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847163.html?_fr=mt2
바다가 삼킨 해방의 환희…일본 섬에 잠든 조선인 131명 유골
등록 :2018-05-31 18:02 수정 :2018-06-01 11:17
해방 뒤 귀국선 탔다가 태풍 만나 숨져
백골이 되어 일본 내 사찰 전전하다가 사찰 보관 거부로 창고행→합장될 뻔
이키섬 작은 절이 “맡겠다” 밝혀 주검들 발견지 중 한곳인 현해탄 섬에
고국엔 못오지만 고향 더 가까운 곳으로 법요식 거행 “언젠가 고국 돌아가길…”
31일 일본 나가사키현 이키섬 덴토쿠지에서 조선인 희생자 131명의 넋을 위로하는 법요식이 열리고 있다.
“원래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고향에 돌아가 못하면 일단은 주검이 표류한 이곳에 모시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31일 일본의 최서단 나가사키현 이키섬에 있는 작은 절 덴토쿠지에서 1945년 해방 직후 고향으로 향하는 배가 침몰해 허무하게 숨진 조선인 유골 131위를 모시는 법요식이 열렸다. 조동종(불교 종파) 종의회 의원 이케다 다이치는 ‘대한민국 (이키섬) 아시베항 조난자 유골 안치 법요식’ 인사말에서 “조선인 유골들이 고국에 언젠가는 돌아가기를 빈다”고 말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창고에서 조선인 유골 131위를 하얀색 상자 39개에 나눠 담아 이날 섬으로 옮겨왔다. 이키섬은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쓰시마보다 더 일본 쪽에 치우쳐 있는 대한해협의 섬이다.
1945년 8월15일 해방 뒤 일본에 살던 조선인 140만명이 한반도로 귀환했다. 배가 출발하는 후쿠오카 하카타항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항으로 하루 1만~2만명씩 몰려들었다. 귀국용 배편은 턱없이 부족했다. 적잖은 조선인들이 고향으로 가기 위해 업자에게 돈을 주고 허름한 ‘야미선’에 올랐다.
작은 목선에 빼곡히 탑승한 채 고향으로 향하던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태풍었다. 1945년 9월17~18일 ‘미쿠라자카’, 10월11일 ‘아쿠테’라는 큰 태풍이 규슈 지방을 덮쳤다. 난파한 배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주검은 조류를 타고 이키섬과 쓰시마 해안으로 떠밀려왔다. 지역민들이 해안가에 방치된 주검 일부를 수습해 매장했다. 30여년이 흐르는 동안 주검들의 존재는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31일 일본 나가사키현 이키섬 덴토쿠지에서 행사 참가자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옮기고 있다.
이키섬 등에 방치돼 있던 조선인 주검의 존재가 주목 받게 된 것은 후카가와 무네토시라는 일본인 때문이다. 히로시마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무관리를 했던 후카가와는 히로시마역에서 배웅한 조선인 노동자 264명 전원이 귀국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행방을 추적해왔다. 후카가와는 이키섬에 매장된 조선인 주검이 히로시마 미쓰비시중공업 강제징용 피해자들이라고 보고 1976년 매장지를 파헤쳤다. 후카가와의 예상과 달리 유골에선 회사 배지 등 미쓰비시중공업과 연관성을 보이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아이를 꼭 껴안은 엄마의 주검 등을 찾을 수 있었다. 이어 일본 정부는 1983년 자체적으로 쓰시마에서 조선인 조난자들 유골을 발굴했다. 일본 정부가 스스로 조선인 유골 발굴에 나선 매우 희귀한 사례였다.
이날 다시 이키섬으로 돌아온 유골은 이때 발굴된 이키섬 유골 86위, 쓰시마 유골 45위다. 이 유골들은 그동안 일본 사찰 네 곳을 돌고 돌다가 2003년 곤조인에 안치됐다. 최근 곤조인이 더 이상 보관이 어렵다고 하자, 이키섬의 사찰 덴토쿠지가 보관을 자청해 이키 귀환이 현실화됐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애초 유골들을 후생노동성 창고로 옮긴 뒤 도쿄의 전몰자 묘역인 지도리가후치에 합장하려 했다. 그러나 덴토쿠지가 나서자 유골을 한반도에서 가까운 이 절에 모시는 데 동의했다. 니시타니 도쿠도 덴토쿠지 주지는 <한겨레>에 “하루라도 빨리 유골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조처해주기를 한국과 일본 정부에 촉구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이키섬과 쓰시마에는 적잖은 조선인 유골이 발굴조차 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키니치니치신문>을 운영하며 오랫동안 이 문제를 추적해온 다네다 히라쿠는 “1976년 발굴지 근처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볼 때 조선인 주검 76구가 매장된 곳이 한 곳 더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네다가 지목한 매장 추정지 근처에는 현재 ‘대한민국인 위령비’가 서 있다. 한국 정부가 직접 모셔온 유골은 도쿄 유텐지에 보관돼 있던 조선인 군인·군속의 유골 423위밖에 없다.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덴토쿠지는 고향을 눈앞에 두고 숨진 조선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20여년간 위령제를 지내왔다. 1976년 이키섬 매장 조선인 유골 발굴에 참여한 마사키 미네오는 “한국과 일본 정부는 오랜 세월 ‘지금은 곤란하다’는 말을 해왔다. 이 유골들의 최종 목적지는 덴토쿠지가 아닌 그들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이키섬(나가사키현)/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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