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463732
[최초공개] 청년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 성명서
[김대중 서거 9주기] 1956년 보도자료 형식으로 발표... 53년간 민주당과 함께 한 역사의 시작
18.08.17 19:00 l 최종 업데이트 18.08.18 13:12 l 글: 장신기(chungwol) 편집: 김지현(diediedie)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박명림 교수)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9주기(8월 18일)를 맞이해 1950년대 중반 청년 김대중의 정치활동에 관한 사료를 최초로 공개한다. 이번에 공개하는 자료는 1955년 6월 15일자 신문에 게재된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나'라는 기고문과 1956년 9월 25일에 발표된 보도자료 형식을 띤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성명서 등 총 2점이다.
김대중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겪으면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에 맞서 싸우는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시사평론가로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던 김대중은 1955년 3월 서울로 거처를 옮긴 뒤부터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이 두 자료는 그 당시 청년 김대중의 정치행보의 내용과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에 공개하는 사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청년 김대중의 정치활동에 관한 내용을 두 차례에 걸쳐서 분석해보려고 한다. 이중에서 먼저 공개할 사료는 1956년 9월 25일 작성된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 성명서다. 이 자료는 언론사 정치부에 보내는 보도자료 형식을 띠고 있으며,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6년 9월 25일 작성
1956년 9월 25일 작성된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 성명서. 언론사 정치부에 보내는 보도자료 형식이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숙계(肅啓) 시하(時下) 국향(菊香) 지절(之節)에
귀체(貴體) 대안(大安)하시오며 민주언론 창달에 건투하심을 앙송차축(仰頌且祝)이외다. 취송(就悚) 소생이 종래 공사간 막중한 애원(哀願)를 욕몽(辱蒙)하였음을 심사불기(深謝不己)이온 바 특히 금반 소생이 기간의 무소속 생활을 청산하옵고 민주당에 입당을 결심함에 있어서 이 뜻을 삼가 귀 선생에게 보고하나이다.
소생의 우견(愚見)으로서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가 관권(官權)의 포위 앞에 최후잔멸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관료특권의 악정을 하로속히 제거하지 않고서는 보수 진보 양단간에 그 존재마저 운위될 수가 없는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소생과 같이 정치의 말단에서 봉사한 자로서는 5.15 선거 이후 민심의 절실한 소원에 복종하여 일체의 소이(小異)를 지양하고 오로지 민권의 승리에 자신의 전 능력을 경주(傾注)하는 것이 신성한 의무이라고 사료되와 현하 유일한 야당으로써 민권수호의 선두에 서서 투쟁하고 있는 민주당에의 입당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원컨데 귀 선생께서는 종래와 변함없이 지도애호(指導愛護)하여 주심을 재삼복원(再三伏願)하여 마지않습니다. 경구(敬具)
단기 4289년 9월 25일
김대중(金大仲) 백(白)
사(社)
정치부 귀하
일반적으로 1950년대 글을 보면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와 문장 등이 많다. 거의 사어(死語)화 되다시피한 단어가 많고, 과거 문헌에 자주 인용되던 한문 문장 등을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 등이 많기 때문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부 표현의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위하여 민주당에 입당하려고 한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김대중의 한자 이름이 金大中 대신 金大仲으로 표기된 이유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은 청년 시절 모습. ⓒ 더불어민주당
이 자료의 의미와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을 하기에 앞서 우선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이 자료에서 김대중의 한자 표기를 보면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중'의 한자가 中이 아니라 仲으로 돼 있다. 여기에 의문을 가질 독자들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하려 한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그의 조부가 작명했고, 조부가 작명할 때의 한자 이름은 金大仲이었다. 그런데 호적에 올리는 과정에서 당시 관리의 실수로 金大中으로 등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이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의 모든 자료에는 金大中으로 기재돼 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대중은 1954년 4월에 中을 仲으로 변경하는 한자 개명을 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개명 직후 치러진 1954년 5월 3대 민의원 선거부터 해서 1950년대 내내 연이어 선거에 낙선해 가산을 탕진했고 부인 차용애 여사가 병사하는 등 개인적으로 큰 불행을 겪게 됐다. 훗날 김대중은 이때가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다.
김대중은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개명 이후부터 이어진 연이은 불행에 큰 고통을 겪게 되자 심기일전 차원에서 1961년 4월 15일에 중(仲)에서 중(中)으로 다시 개명했다. 그 결과 1954년 4월부터 1961년 4월까지 김대중의 한자 이름이 金大仲이었으므로 이 자료에도 그렇게 표기된 것이다.
1950년대 보도자료의 형식과 내용을 알려주다
이상 이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이 사료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자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로 문헌사적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자료는 당시 통용된 보도자료의 한 형식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당시에도 당연히 보도자료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발행된 신문은 존재하지만 기사 작성의 중요 기본 참고자료가 됐을 보도자료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여건을 고려해볼 때 그 시절에 제작된 보도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 보관돼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그런 면에서 1956년에 제작된 이 보도자료는 상당히 희소가치가 있다.
그리고 보도자료 작성에 있어 정형화된 형식이 있다고 볼 수 없지만, 이 글은 맨 아래 '사(社) 정치부 귀하'라는 표현만 없으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보도자료라고 보기 힘든 형식을 띠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보도자료 형식과 내용에 있어 좀 낯설고 특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부분도 나름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이 보도자료는 제작만 된 것이 아니라 실제 배포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 1956년 9월 28일자 기사를 보면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 소식과 위 보도자료에 나와 있는 민주당 입당 이유에 관한 내용이 기사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저 보도자료를 여러 부 인쇄한 후에 김대중이 해당 언론사 이름을 수기로 작성해서 보냈을 것으로 판단된다.
민주당의 역사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은 6대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 더불어민주당
그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이 자료의 정치사적 의미다. 이 자료는 대한민국 정계의 양대 정당의 하나인 민주당의 역사를 살펴보는 데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민주당은 1955년 9월 19일에 창당됐고, 김대중은 민주당 창당 1년여 뒤인 1956년 9월 25일에 입당했다. 그리고 김대중은 2009년 8월 18일 서거할 때까지 53년 동안 민주당의 역사와 함께했다. 그렇게 보면 김대중의 정치 인생은 민주당의 형성 및 발전 과정과 함께한다.
김대중은 1960년 4.19 이후 등장한 제2공화국 장면 정부에서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약화된 야당의 도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와 같은 노력과 성과에 대한 지지에 힘입어 당시 비주류에 있던 김대중은 7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은 박정희식 개발독재 노선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을 하고 대중경제론, 3단계통일론, 4대국안전보장론 등의 대안 노선과 정책을 내세웠다. 반대만 하는 야당이 아니라 대안과 정책을 제시하는 실력있는 정당을 강조해 당시 야당의 대내외적인 위상을 획기적으로 제고했다.
그리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도 야당의 역할을 중시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부터 군사 독재 정권의 억압은 강고해지고 권력의 폭력화가 심화됐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은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면서 야당과 재야운동 세력과의 연합 노선을 강조했다.
그래서 야당의 위축과 무력화를 막고 개헌을 통한 평화적인 방식의 제도적 차원의 민주화 이행을 강조했다. 정당정치와 운동정치와의 결합을 통해 민주화 이행의 동력을 최대화하면서 법과 제도에 의한 민주화 이행 및 공고화를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재야운동권 세력과 개혁적 전문가 그룹이 정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했다. 김대중은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내 기존 정치세력의 반발을 누르면서 민주당의 체질개선과 역량강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1997년 15대 대선에서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만년 야당의 꼬리표를 달고 있던 민주당은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주화 이행 및 공고화에 있어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여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만큼 김대중 정부 출범의 의미는 크다. 그 토대 위에서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가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자료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짧게 살펴봤지만, 김대중은 53년 동안 민주당의 역사와 함께했고 민주당의 발전에 있어 매우 큰 영향을 줬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한 인물이 특정 정당의 형성 및 발전의 장기적인 과정에 있어 이토록 큰 영향을 준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민주당은 현재 대한민국 정계의 양대 정당의 하나로서 한국의 중도진보 세력을 대변하는 집권 여당이다. 민주당의 위상 그리고 민주당에 있어 김대중의 위상 등을 감안할 때 이 사료가 갖는 정치사적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1956년 9월 25일 보도자료 형식으로 발표된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성명서의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 살펴봤다. 다음 글에서는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 정계에 입문하기로 결심한 김대중이 민주당에 입당하기까지의 정치 행보의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1955년 6월 15일 치 신문에 게재된 김대중의 기고문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는가'의 내용을 분석하려고 한다. 이 글과 그 당시 김대중의 정치 행보는 훗날 김대중의 정치활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글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는가'에 대한 분석글은 8월 18일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글쓴이 장신기씨는 사회학 박사이며 현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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