도록 폭발음이 들렸고, 부상당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업혀서 남산을 넘어오는 걸 보았다. 그날 남산 위 하늘이 검은 연기로 덮였는데, 그 연기 탓은 아니겠지만 저녁이 되자 비가 내렸다.


1951. 4. 서울.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시청으로 그 당시에는 도로 한가운데 전차길이 놓여 있었다. 왼쪽은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다.ⓒ NARA

8월에 접어들자 야간 공습이 특히 심했다. 어둠이 내리면 일체 불을 밝힐 수 없고 창문을 가릴 수도 없었다. 저녁밥도 해 지기 전에 지어서 먹어 치워야 했다. 밤에는 미군 정찰기가 서울 하늘을 점령했다. 민청에서 집집마다 나누어 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방 벽에 붙여 놓아야 했는데, 밤에는 정찰기에서 내쏘는 탐조등 불빛이 그 초상 위를 훑고 지나간 것을 본 적도 있다. 

어느 날 밤, 가까이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 집 함석지붕 위까지 날아온 돌조각이 쏟아졌는데. 이튿날 나가 보니 있던 집은 간데없고 큰 웅덩이가 패여 있었다. 이웃사람들 말이 그동안 징집을 피해 숨어 있던 장정이 피란길에 나서기 전 밥을 지어 먹다 그 불빛이 비행기에 들켜 폭탄을 맞았다고 했다.

- 김원일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36~37쪽.


1951. 4. 서울. 태평로 전 국회의사당(현 서울 시의회)으로 그 언저리가 한적하다. ⓒ NARA

박완서 - 유령의 도시가 된 서울

"얘들아, 우리 현저동으로 가자구나."

어머니로부터 현저동 소리를 듣자, 나는 오랜 방황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탕아처럼 겸손하고 유순해졌다. 번들거리는 불안한 빛을 빼면 텅 빈 오빠의 눈에도 일순 기쁨 같은 게 어렸다.

… 우리는 마치 귀향처럼 조용한 희열에 넘쳐 허위단심 현저동 꼭대기를 기어올랐다. 골목마다 낯익고 정다워서 우리를 감싸 안는 듯했다. 작전상 후퇴의 마지막 날 저녁나절이라 동네는 움직이는 거라곤 개미새끼 한 마리 못 만나게 완전히 비어 있었다. 내려다본 시가지도 불빛 하나 없이 황혼에 잠긴 게 갯벌처럼 공허해 보였다. 어머니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1951. 4. 29. 서울. 전란으로 텅 빈 고즈넉한 서울 을지로 거리를 군용 지프차가 달리고 있다.ⓒ NARA

"빨갱이란 사람들도 참 딱한 사람들이지. 여기 사는 가난뱅이들 인심도 못 얻고 무슨 명분으로 빨갱이 정치를 할 셈인고."

어머니가 그때까지 알고 지낸 집을 몇 집 찾아갔으나 물론 다 비어 있었다. 우린 그 중에 우물이 있는 집을 골라 문을 다고 들어갔다. 집이 허술하니까 문도 수월하게 딸 수가 있었다. 모든 집이 비어 있어서 어차피 무단 침입할 바엔 좀 더 나은 집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나중에 사과하고 신세를 갚는 걸 전제로 하려 했기 때문에 아는 집 가운데서 골라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우린 사람이라곤 못 만났고, 세상이 바뀐 건지 안 바뀐 건지 알아낼 수도 없었다.

-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동서한국문학접집 27권 421쪽


1951. 3. 전란으로 열차도 다니지 않은 서울역의 고즈넉한 광경으로 매우 을씨년스럽다. 당시 일부 종군기자는 최신의 칼라필름을 쓰고 있었다.ⓒ NARA

(* 다음 회는 '흥남철수작전' 편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를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1950. 11. 서울. 서울시민들이 중앙청 앞 세종로 길섶 부서진 건물(현재 미 대사관 자리) 잔해 속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NARA


서울. 서울 수복 직후 목재를 실은 우마차가 종로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가고 있다.ⓒ NARA


1950. 10. 서울. 서울 수복 직후 서울거리로 전화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을지로 입구인 수표동 네거리로 짐작된다.ⓒ NARA


1951. 3. 서울. 국보 제1호 숭례문(남대문)도 전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NARA

덧붙이는 글 | *필자가 2004, 2005, 2007년 세 차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입수한 한국전쟁 사진 자료 및 포스터는 눈빛출판사에서 『한국전쟁 Ⅱ』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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