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2533
“이승만 정부 동아일보, 반민특위 실패에 중요 역할”
채백 부산대 교수, 반민특위 보도 분석한 논문서 “친일기 행적 때문에 청산에 소극적” … “조선일보,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 대변” 지적도
김도연 기자 riverskim@mediatoday.co.kr 2018년 05월 03일 목요일
한국사회가 친일 청산에 실패했던 직접적 계기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후 출범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승만 정부와 친일 세력들은 반민특위 핵심 인사들을 흠집 내고 흔들었으며 이승만 지시에 따라 경찰은 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경대장(특위 수사를 보조하기 위해 설치된 조직의 장) 등 관계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했다. 1949년 김구가 암살되고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공소 시효를 단축하는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당시 김상덕 위원장을 포함한 특위 위원들과 특별검찰관들도 줄줄이 옷을 벗었다.
지난 4월 한국언론정보학보에 게재된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논문 ‘반민특위에 대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를 보면 조선·동아일보가 반민특위 활동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분석 결과 조선일보가 반민특위에 대해 더 적극·긍정적으로 보도했으며 동아일보는 정부의 반민특위 반대 입장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했다.
채 교수는 보도 태도 차이에 대해 “두 신문이 갖는 정치적 입장, 즉 동아일보는 친일 세력 중심의 한민당을, 조선일보는 당시 친일 청산에 가장 적극적이던 김구 중심의 임시 정부 세력을 지지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2010년 7월19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박사 45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후 고개숙여 묵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반민특위에 적극적이었던 조선
조선일보는 정부 수립 직후부터 반민법과 반민특위를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1948년 8월18일자 사설에서 “반민족 행위자의 법률상 처단, 행정적 조치 여하는 국권 회복의 목적이요 내용이요 또 수단의 대부분이 될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전제한 뒤 “국가 민족을 해한 적의 주구배를 숙청할 것은 국가적 역사적 기강의 확립을 뜻하는 건국의 기본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신문은 “정부의 역량 여하는 곳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의 추진 여하에서 국민의 역사적 판정을 구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국회의 국민적 신임도 여기서 경중이 나타날 것”이라고 밝혔다. 반민법 시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미군정 기간 동안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못하고 미군정 방임 속에 친일파가 각 부문에서 활개치는 현실을 지적하며 “오늘의 이 문란된 건국의 강기를 바로잡지 않고야 무슨 일이 되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8월20일자 사설에선 “각급 정부에서 반민족 행위자를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고 사회 각 부문에서 친일 세력이 활동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흑수는 재계 실업계로, 정계로 또 언론계에까지 부단이 암약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언론계 내 친일 세력의 부상을 지적한 것이다.
채 교수는 반민특위 초기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에 비해 소극적인 보도로 일관했다고 평가했다. 정부 수립과 함께 반민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돼 국회 논의가 활발했지만 동아일보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한 사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반민특위가 본격 활동을 개시한 1949년 1월13일에서야 사설을 통해 “동족이 서로 피투성이가 되어 쥐어뜻고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며 설사 민족 강기를 숙청하기에 불가피한 일이라면 그와 같은 정신적 영향이 우리 자손에까지 미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항상 보복과 반목은 악순환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민법 운영에는 특히 신중을 기하여야겠다”고 주장했다. 반민법 시행에 공감하면서도 ‘신중한 운영’을 강조한 것이다.
▲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 부역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사진은 연행되고 있는 김연수와 최린.
동아일보는 1949년 2월3일자 사설에서도 반민특위를 언급하면서 “정부와 국회와의 대립을 완화하고 정쟁을 지양하는 것 역시 집정이란 형식에서 입법권이 어느 정도 행정권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할 터인즉 그럴랴면 무엇보다도 우선 국회 자체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위신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양비적 입장’을 취했다.
동아일보는 1949년 2월15일자에서 국회의원으로서 반민특위의 조사위원을 맡고 있던 김준연의 칼럼(“반민법의 개정을 주장함”)을 게재하기도 했다. 김준연은 칼럼을 통해 “전력을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를 육성하고 우리 국토를 통일하고 우리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도(圖·‘그리다’는 뜻)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는데 그러자면 공산주의적 파괴 세력과 싸우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됐다”면서 반민법 제5조로 ‘군과 경찰의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민법 제5조는 일본 치하에서 관리나 헌병, 고등 경찰직 등에 있던 자들이 공무원으로 임명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인데 이 조항을 적용하면 군·경이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친일 청산 반대론자들 논리와 다르지 않았다.
후폭풍 몰고온 동아일보 기고
이승만은 1949년 2월15일 담화에서 반민법 위헌성을 지적하며 개정을 주장했고 반민특위 관할의 특경대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이틀 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확실히 대통령은 불필요한 파문을 던젓다”고 이승만을 비판하면서도 “반민자 처단만을 능사로 아는 인기 정치가들에게 정치와 대립할 정쟁의 구실을 주었”다며 반민특위에 대한 불편한 입장을 내비쳤다.
대통령 담화 후 정부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동아일보는 2월19일자에서 대통령의 기자단 회견 내용을 1면 부톱으로 보도하면서 반민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이승만 입장을 그대로 전달했다. 2월23일자 1면 좌측 하단에 실린 ‘국회’ 코너에서는 법안 개정의 주요 내용과 국회의 논의 상황을 보도하면서 “말성 많은 반민법/정부 제출의 개정안 토의”라고 반민법 문제를 부각시키는 제목을 달았다.
▲ 반민특위가 공중분해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49년 5월9일자 동아일보 1면 기고였다. 국회의원 김준연은 5·10 총선거로 제헌국회가 구성된 1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단상의 1년 회고”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5·10선거 부인의 일파가 계속하여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면서 이들이 “남로당의 선전 방침에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사진=네이버 화면 캡처
반민특위가 공중분해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49년 5월9일자 동아일보 1면 기고였다. 국회의원 김준연은 5·10 총선거로 제헌국회가 구성된 1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단상의 1년 회고”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5·10선거 부인의 일파가 계속하여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면서 이들이 “남로당의 선전 방침에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이 추종하는 남로당의 선전 방침을 5가지로 소개했는데 그 세 번째가 “반민처단을 적극 지지 격려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검찰은 이 칼럼이 게재된 지 9일 후인 5월18일 친일파 숙청과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던 이문원 등 세 의원을 체포했다. 이는 ‘국회 프락치 사건’의 서막으로,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토대로 반공 정국을 확산시켰고 반민특위를 와해하기 위해 1949년 6월 총공세를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6월21일자부터 27일까지 4회에 걸쳐 경북 영일의 최태능이라는 사람이 쓴 “3의원 체포 사건”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해 김준연을 일방적 옹호했다.
반면 조선일보는 이승만이 1949년 2월15일 반민특위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자 이튿날 “반민자 처단에 암운 저미(低迷)!/조사원의 행동을 금지/대통령 반민법 일부 개정을 언명”이라는 제목을 달아 비판적 태도를 강하게 표명했다. 2월18일자 2면 톱기사 제목은 “「반민법과 대통령담」 에 끌른 국회/「독재적이다」에 「올소」 연발”이라는 제목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국회 분위기를 전했다. 또 부톱 위치부터 지면 좌측을 전부 할애해 “반민법을 곡해했다/특위·대통령담화 바박”이라는 3단의 제목으로 반민특위가 발표한 장문의 공식 반박 성명을 그대로 전재했다. 이 기사는 중간 부분에 “대통령 자신 헌법 무시/반민 처단을 계속할 일”이라고 제목을 넣고 이승만에 대한 비판 논조를 드러냈다.
개정안이 2월24일 국회에서 부결되자 조선일보는 이튿날 “파란을 이르켜오든 반민법수정안은 드듸어 어제 국회서 폐기 헌종이로 화하였다. 바야흐로 민족정기의 승리”라며 격앙된 논조로 소식을 전했다. 1949년 6월6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공격하자 조선일보는 관련 소식을 다음 날 2면에서 전했고 7월6일 반민법의 공소 기간을 단축하는 개정안이 통과되자 7월9일자 사설에서 “현 상태를 이대로 두고 공소 기간만을 단축한다는 것은 결국 반민법 실시를 중지하는 것과 동일”하다며 남은 기간에라도 주요 처단 대상들을 공소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성수 선생(왼쪽)과 이승만 전 대통령.
“김성수, 일제기 우익 세력 중심”
채 교수는 “조선일보가 반민특위 보도에 더 적극적으로 임했다”며 “기사 양이나 배치, 사설 건수 등을 통해서도 확인되며 두 신문의 차이는 기사 위치나 단수, 정보원, 태도 등의 차원에서도 유의적인 것으로 분석됐다. 즉 조선일보가 기사 건수나 양도 더 많았으며 단수나 위치에서 드러나는 중요도도 더 높았다”고 밝혔다. 채 교수 분석에 따르면 정보원과 관련해서도 조선일보는 국회와 특위 중심으로 보도했고 동아일보는 정부 입장에 더 적극적이었다.
채 교수는 미군정기 친일 청산 문제에 있어서 두 신문이 모두 소극적이었지만, 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두 신문이 차별성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채 교수는 “동아일보가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던 것은 그 소유자의 정치적 배경과 신문의 정치적 지향으로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다”며 “동아일보의 소유권자인 김성수 세력이 일제기 우익 세력의 중심이었으며 해방 후에도 한민당 입장을 계속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제기의 친일 청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민당은 자유당 정권 출범 과정에서 소외되며 야당으로 돌아섰지만 친일 청산 문제에선 이승만 정부와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채 교수는 조선일보에 대해서 “미 군정기에 조선일보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 입장을 대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당시 국면에서 김구의 임정 세력이 친일 청산 문제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의 대변지 역할을 하던 조선일보 보도 태도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채 교수는 1949년 5월9일자 ‘김준연 칼럼’에 대해 “당시 이 칼럼은 검찰에서도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내용이었는데 이를 동아일보가 앞서서 터뜨린 것”이라며 “이 칼럼이 어떻게 가능했고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의혹으로만 남아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칼럼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이 벌어져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이것이 반민특위 해산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동아일보는 반민특위 실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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