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media.daum.net/v/20180105050623475


'1987' 실제인물 최환 변호사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고문 직감"

지호일 이가현 기자 입력 2018.01.05. 05:06 수정 2018.01.05. 09:27 


영화 '1987' 최 검사의 실제 인물 최환 변호사


최환 변호사가 3일 서울 서초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영화 ‘1987’의 배경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그는 고문치사 사건 은폐음모를 막았다. 윤성호 기자

최환 변호사가 3일 서울 서초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영화 ‘1987’의 배경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회고하고 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던 그는 고문치사 사건 은폐음모를 막았다. 윤성호 기자


영화에서 공안부장을 연기한 배우 하정우씨와 시사회에서 함께 한 모습.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에서 공안부장을 연기한 배우 하정우씨와 시사회에서 함께 한 모습.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관 2명이 와

박종철군 쇼크사로 사망했다며 화장할 수 있게 지휘해달라 요구, 시신보존 명령 내리고 부검 지시

검찰총장·검사장이 전화하더니 청와대·장세동까지 압력 넣어 

코너에 몰린 박처원 치안감은 ‘밤길 조심하세요’ 협박하기도


1987년 6월항쟁은 한국현대사의 진로를 바꾼 태풍이었다. 수십년간 둑에 가둬뒀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터져 나와 거리와 광장, 온 사회를 휩쓸었다. 그 둑에 금이 가도록 한 건 그해 1월 14일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당시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은 “책상을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며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단순 쇼크사로 묻힐 뻔했던 박종철의 죽음은 당시 서울지검 최환 공안부장의 의기로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검사 생활 대부분을 공안사범 수사에 쏟은 그였지만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양심으로 살벌한 외압을 버텨냈다고 한다. 시신보존 명령을 내리고 화장 대신 부검을 하도록 지휘해 진실 규명의 첫발이 내디뎌지도록 했다.


그때를 기록한 영화 ‘1987’(장준환 감독)은 포스터에 ‘그들의 선택이 세상을 바꾸다’는 카피를 달았다. 배우 하정우가 배역을 맡은 최 검사가 30년 전의 최환 부장검사다.


서울 서초구 최환법률사무소에서 3일 그를 만나 영화를 본 소회와 30년 전의 이야기를 물었다. 그는 간판도 내걸지 않은 작은 사무실에 여직원 한 명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1987년의 기억이 특별할 것 같다.


“1987년은 대단한 해였다. 1월 14일 박종철 물고문 치사 사건이 있었고, 4월 20일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일명 ‘용팔이 사건’이 벌어졌다.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 직격탄을 맞았고, 대선을 앞둔 11월 29일에는 대한항공 858기가 폭파됐다.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있을 때라 이들 사건 수사에 모두 직간접 관여했다(당시는 서울지검 산하에 서울 동·남·북·서부지청과 의정부지청이 속해 있었다). 영화는 1∼6월 박종철 이한열 열사 부분만 다뤘는데 1987년은 민주화 문제뿐 아니라 대공이나 정치 관련 수사에서도 변화가 시작된 해였다.”


-영화 1987은 보셨나.


“시사회에 오라고 해서 봤다. 그 전에는 영화를 만드는지도 몰랐다. CJ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를 받았다는데 CJ가 영화 ‘변호인’ 건도 있고 지난 정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나. 그래서 조심하면서 촬영했다고 그러더라. 영화에서 하정우씨가 압수한 양주를 갖고 다니면서 마시고 전화벨이 계속 울리니까 전화선도 뽑고 과격하게 나오던데,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다. 지금 내 얼굴이 불그스레하지 않나. 아침에 박카스를 마셔서 그렇다. 나는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사람이다. 검사 시절에도 절대 흥분해서 소리치거나, 남한테 발길질하지 않았다. 허허. 1월 14일에도 오히려 차분하게 버텼다. 그래도 영화적 설정이라 이해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때의 상황을 다시 설명해 달라.


“1월 14일 저녁 7시40분쯤이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관 2명이 찾아와 보고서를 내밀면서 ‘수사하던 중에 학생 한 명이 죽었다. 경찰병원 의사가 쇼크사가 틀림없다고 한다. 유족들하고도 합의가 됐으니, 오늘밤 안에 화장하도록 지휘해 달라’고 했다.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딱 보는 순간 ‘이건 고문이다’는 직감이 왔다. 내일 아침에 정식 변사 사건으로 처리할 테니 발생보고서 써서 보내라 했다. 수사관들이 ‘부장님이 (서명) 해주실 거라 믿었는데 안 해주면 어떡하느냐’고 하더라. 그런데 어느 부모가 어렵게 서울대에 들어간 아들이 죽었다는데 시신도 안보고 화장에 쉽게 동의하겠나. 결국 이튿날 관할인 용산경찰서장이 변사사건 보고서를 들고 왔다. 그때는 서장이 계급은 높을지 몰라도 특공대인 남영동(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사무실·조사실이 있던 건물)의 힘이 더 셌다.”


-그때 상부나 외부의 압력이 상당했을 거 같은데.


“오후 7시40분에 (검찰청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10시가 되도록 나오지 않으니 ‘부장검사 선에서 막혀있구나’하고 안 거지. 검찰총장, 검사장한테서 전화가 오고 청와대, 장세동(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도 전화를 걸어왔다. ‘각하의 관심 사안입니다’라고 말하더라. 영화에서는 박처원 치안감(김윤석 분)이 날뛰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나와 가장 많이 얘기한 건 강민창 치안본부장이었다. 그 사람이 ‘우리 애들이 실수를 좀 했는데 봐 달라’고 하더라. 해방 이후 쭉 공산당 관련자들 잡아들이는 일을 한 박 치안감은 영화처럼 성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도 나중에는 나한테 ‘재미없을 겁니다. 밤길 조심하세요’라고 했다. 공안부장이면 100%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배신했다고 생각한 거지. 그날은 동생 집에서 잤다. 집으로 밤새 전화가 왔다고 아내가 말하더라.”


-공안부장인데 끝내 협조를 거부한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자유를 지켜줘야 하는 국가가 국민 생명을 빼앗으면 되겠나. 박군은 아무런 잘못도 한 게 없고, 대학 1년 선배를 재워준 정도 아닌가. 그 전에도 김근태 고문사건(85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86년)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누가 고문당했다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올 때였다. 스물한 살 대학생을 죽여 놓고 감추려는 걸 보고 ‘고문은 반드시 없애야겠다’고 확 마음을 먹었다.”


-공안사범 수사를 주로 했었는데.


“386세대와는 공안부 조사실에서 맨날 만났다. 학생들이 데모하다 잡혀오면 ‘나도 억세게 데모 많이 했다. 아스팔트 드러눕는다고 될 일이 아니고, 사회 지도자가 돼 고칠 건 고치면서 나라를 끌고 나가라’고 얘기해 줬다. 나도 64년 6·3사태 세대다. 이부영 김정남씨가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이고, 김덕룡 전 의원은 문리대 동기다. 영화에는 이부영이 김정남에게 고문치사 은폐·축소 내용이 담긴 비둘기(옥중 비밀서신)를 전하는 걸로 나오는데, 사실 그 중간에 김덕룡을 더 거쳐서 간다. 은둔주의자인 김정남은 보기 힘들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동기 모임에서 가끔 보면서 지낸다.”


-서울지검장으로 있을 때는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구속했는데.


“대전지검 검사로 있던 80년 8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내무분과위원으로 잠시 파견을 갔었다. 안 가겠다고 버티니까 보안부대 조사관이 찾아와 ‘안 가면 연행을 하겠다’고 하더라. 가서 보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이른바 ‘체육관선거’로 대통령에 오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전 위원장이 자주 입에 올린 말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거였다. 나중에 수천억원 뇌물 수수 혐의로 수사 받는 그에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든다고 하시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답변은 듣지 못했다.”


-87년의 광장과 2017년의 광장을 보고 어떤 소회가 들었는지.


“작년에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모두 나가 봤다. 87년과 2017년 모두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원인이었다. 둘 다 성공했다. 87년에는 개헌과 민주화를, 2017년은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다. 시민들과 학생들이 움직인 결과였다. 하지만 거기에 편승하려는 세력은 견제해야 한다.”


▒ 누구인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막는 데 큰 역할


최환(75) 변호사는 충북 영동 출신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 제6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서울지검 차장, 대검 공안부장,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지검장, 대전고검장, 부산고검장을 지냈다. 1987년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재직할 때 시신보존 명령을 내리고 부검을 지시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되지 않도록 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직폭력배들이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한 ‘용팔이 사건’을 6년간 장기 수사한 끝에 93년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을 구속했다. 서울지검장이던 95년에는 5·18특수본부장을 맡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내란 및 뇌물수수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99년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 현재 최환법률사무소 변호사로 있다.


지호일 이가현 기자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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