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6498


73년 전 백범의 계단에 선 4인, 문재인 대통령처럼 가슴이 멨다

[How are you 임정 ⑥] 우리가 임정투어 로드다큐와 가이드북을 만드는 이유

18.07.23 07:59 l 최종 업데이트 18.07.23 08:10 l 김종훈(moviekjh) 정교진(koreacamera) 김혜주(hyeju728) 최한솔(hahasos0)


▲ 김구 선생과 문재인 대통령, 충칭의 그 계단에 서서 1945년 11월 3일, 충칭 연화지 청사 계단에 선 김구 선생. 2017년 12월 16일, 같은 계단에 선 문재인 대통령. 두 사람 표정이 모두 어둡다. ⓒ 연합뉴스/독립기념관


그제야 알았습니다. 1945년 11월 3일, 그 계단에 선 백범 김구 선생의 표정이 왜 그리도 어두웠는지.


그제야 알았습니다. 2017년 12월 16일, 그 계단에 선 문재인 대통령이 왜 입술을 굳게 다물었는지.


절절한 아쉬움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두 장의 사진으로 전해진 겁니다. 그 계단에 서보니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 김구 선생 침대 만져보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2월 16일 중국 충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해 김구 선생이 사용하던 침대를 만져보고 있다. ⓒ 연합뉴스

▲ 충칭 임시정부 청사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방명록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 충칭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청사를 방문해 작성한 방명록.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우리의 정신입니다"라고 적었다.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 우리나라 대통령 중 처음으로 중국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습니다. 김구 선생의 흉상 앞에서 김정숙 여사와 함께 묵념했고, 김구 선생이 사용하던 침구도 직접 만졌습니다. 그리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우리의 정신입니다"라고 방명록에 적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시작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을 선언한 겁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 대한민국 정부의 요인들, 항일 애국지사 후손들은 함께 충칭 임시정부 청사의 계단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1945년 11월, 환국 기념으로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계단에 서서 찍은 그 모습 그대로 포즈를 취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걸음을 옮기며 "가슴이 멘다"고 밝혔습니다.


▲ 국내 진입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도노번 장군을 만난 김구 선생 1945년 8월, 김구 선생은 중국 서안에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과 함께 미국측 도노반 소장을 만나 광복군의 한반도 투입 문제를 논의했다. ⓒ wiki commons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45년 11월입니다. 김구 선생을 비롯해 십여 명의 요인들만 1진으로 귀국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의 주석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습니다. 미국 측에서 '서울에는 미 군정부가 있으니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72년 전, 충칭 청사 계단에서 찍은 사진 속 김구 선생의 표정이 밝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사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을 충칭이 아닌 시안(이하 서안)에서 들었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은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을 최종 검토하기 위한 회담을 미국 측과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왜적의 항복' 소식이 전해진 겁니다.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백범일지에 온전히 남겼습니다.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내게 이 말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노력한 참전 준비가 모두 헛일이 되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던 우리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투시킨 후 조직적으로 공작하게 하려고 미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했는데, 한 번도 실행해 보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됐다." 김구 <백범일지>


▲ 함께 선 김구 선생과 김원봉 장군 1941년 3월 1일, 3.1절 22주년 기념식.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 신익희 선생, 김원봉 장군이 함께 선 사진이다. 매우 귀한 자료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1940년대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십 수년간의 피난 생활을 정리하고 대한민국 정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위용을 선보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좌우연합정부 구성입니다. 1939년 5월 김구 선생과 김원봉 장군은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신'을 공동명의로 발표합니다. 김구 선생과 김원봉 장군 두 사람은 좌우합작에 합의했고, '전 민족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동시에 자주독립국가 및 민주공화제의 건설, 일제 및 친일파의 재산몰수, 산업의 국유화, 농민에게 토지분배, 남녀평등, 국비 교육 등 지금 살펴도 혁신적인 10개의 공동강령에 합의했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바탕이 돼 1940년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이 가능했고, 이어 완벽한 좌우합작 정부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해 일어난 태평양전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일간 전쟁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대한민국 국군이 일본과 공식적인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을 세계만방에 발표합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이틀 뒤의 일입니다.


이후 대한민국 광복군은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합작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합니다. '독수리작전'이라 명명된 이 침투공작을 위해 광복군은 미군과 1945년 5월부터 3개월간 훈련을 진행합니다. 1차 훈련을 마친 1945년 8월, 김구 선생은 서안에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과 함께 미국측 도노반 소장을 만나 한반도 투입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이 내용을 백범일지에서 자세히 언급합니다.


"광복군은 서안과 부양에서 미군과 함께 비밀훈련을 실시하였다. 3개월 훈련으로 요원들을 조선으로 밀파할 준비를 마쳤을 때, 나는 미국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가서 OSS 국장 도노반 장군과 공작을 협의했다. 도노반 장군은 '오늘 이 시간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되었다'고 정중하게 선언했다." 김구 <백범일지>


이 과정 속에서 반드시 알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김구 선생의 강력한 의지로 탄생한 광복군은 1942년 조선의용대와 합쳐진 후에야 대한민국 정식 군대로서 참모습을 보여줍니다. 충분한 병력과 전투 능력, 체계를 비로소 갖추게 된 겁니다. 김구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결정하면서 조선의용대 총대장인 김원봉 장군을 광복군 부사령 및 1지대 지대장으로 선임합니다.


군의 좌우 합작 뿐 아니라 임시정부 의정원에도 좌익진영 인사들이 참여합니다. 조국의 광복이라는 큰 뜻을 위해 항일운동의 양대 거두인 김구 선생과 김원봉 장군이 서로 합심해 하나되는 모습을 선보인 겁니다.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김구 선생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수년을 준비한 국내 진입작전이 시도조차 못하고 중단됐습니다. 이후의 일은 글머리에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김구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 3개월 동안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미-소 양국은 한반도에 38선을 그었습니다.


'한 달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이유입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예정대로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이뤄졌더라면, 김구 선생을 비롯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 후 온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면, 아마도 1945년 11월 김구 선생의 표정과 72년 후인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입술을 굳게 담은 굳은 표정은 분명 달라졌을 겁니다.


▲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 사진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가 김구 선생. ⓒ wiki commons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조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미국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김구 선생의 27년은 임정의 역사와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복귀는 한마디로 썰렁했습니다. 선생이 김포 비행장에 내렸을 때, 공항에 나온 국민들은 없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개인 자격으로 복귀한 탓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선생의 귀국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김구 선생의 행보는 한마디로 처절합니다. 한 달 먼저 입국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군정 하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져갈 때, 김구 선생은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끊임없는 투쟁을 다시 이어갑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칠순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선생은 윤봉길 의사를 비롯해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일본에 머물던 박열 선생을 통해 모셔오게 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정한 효창원에 세 분의 유해를 모셨습니다.


선생이 해방된 조국에서 강조한 바는 하나입니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 김구 선생은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진행합니다. 1948년에는 북한으로 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민족의 거목 김구 선생도 해방된 조국의 분단은 막지 못했습니다.


1948년 남과 북은 각각 단독으로 정부를 세웁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9년 6월 26일,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서울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운명합니다. 임시정부 27년 역사에서 일제에 의해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던 민족의 거두가 허망하게 생을 달리한 겁니다. 김구 선생은 자신이 직접 선택해 삼의사를 모셨던 효창원에 영면했습니다.


일제와 이승만과 박정희가 효창원에서 저지른 만행


<How are you 임정> 취재팀은 20박 21일의 중국 현지 취재를 진행하기 전, 수차례 김구 선생과 삼의사 묘역을 찾았습니다. 그때마다 느낀 감정은 다들 다르지 않았습니다.


'분노'


김구 선생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의사를 효창원에 모신 이유는 단순합니다. 일제 침략의 중심지가 된 용산 일대에 '나라를 다시 빼앗기지 말자'는 의미로 효창원에 세 분을 모셨습니다. 실제로 일제는 정조대왕의 장남 문효세자와 세자의 모친을 모셨던 효창원에 골프장을 짓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 하늘에서 본 효창운동장과 김구 선생 묘 효창공원으로 향하는 입구부터 거대한 효창운동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 때인 1960년에 완공된 탓에 지금은 낡고 허름하지만,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과 삼의사 묘역의 남쪽 방향을 막고 있다. ⓒ 김종훈


▲ 위성사진으로 본 효창공원 효창공원에 있는 김구 선생과 삼의사 묘역 앞에는 거대한 효창운동장이 자리하고 있다. 묘역 머리쪽으로는 박정희 때 세워진 반공탑이 있다. ⓒ 위성사진 캡처


효창원의 시련은 김구 선생이 삼의사 곁에 묻힌 뒤에도 계속됩니다. 묘역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효창공원으로 향하는 입구부터 거대한 축구장(효창운동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60년에 완공된 탓에 지금은 낡고 허름하지만,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과 삼의사 묘역의 남쪽 방향을 막고 있습니다. 묘역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효창운동장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입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9년 '제2회 아세아축구선수권대회' 개최를 구실로 독립운동가 묘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을 건설을 밀어붙였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애국지사들 묘역 바로 앞에 왜 거대한 운동장을 세운 것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김구 선생과 대립했던 이 전 대통령의 행보를 보고 그 의도를 짐작할 뿐입니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후 효창원에 경찰을 배치해 시민들의 참배를 막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만행이 이 전 대통령이 쫓겨난 뒤에도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김구 선생과 삼의사 묘역이 능선으로 이어진 머리 쪽에 느닷없이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을 세웁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만들어진 건데, 이 역시도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의 묘역과 삼의사 묘역 머리 쪽에 버티고 있습니다.


▲ 박정희가 세운 북한반공투사위령탑 1969년, 박정희 정권은 김구 선생과 삼의사 묘역 머리쪽에 반공탑을 세웠다. 드론 영상을 캡처했다. ⓒ 김종훈


임정 투어 로드다큐와 가이드북을 만드는 이유


취재팀은 지난 6월 18일부터 7월 8일까지 20박 21일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좇아 중국 현지를 다녔습니다. 지금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6편의 미니다큐와 임정투어 가이드북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목적은 하나, 내년(2019) 대한민국 탄생 100년을 맞아 좀 더 많은 청년들과 시민들이 현장을 찾아 우리의 역사를 직접 보고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요즘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애국 지사들이 우리를 도울 것'이라는 흰소리입니다. 현재 제작 중인 임시정부 로드다큐와 임정투어 가이드북이, 좀 더 잘 됐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리되면 더 많은 시민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온전히 알게 되고, 그중 몇몇은 서울에서부터 충칭까지 임정을 찾아 떠나는 데 용기를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가서 보면 압니다. 그간 우리가 얼마나 몰랐고 잊고 지내왔는지, 우리의 뿌리를 만났을 때 어떤 마음이 이는지 말입니다. 무엇보다 김구 선생과 문재인 대통령이 섰던 충칭의 그 계단에 서면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것이 차오릅니다.  


그 계단에 서서 김구 선생과 문재인 대통령처럼 사진 한장 꼭 남기기를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취재팀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ow are you 임정> 로드다큐 1편은 오는 8월 15일 공개할 예정입니다. <임정투어 가이드북>은 스토리펀딩의 달성 여부에 따라 출간이 결정됩니다. 많은 관심과 애정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How are you 임정> 스토리펀딩 바로보기 -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766/episodes 


▲ 충칭 연화지 청사 계단에 서서 1945년 11월 3일, 김구 선생은 이 계단에 서서 환국 기념사진을 찍었다. 2017년 12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은 애국지사 후손들과 함께 이 계단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2018년 7월 'How are you 임정' 취재팀도 충칭 연화지 계단에 서서 그날을 기억했다. ⓒ 김종훈


임정투어 가이드북_김구 편 


1. 중국 충칭 연화지 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서 사용했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청사다. 1945년 1월에 연화지 청사로 옮겨왔다. 김구 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활동했던 곳이다.


해방 후 여관, 학교, 주택 등으로 사용되다 1994년 6월 독립기념관과 충칭시 대외인민우호협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협정을 체결한 뒤 1995년 8월 복원 완료됐다. 과정 속에 독립운동가 이달 선생의 후손 이소심 여사의 노력이 빛났다.


중국 내에 있는 항일유적지 중 가장 완벽하게 복원된 장소 중 하나다. 특히 이곳 계단에서 김구 선생과 문재인 대통령이 시간을 거슬러 사진을 찍었다. 방문해 반드시 사진을 찍어볼 것을 권한다.


2. 서울 효창공원 김구 선생 묘역


김구 선생을 비롯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원래 정조대왕의 맏아들인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었으나 일제 때 골프장을 세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승만 정권 때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구 선생 묘역과 삼의사 묘역 앞에 축구장을 건립했고, 박정희 정권 때는 애국지사들 묘역의 머리쪽에 반공투사위령탑을 세웠다. 바로 잡아야할 부분이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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