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701.html


사진 속 역사, 역사 속 사진

그들에게 학살은 유희였다

양심 회피 논리가 만든 국가폭력 가해자들

동지마저 죽이고 결국엔 자기 파멸의 길로

제1222호 등록 : 2018-07-23 16:22 수정 : 2018-07-27 11:46


➊충남 공주 왕촌리 학살 현장으로 끌려가는 재소자들. 영국 런던에서 발행한 <픽처 포스트>(Picture Post)에 ‘워 인 코리아’(War in Korea·1950년 7월29일)라는 제목의 기사에 담긴 사진이다. National Archives Ⅱ, Record Group 242


전쟁은 적과 싸우는 군인들의 전투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는 것은 후방의 민간인이다. 한국전쟁 때 남한과 북한에서 남북한 정권에 살해당한 민간인 희생자는 남북한 군인 전사자의 두 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 통계일 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남쪽에선 국민보도연맹원과 부역자 처벌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통계에 이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그것도 자국 국민을 죽일 수 있었느냐고. 한두 사람이 아니라 수백 명씩 한꺼번에 죽일 수 있었느냐고, 죽인 사람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사적 폭력과 다른 국가폭력의 비밀


한국전쟁 때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가해자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거나 진실을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아는 한, 가해자가 스스로 발 벗고 나서 과거의 참혹한 사실을 밝히고 참회한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떻게 가해자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스스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여생을 편하게 살 수 있었을까? 바로 여기에 개인의 사적 폭력과는 다른 ‘국가폭력’의 비밀이 있다.


사진➊을 보면 트럭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실려 있다. 그들은 머리카락이 모두 짧게 잘렸고, 머리를 무릎에 붙인 채 숙이고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얼굴을 들고 있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트럭 뒤쪽에 재소자들을 현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경찰과 군인들이 소총을 들고 감시하고 있다. 왼쪽 군인은 오른발을 트럭에 걸쳐 재소자에게 총구를 겨냥한 채, 촬영자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나 주저함이 보이지 않고 희미한 웃음마저 보이는 듯하다.


이 사람들은 공주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이었다. 1950년 7월, 공주형무소 재소자 중 정치범과 국민보도연맹 가입자가 충남 공주 왕촌리 말머리재로 끌려가 학살됐다. 이날 희생된 사람은 700~1천 명으로 알려졌다. 2001년 말머리재에선 탄피와 함께 일부 유골이 발굴됐는데 유골들은 30㎝도 채 안 되는 깊이에 묻혀 있었다.


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과 보도연맹원을 대대적으로 처형했다. 정치범과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강한 척하는 사람들이 내면의 유약함을 감추듯, 국민의 지지가 허약했던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보도연맹원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과 지하 ‘빨갱이’들에 부화뇌동할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됐다. 이 좌익세력은 공산주의자만을 지칭하지 않았다.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김구를 ‘크렘린의 신자’라고 비난한 것에서 잘 나타나듯,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모두 좌익세력으로 여겼다.


정부는 군경 조직을 이용해, 이 학살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했다. 근대적 조직 메커니즘에서 개인의 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한 군인이 내 손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고 아무리 강변해도, 그가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받기 쉽다. 나치의 만행을 경험한 독일군은 반인륜적 범죄를 수행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부여됐지만,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이런 규정이 없는 한국에서 ‘명령은 명령일 뿐’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명령 거부가 아니라 상관의 명령에 따르면, 그는 상관에게서 소임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이 과정은 조직의 일반적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국가폭력은 대부분 군대나 경찰같이 상하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직이 저지르는데, 그 결과 실행자는 학살 책임을 다른 구성원과 나눠 가진다. ‘상부의 명령이 하달됐고, 나는 단지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라는 양심 회피 논리가 만들어진다. 더욱이 자신과 동일한 행위를 한 여러 명의 공범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신념을 더욱 강화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다. 방아쇠를 당기려면, 죽일 대상에 대한 멸시와 극도의 증오가 있어야 하고 이념적 정당함을 부여받아야 한다. 좌익을 비인간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우리와 다르다는 공포증(Heterophobia)에서 시작된다. 좌익을 자신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면, 학살은 쉽게 이뤄지지 못한다. 좌익세력을 인간으로 보지 않아야만 학살이 가능하다.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


❷대구 부역자 학살. 오른쪽 학살을 지휘한 것으로 보이는 군인이 활짝 웃고 있다. ‘Execution by ROK Army Military Police’라는 제목의 문서에 포함된 7장의 연속촬영 사진 중 하나. 1951년 4월 대구에서 촬영. National Archives Ⅱ, Record Group 242


❸ 대구 부역자 학살. 왼쪽에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현장을 감독·기록하는 미군의 뒷모습이 보인다. 1951년 4월 대구에서 촬영. National Archives Ⅱ


학살에는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라는 극우 반공 이념이 있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였다. 빨갱이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악마나 귀축(鬼畜)이었다. 우리와 다른 이질적 존재로 ‘개’나 ‘돼지’였고, 그래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없어져야 하는 존재였다. 빨갱이가 없어져야 사회가 안정되고 질서를 찾는다는 생각은 학살을 부추기는 주요한 이념이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제일의 가치로 삼아 빨갱이에 대한 적대 의식을 고취하고, 국가조직을 가동해 민간인 학살을 확대해갔다. 학살이 빈번해지고 조직 임무로 일상화되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이제 누구도 학살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학살은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절차로 굳어진다.


학살이 애국적 행위로 인정되면서, 개인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위가 덧붙여진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자신이 고문 기술자가 아니며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며 전기고문 등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면서 심문은 “일종의 예술이었다”고 주장했다. 부여받은 업무가 일상화돼 틀에 박히면, 여기에 개인의 창조적(?) 행위가 덧붙여지는데 그것은 대부분 유희로 메워진다. 피비린내 나는 고문이 예술이자 유희가 되는 것이다. 학살도 이와 같다. 전쟁 초기엔 뒤에서 소총으로 사살하던 방식이었지만, 학살이 반복되면서 총살 방식은 간단해지지만 나중에는 학살의 효율성을 고려하고 적대적 감정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확인사살, 생매장, 참수, 효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방식이 나타난다. 사진❷는 대구에서 벌어진 부역자 처형 현장을 찍은 것이다. 오른쪽 군인이 활짝 웃고 있다. 이는 연속 사진 7장 가운데 맨 처음의 사진인데, 사전 지식 없이 이 사진만을 보면 군인 한 명과 주민 여러 명이 기념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왼쪽 얼굴만 보이는 여인은 삽을 들고 있다. 놀랍게도 군인들은 부역자에게 자신의 무덤을 파게 했다. 이를 노동력을 절약하는 학살의 경제적 효율성이라고 해야 할까?


사진❸은 부역자를 구덩이에 몰아놓고 총살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왼쪽에 미군으로 보이는 인물이 있다. 학살을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현장을 관리·기록하는 미군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여기에서도 미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이른바 부역자였다. ‘부역’이란 인민군이나 북한 정권에 협조한 행위를 말하는데, 부역자 처벌은 서울 수복 뒤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누구보다 일찍 서울 시민을 버리고 탈출한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라디오 방송으로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있으며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킬 것”이라고 거짓말해, 많은 서울 시민이 상황을 잘못 판단해 피란을 가지 못했다. 라디오 방송 다음날 한강교가 폭파돼 서울 시민은 피란길이 완전히 막혀 서울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적반하장으로 부역자 색출에 노력했다. 부역자 색출의 기준이 된 것은 한강을 건너 피란을 갔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였다. 강을 건너는 것이 생명을 나누는 경계선 구실을 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책임과 전쟁 지도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한강교 폭파로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적 치하에서 간신히 생명을 부지했던 많은 주민을 잠재적 부역자로 간주했다. 이승만은 “부역 처단은 앞날의 우리나라 기초를 안정시키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며 “나쁜 사람을 적발하고 공산당이었다면 부모 형제간이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토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애꿎은 부역자 공격으로 정치적 곤궁을 타개하고 공세적 태도로 전환했다. 처벌받을 사람이 처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민을 희생양 삼은 이승만


이승만이 말하는 부역 행위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도 포함됐다. 이승만은 피란할 때, 경무대에 개 세 마리를 두고 갔다. 두 마리는 러시아 총에 죽었고, 한 마리는 산으로 도망했다. 수복 뒤, 이승만은 식당일 하는 소녀를 산으로 보내 개를 찾아오게 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기르던 개 ‘해피’가 ‘부역하지 않은 개’라서 주변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에게는 개도 똑같은 개가 아니라, ‘부역한 개’와 ‘부역하지 않은 개’라는 구분이 있었다. 그리고 부역자는 ‘부역하지 않은 개’ 이하의 존재,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한국전쟁 경험을 여러 소설 속에서 표현한 박완서는 “국민들을 인민군 치하에다 팽개쳐두고 즈네들만 도망갔다 와가지고 인민군 밥해준 것도 죄라고 사형시키는 이딴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지 않”았다라고 썼다. 미처 피란 못하고 서울에 남았던 박완서는 “인공 치하에서 전혀 협조를 안 한 인사 중에도 서울에 남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도강파와 차별받는 것을 목격한 우리였다”고 회고했다.


보도연맹원 학살과 부역자 처벌은 모두 적을 돕는 자를 처벌한 것이었다. 보도연맹원 학살이 ‘미래’에 이뤄질 부역에 대한 학살이라면, 수복 직후의 부역자 처벌은 인민군 점령지에서 이뤄진 ‘과거’ 부역 사실에 대한 단죄였다. 그 기준에 객관적 지표는 없었고, 정권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적용됐다. 보도연맹원 학살로 20여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고, 부역 혐의로 조사받은 이는 55만 명에 이르렀다.


사회심리학자들은 가해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강자의 위치에 있었고 조직이라는 보호막이 있어 심리적 상처가 없는 반면, 피해자들은 강요된 폭력으로 목숨을 잃거나 살아남았더라도 자아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정상적 생활이 쉽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과연 가해자는 온전했을까?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적절한 답이 될 것이다. 전쟁 당시 학살을 다룬 소설에서 가해자는 강한 종교적·정치적 신념으로 학살 대상을 마치 곤충과 짐승을 죽이는 것처럼 쉽게 해치운다. 학살은 점차 습관이 되고 기계화되며 유희로 전락한다. 그 과정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비린내로 진동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에서 학살은 동지를 죽이는 것으로 발전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난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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