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9423
조선총독부가 흑산도에 직원 직접 파견한 까닭은...
[고래의 섬, 흑산도 ⑦] 해체한 고래 대부분 일본으로 운송
17.10.20 16:18 l 최종 업데이트 17.10.20 16:18 l 이주빈(clubnip)
사람들은 '고래' 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 기자 말
☞이전기사 : 일제가 한반도 근해에서 학살한 대형 고래만 8천여 마리
▲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서 고래를 잡았다는 보도가 처음으로 실린 1918년 5월 3일 자 <매일신보>. ⓒ 매일신보 갈무리
한반도 동해에서 대형 고래 포획을 일삼다가 그 영역을 남해와 서해로까지 확대한 일제와 포경회사들. 그렇다면 흑산도에 포경근거지를 설치한 시기는 구체적으로 언제일까? 몇몇 자료는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설치시기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게 해준다.
우선 당시 발행된 신문에서 대흑산도 포경기지 설치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관련 소식을 처음으로 보도한 신문은 <매일신보>였다. <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일제가 사들여 1910년 8월 30일부터 <매일신보(每日申報)>라는 이름으로 바꿔 발행한 것이다.
1918년 5월 3일 자 <매일신보>는 '대흑산도 포경고(大黑山島 捕鯨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흑산도 포경장의 금기 포경고는 지난 28일 지금 합계 78두에 달하는데 작년 4월과 동수에 달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최소한 1917년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작년 4월과 동수'라는 기사를 통해 1917년 4월 현재 일본 포경회사가 흑산바다에서 포획한 고래의 수가 78마리에 이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설치시기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는 1917년에 간행된 <전남사진지>이다. <전남사진지>는 목포에 주소를 둔 목포신보사에서 발행한 것으로, 발행인은 야마모토 쇼이치(山本精一)였다.
<전남사진지>에는 일제 당시 전남의 사회경제상을 엿볼 수 있는 사진 자료와 해설들이 많이 담겨있다. 특히 '대흑산도 예촌 포경근거지'라는 제목의 사진 해설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의 설치시기와 현황, 고래해체 작업 내용 등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일포경합자회사는 1916년 12월 포경근거지를 무안 대흑산도 예촌에 설치하고 포경업을 개시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근해에서 고래의 회유가 많지만 수수방관했으나 회사의 사업개시이후 2척의 포경선이 낙위식 포살법으로 1917년 4월까지 좌수경, 일두장수경 78마리를 포획했다.
근거지에서 직접 해체하여 적육, 지방육, 경근, 경수, 경유, 골분, 혈분 따위로 처리하여 운송선에 실어 식용품은 시모노세키(下關)로, 비료는 효고(兵庫)로 보냈다. 어획 총액이 무려 300,000원에 달했으며 포획과 그 해체 상황의 장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1917년 발행된 <전남사진지>에 실린 '대흑산도 예촌 포경근거지' 사진. 예촌은 지금의 전남 신안군 흑산면 예리이다. ⓒ 전남사진지
이 사진 해설을 통해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는 1916년 12월에 설치됐으며, 설치 장소는 전남 무안군 예촌임을 알 수 있다. 무안군 예촌은 지금의 전남 신안군 흑산면 예리다. 대흑산도에 포경근거지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는 한일포경합자회사는 1919년 동양포경주식회사에 합병된다.
특히 <전남사진지> '대흑산도 예촌 포경근거지' 사진 해설에는 "근거지에서 (고래를) 직접 해체하여 적육, 지방육, 경근, 경수, 경유, 골분, 혈분 따위로 처리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포경선이 아닌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서 고래 해체 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부위 별로 해체된 고래는) 운송선에 실어 식용품은 시모노세키(下關)로, 비료는 효고(兵庫)로 보냈다"라고 밝혀 포획된 고래가 한반도가 아닌 시모노세키 등 일본 본토로 운송되어 유통되었고, 고래 해체물로 만든 비료는 효고(兵庫)로 보내졌음을 알 수 있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설치시기를 증빙할 수 있는 세 번째 자료는 1916년(대정 5년) 10월 23일 조선총독부 탁지부장관이 부산세관장과 전라남도장관 앞으로 보낸 공문이다. 공문은 크게 제1안과 제2안으로 작성돼 있다.
제1안은 조선총독부 탁지부장관이 부산세관장에게 보낸 것이고, 제2안은 전라남도장관 앞으로 보낸 것이다. 공문의 제목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 관한 건'으로 제목에서부터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이 공문이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조선총독부 공식문서를 통해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설치의 승인 주체, 설치시기, 설치회사, 세금계상 방법, 고래 포획 신고절차, 관리기관 등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문에는 "별도 농상공부장관으로부터 통첩처럼 그 포경근거지를 대흑산도에 설치하기로 하였다"고 적시돼 있다. 즉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설치 허가는 1916년 10월에 났고, 그 승인 주체는 조선총독부 농상공부장관이었던 것이다. <전남사진지>의 해설을 덧붙으면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는 1916년 10월에 설치허가를 받아 그해 12월에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설치 허가 내용을 담고 있는 조선총독부 공문. ⓒ 조선총독부 관련 자료
▲ 조선총독부가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 직접 파견한 직원 명단. ⓒ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록> 정리
조선총독부의 공문은 또 "다른 포경근거지의 예에 따라, 조선총독부 부산세관에서 파견해서 상주하고 있는 세관관리의 특별한 허가를 받을 것"을 명시함으로써 각처에 설치된 포경근거지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설치 허가를 받은 포경회사가 내야하는 어업세는 "파출관리가 매년 포경한 고래의 월별, 어선별 마리수를 다음해 1월 20일까지 무안군청에 알리면 이를 기준으로 계상하여 매긴다"라고 못 박고 있다. 즉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인 부산세관에서 직접 파견한 직원(파출관리)이 전라남도 무안군청과 협조하여 어업세 징취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바로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록>이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록>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부산세관 산하 대흑산도 포경근거지 및 규사장치장(硅砂藏置場)'에 1919년부터 1922년까지 4년 동안 직원을 직접 파견한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 1919년 직원을 파견했던 조선총독부는 1년 뒤인 1920년 원산세관이 관할의 '장전 포경근거지'에 관등 월 17급의 직원(奧信太郞)을 파견한다. 또 1921년엔 같은 원산세관 관할 '대유동 포경근거지'에 월 44급의 직원(織田信次郞)을 파견한다. 두 포경근거지에 대한 직원 파견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 직원을 파견했던 1922년까지 계속된다.
한반도 근해에서의 포경을 식민지 수탈 차원에서 직접 관리했던 조선총독부. 일제의 잔혹한 바다 유린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 다음기사 '일제가 흑산도에서 수탈한 것은 고래만이 아니었다'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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