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0033


며느리 배 위에 나무판 깔고 올라탄 경찰관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제주 4.3 여성들이 겪었던 기막힌 사연들

18.04.02 22:49 l 최종 업데이트 18.04.02 22:49 l 김종성(qqqkim2000)


제주 4·3은 항쟁인 동시에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미군정이 38도선 이남을 지배할 당시 벌어진 이 사건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인권탄압 및 분단정책에 맞선 투쟁인 동시에, 그 투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을 미군과 토벌대가 무참히 학살한 범죄였다.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4·3 희생자는 1만 4천 명 정도이지만, 실제는 3만 정도라는 게 정설이다. 1948년 제주 인구가 25만 이상이었으니, 10% 남짓 희생된 셈이다. 


3·1운동에 참여한 한국인 숫자는 일본 경찰 통계에 따르면 100만 정도이지만, 한국 학계에 따르면 최고 200만이다. 200만으로 본다면, 인구의 10%가 참여한 셈이다. 한 가정 식구를 4~5명으로 본다면, 두 집 건너 한 집, 아니면 세 집 건너 한 집에는 시위 참여자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대규모로 참여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가슴에 3·1운동이 강렬히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때의 '한'이 잊혀지지 않고 깊이 새겨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해, 4·3 때는 제주 인구의 10% 이상이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희생'을 당했다. 두 집 건너 한 집, 아니면 세 집 건너 한 집에 희생자가 있었던 셈이다. 이것만 봐도 4·3의 '한'이 얼마나 심대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한'이 특히 여성들의 가슴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살상뿐 아니라 성폭행까지 당한 이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피해자들 중에는 보복이나 불이익이 두려워 쉬쉬 하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살상에 가담한 토벌대 대원과 결혼하는 이들도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4·3 이후에 제주에서 냉랭한 부부들이 특히 많았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이 자행된 때부터 50주년이 지난 1998년 8월 21~24일, 제주4·3연구소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제주 4·3 제50주년 기념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였다. 이때 발표된 오금숙의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인권 피해 사례'를 보면,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나 하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너무 기막힌 사례가 많다.  


4.3때 벌어졌던 잊지 못할 기억들 


발표문에 소개된 피해자 고난향은 당시 마흔두 살로 제주시 오라동에 거주했다. 남편은 일본에 있었고, 집에는 아들 부부가 있었다. 1948년 6월 9일, 토벌대가 동네에 진입했다. 그들은 주민들을 한 군데 모아놓고, 고난향에게 주먹질을 했다. "네 남편 폭도지? 어디 갔어?" 일본에 있다고 대답해도, 믿지 않았다. 주먹질이 끝이 없었다.  


잠시 뒤 경찰은 며느리를 찾아냈다. 주민들이 다 보는 데서 며느리를 의자 위에 눕혔다. 며느리의 배 위에 나무 판자를 깔았다. 그러더니 경찰관 둘이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런 자세로 며느리를 고문했다. 경찰은 고난향에게도 함께 올라타라고 시켰다. 거부하자, 뺨을 때리며 모욕을 퍼부었다. 


이런 식의 폭행이 다른 주민들한테도 가해졌다. 이 동네에 60세 정도 된 남성이 있었다. 남성의 친척인 60대 중반 여성도 한 동네에 있었다. 경찰은 친척지간인 두 사람을 끌어냈다. 남성에게 엎드리라고 말했다. 여성에게는 그 위에 올라타라고 시켰다. 


그런 다음, 여성의 손에 마늘 뿌리를 쥐어 주었다. 그걸로 친척의 엉덩이를 치라고 시켰다. 주민들이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다들 똑바로 보라"고 고함을 쳤다. 주민들은 똑똑히 지켜봐야 했다. 


▲  4·3 당시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들. 여성들의 모습도 보인다. ⓒ 퍼블릭 도메인


제주 시내에 홍경토라는 남자 교사가 있었다. 무장투쟁과 무관한 데도 서북청년단에 붙들렸다. 그는 어느 공장 창고에 갇혔다. 술에 들어가는 주정을 제조하는 곳이었다. 홍경토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갇혔다. 


육지 출신인 청년단원들은 거기서 민간인들을 구타했다. 또 여성과 남성을 끌어낸 뒤, 다들 보는 데서 두 사람을 구타했다. 그러고는 수치스러운 행동까지 시켰다. 그러다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알몸 여성의 몸을 괴롭혔다.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이었다. 홍경토는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화 같은 장면이 홍경토한테 벌어졌다. 함께 갇힌 피해자들한테는 죄스러운 일이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가 풀려난 것이다. 나중에 이유를 듣고 그는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약혼한 사이인 정아무개 교사가 홍경토를 살리는 조건으로 청년단원의 결혼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 교사 역시 무장투쟁과 무관했지만, 서북청년단에 체포돼 결혼 요구를 받았다. 상황을 피할 수 없었던 정 교사는 약혼자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강제 결혼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홍경토가 극적으로 풀려난 것이다. 


"(정 교사가)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라고 홍경토는 토로했다. 이런 식의 결혼이 많았던 탓에, 그 후 한동안 제주에는 동반 외출을 하지 않는 부부가 많았다고 한다. 


▲  4·3 유해 발굴 현장. ⓒ 제주 4·3 아카이브(공익법인)


위 발표문에 이름이 공개되지 않는 어느 여성이 나온다. 남편 이름이 송군옥인 여성이다. 그는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토벌대에 의해 남편을 잃었다. 토벌대는 시신 수습을 막았다. 그래서 부인은 속만 끓였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몇 달 뒤, 토벌대가 갑자기 시신 수습을 허용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부인은 영원히 시력을 잃고 말았다. 


시신 수습이 허락되자 부인은 폭포로 달려갔다. 수많은 시신이 거기 있었다. 사망한 지 몇 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거의 다 부패된 상태였다. 누가 누군지 확인 불능이었다. 부인은 가슴이 막막했다. 눈물이 펑펑 흘러나왔다. 


그는 남편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수많은 시신을 일일이 확인했다. 맨손으로 만지며 그렇게 했다. 그러다가 눈물이 나면 손으로 눈을 닦았다. 그 때 그 일로 인해서 시력을 잃고 말았다. 그 뒤 그는 40년 이상 더 살았다. 1990년대까지 살았다. 다행히 아들이 있고 손녀가 있었다. 손녀가 지팡이 역할을 해주었다. 


제주에서 무장투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주체는 1차적으로 미국과 미군정이고 2차적으로 이승만 정권이다. 제주도 사람들의 10% 이상이 희생을 당하고 그 원한이 아직 씻겨지지 않았지만, 우리 한국은 미국과 미군을 상대로 제대로 분노를 표출하지 못했다. 분노의 대상은 미국이어야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한미관계를 올바로 세우는 길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말처럼 한국이 미국 물건을 더 많이 사주는 게 아니다. 4·3을 포함한 과거의 죄악에 대해 미국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정당한 배상을 하며 잘못된 것들을 하나하나 바로잡는 것이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