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47012.html?_fr=mt2
신라인은 왜 스스로를 ‘흉노의 후예’라 불렀을까
등록 :2020-05-29 06:00 수정 :2020-05-29 08:20
[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23) 신라와 북방 유라시아의 관계
신라 문무왕 비문 등에 중국 서북지역에서 살던 흉노의 후손이라 적시
당시 유라시아 최대 군사강국 흉노와의 관련성 강조하고 국력을 키워
중국 서북지역 마자위안에서 출토된 황금무덤. 강인욱 제공
우리 고대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신라와 흉노의 관계이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했지만 삼국 가운데 북방과 서역의 유물·유적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의 기록에도 신라 이전 진한 시절부터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서 중국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은 최근 고고학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정작 신라인들이 북방지역과의 관계를 과시한 것은 그로부터 400~500년이 지난 후였다. 마립간 시대가 되어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북방계의 유물과 적석목곽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신라가 통일할 무렵 신라인들은 묘비명에 자신들이 중국 서북지역에서 살던 흉노의 후예라고 당당히 적어놓았다.
신라인들이 말하는 흉노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미개한 유목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흉노는 유라시아를 호령하는 강력한 무기와 군사의 유목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래서 흑해 연안에서 신라까지 수많은 나라가 자신을 흉노로 자처했다. 고구려, 백제, 부여와 같은 부여계의 나라와 맞서서 뒤늦게 경쟁을 시작한 신라는 건국 시기부터 이어져오던 북방 초원과의 관련성을 선민의식으로 내세웠다. 신라의 1천년 역사에서 흉노는 자랑이었고, 또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성장한 신라를 강성하게 했던 유라시아 네트워크의 상징이기도 했다.
문무왕릉비. 노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에 있는 ‘진백’은 진시황의 22대 선조 진목공을 뜻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300년 전 신라로 도망친 유목민들
한국 고대사를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히는 중국의 역사가 진수(서기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원나라 때 지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다름)에는 신라의 전신인 삼한 중 ‘진한’(辰韓)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진한 사람들 중에는 진나라의 만리장성을 쌓는 노동을 피해서 도망친 무리가 있다.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시황이 살았던 시절은 기원전 3세기 중반이니 지금부터 2300년 전이다. 당시 신라에서 중국 북방의 초원지역과 연결을 찾는 것은 쉽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뜬금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삼국지>의 저자는 막연하게 주워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듯 세밀하게 그들을 기록했다. 이 진한으로 온 사람들은 중국 북방에서도 특히 진(秦)나라 사람과 가까우며 실제로 사용하는 말도 경주 일대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여 사람들이 쓰던 말까지 자세하게 적어놓을 정도였다.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던 이 기록은 최근 고고학 자료로 새롭게 증명되었다. 2010년 경주 탑동에서 변한 시대의 나무관무덤이 발굴되었다. 집을 개축하다가 나온 작은 유적이라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초원 유목민들이 애용하는 동물 장식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중국 북방지역, 특히 진(秦)나라의 변경에서 살던 서융(西戎)이라는 사람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그뿐 아니라 진한에서는 마한이나 변한과 달리 유독 북방 초원계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진수의 삼국지가 기록한 말이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놀라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011년에는 바다 건너 일본 오사카와 가까운 비와호 근처에서 청동칼의 거푸집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 동검은 일본에서는 처음 발견된 형태로 일본에서 흔히 발견되는 세형동검이 아니었다. 바로 2300~2400년 전에 중국 만리장성 근처의 유목민들이 쓰는 초원식 동검의 거푸집이다. 동검도 아니고 동검을 만드는 거푸집은 누구에게 선물할 리는 없으니, 중국 북방의 사람들이 건너간 증거가 분명하다.
머나먼 한반도 남쪽까지 유목민의 일파가 내려온 것은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전국시대 말기에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리고 진나라는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쌓으면서 중국 북방의 초원 유목민족을 압박했고, 그 결과 일부는 중국에 동화되고 또 일부는 사방으로 흩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유라시아를 뒤흔든 거대한 세력의 변동이 한반도와 멀리 일본까지 확산된 것이다.
흉노의 영향을 받은 흑해 연안의 금관. 호흘라치 고분 출토. 강인욱 제공
빨래판에서 발견된 문무왕의 비석
신라의 역사에서 북방 초원과의 관계가 다시 등장한 때는 마립간 시기인 서기 4세기였다. 이때부터 신라는 김씨가 단독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김씨 왕족들은 다른 귀족들과 구분되게 북방 유라시아의 무덤을 모방한 거대한 돌무지무덤과 금관, 황금보검, 유리그릇 등 다양한 북방계 유물을 들여왔다.
신라가 이후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하고 국력을 키우면서 거대한 무덤과 금관은 사라졌다. 그 대신에 묘비명에 자신들은 흉노의 후예라고 대내외에 과시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서기 626~681)은 유언으로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시간과 용력을 들이지 말고 동해의 대왕암에 화장을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삼국을 통일하는 혼란기에 자신의 무덤 때문에 국력이 소모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의 묘비만 경주 어딘가에 세웠다. 학자들은 대체로 사천왕사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천왕사가 폐사되면서 문무왕 비석도 사라졌다. 문무왕의 비석은 1796년에 발견되어서 청나라 학자가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이 망하는 와중에 또다시 사라졌다. 다행히 1961년에 그 일부가 경주 동부동의 민가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라진 비석의 나머지 일부분도 2009년에 동부동의 다른 집 마당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비석의 표면이 반질반질해 빨래판으로 쓰인 것 아니냐는 추정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표면의 글자들은 잘 남아 있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삼국사기>에는 없는 그의 출자(出自)에 대한 비밀이 적혀 있었다. 이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조를 중국 서북지방에서 살다가 중국으로 귀의한 흉노인인 소호금천(少昊金天)씨와 김일제(金日磾)라고 했다. 자신들을 흉노의 후예로 자처한 사람은 문무왕만이 아니었다. 신라를 대표하는 학자 김대문이나 당나라로 이주한 신라의 김씨 성을 한 부인의 묘비에도 똑같이 자신들을 흉노의 일파라고 적은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통일신라 내내 이어졌다. 아마 당시 신라의 왕족 김씨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흉노의 후손으로 보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문무왕릉비에는 신라인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기원을 더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글자도 있다. 그의 비에는 진백(秦伯)이라는 사람도 나온다. 이 이름은 ‘진목공’(秦穆公)을 의미하는데 그는 진시황의 22대 선조로 중국 서부에서 유목민들을 평정하고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중국 서북지역은 중앙아시아의 황금문화와 쿠르간이 중국 북방을 통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진나라는 바로 유라시아 유목문화의 발달된 황금과 기마술을 받아들여 나라를 발전시켰다. 문무왕이 진목공을 선조로 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흉노라는 국가를 선조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조상으로 주로 언급되는 김일제라는 사람도 흉노 중에서도 예전 진나라의 영역이었던 중국의 서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신라는 막연하게 초원의 유목민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서북지역에서 살면서 유목문화를 받아들여 국력을 강성케 한 진나라와 그 안에서 활동하던 흉노 계통의 사람들한테서 신라의 모습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경주 탑동 동물 장식. 강인욱 제공
진나라 변두리의 유목민이 남긴 동물 장식 허리띠. 칭수이 류핑 유적. 강인욱 제공
신라의 삼국통일과 흉노
신라인들은 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흉노로 자처했을까. 그 배경에는 신라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가 숨어 있다. 삼국시대 신라를 둘러싼 백제, 고구려 그리고 북방의 부여와 북부여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세 나라의 왕족들은 모두 부여계였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부여에서 갈려 나와 나라를 건국했다. 백제도 비류와 온조의 시절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모두 부여씨였다.
신라도 국력을 강화하면서 다른 부여계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선민의식이 필요했다. 이에 진한 시기부터 이어져왔던 북방과의 교류를 전면에 내세우며 부여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런 신라의 선택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은 흉노의 영향을 받은 유목민들이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중국의 북방도 위진남북조시대가 되어 북방의 이민족들이 발흥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특히 모용선비라는 집단은 강력한 기마술과 무기로 동북아와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신라가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것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었던 북방지역과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들의 선진적인 무기와 기술을 받아들여 다른 삼국과 맞서겠다는 속뜻이 숨어 있다.
신라가 북방의 유적과 유물을 남기고 흉노임을 내세웠다고 해서 21세기의 관점으로 비하하거나 간과할 필요는 없다. 흉노 같은 초원의 유목문화는 너무 멀어서 설마 관계가 있을까 의심하는 좁은 시야도 버려야 한다. 지금과 달리 당시 흉노는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전역에서 일종의 롤모델 같은 강국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유는 그들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흉노와의 관련을 강조하고 국력을 키운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후발주자로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는 강력한 자신만의 왕권을 구축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빠르게 키울 수 있었다. 몇몇의 증거를 혈통적인 흐름으로 해석하고 현대의 편견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신라의 입장과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작금 큰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에도 교훈을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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