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tapa.org/43852


[민국100년 특별기획] 3부 사법부 '로열 패밀리'

박중석 2018년 8월 24일 7:36 오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시리즈를 2018년 8월부터 2019년 하반기까지 계속해서 보도합니다. 내년 2019년은 1919년 3.1 혁명 10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을 맞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이 특별기획을 통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세력들을 각 분야 별로 분석하고, 특권과 반칙 및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통찰을 99% 시민 여러분과 함께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프로젝트를 통해 일제와 미 군정, 독재, 그리고 자본권력의 시대를 이어오면서 각 분야를 지배해온 세력들이 법과 제도를 비웃으며 돈과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그들만의 특권을 재생산한 현재의 지배계급 시스템을 가감없이 들춰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미래 세대는 과거 지배 체제가 극복된, 그래서 보다 정의롭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체제에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며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2005년 3월 서울 양재동 새로운 ‘로열패밀리’의 탄생


2005년 3월, 서울 양재동 한 선교센터에서. 법조계의 이목을 끈 결혼식이 열렸다. 사법고시 12회 동기인 당시 양승태 대법관과 김승규 법무부 장관이 사돈을 맺은 것이다. 혼맥을 통한 새로운 사법부 ‘로열패밀리’의 탄생이었다.



역대 대법원장, 대법관 137명 가계도 분석


뉴스타파는 역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가계도와 혼맥을 분석했다. 분석 대상은 137명이다. 한 명 한 명 가계도를 작성하고 혼맥을 찾았다. 눈에 띈 것은 장인과 사위 관계였다. 판사와 검사를 사위를 둔 대법관은 24명으로 집계됐다. 현직 중에는 김명수 대법원장, 권순일 대법관이 각각 검사를 사위로 뒀다.


장인과 사위가 나란히 대법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재호 대법관(장인)과 최종영 대법원장(사위), 한성수 대법관(장인)과 이회창 대법관(사위), 사광욱 대법관(장인)과 김형선 대법관(사위) 등이다. 아버지와 자녀가 대법관에 오른 경우는 손동욱(아버지), 손지열(아들) 부자(父子)가 유일했다.


친일인명사전 사법 분야에 등재된 대법관은 19명이다. 이 가운데 박정희 정권에서  3대와 4대 대법원장을 조진만, 5대와 6대 대법원장 민복기 등 8명이 법조인 사위를 얻거나 자녀가 법조인이 됐다.


▲ 대법관 137명에 대한 가계도와 혼맥도


뉴스타파는 역대 대법관들의 혼맥 조사 결과를 오늘부터 3차례에 나눠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1차 혼맥 분석 결과는 여기를 클릭하면 자세히 볼 수 있다. 또 혼맥 인포그래픽을 통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혼맥을 통한 로열패밀리의 형성은 민주주의와 사법부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혼맥은 대한민국 최상류 집단, 지배계급에 최단기로 편입하는 가교가 되고 특권층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의 삶과 괴리된 채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사법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상당수 법관들이 이른바 ‘메이저 중심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상위층이라고 하는 그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예를 들어 판사인데 가난한 집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대화를 하는 주제도 사회 어떤 그 기층민들의 애환이나 이런  것들을  대화 주제로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법조계 혹은 재계하고 혼맥을 쌓아가지고 가족관계를 맺었을 때에 형성될 수 있는 가치관이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겠죠.


김지미 /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법위원장)


서울대 법대 성적도 좋아 군법무관이 돼서 판사가 됐는데 원래 이 사람이 집안도 좋은데 장가도 잘 갔어 이런 분들이 점점 늘어나거든요. 이런 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 분들의 특권의식이 있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이런 분들은 자기가 접하는 모든 인간관계가 사실은 사회의 되게 메이저인 거예요. 관점 자체가 메이저 중심에서 사고를 할 수밖에  없게 되는  한계가 생길 가능성은 높은 것 같아요.


류영재 / 현직 판사


사법부의 존재의 이유는 바로 소수자의 인권 보장입니다. 그 사회의 약자의 인권 보장입니다. 입법부나 행정부가 다수 국민의 의사에 귀 기울일 때 사법부는 다수 국민의 목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는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에 오히려 귀 기울이고 그들의 인권을 전향적인 판결을 통해서 확보해 가야 하고...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93년 9월 첫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첫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를 앞두고 법원이 분주하다. 판사들마다 재산을 꼼꼼하게 정리한다.  조윤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재산 공개 대상이다. 그는 주택 5채, 상가 2곳 오피스텔 1곳 등 21억 원을 신고했다. 여기에는 금 1850 그램도 포함돼 있다.


공직자 재산 공개 이후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다. 고위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 의혹과  주택 과다 보유 문제 등이 거론됐다. 조 부장판사에게도 비판이 제기됐다. 조 판사는 선친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억울했는지 재판 도중 결백을 주장하기도 했다.


조 판사는 1993년 재산신고 당시, 한남동 2층짜리 상가(134㎡)의 경우 2억 7,400만 원이라고 신고했다. 2018년 현재 공시지가로 따져도 22억 원에 이른다. 매매 호가로 보면, 평당 1억 3천만 원을 웃돈다. 부동산 관계자는 대략 50억 원대에 거래된다고 말했다.  


상가 바로 뒤에 있는 160여 ㎡의 대지 또한 조윤 전 판사 소유다. 1994년 판사를 퇴직한 뒤 사들였다. 현재 공시지가로 16억 원이다. 조 전 판사의 현재 재산은 1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1943년 6월 16일, 서울 당주동


조진만은 1943년 3월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를 퇴직했다. 석 달 뒤 서울에 올라와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진만은 1943년 6월 서울 종로구 당주동(313㎡) 건물을 사들였다. 그가 매입한 당주동 땅은 1975년 아들 조윤에게 물려준다. 조윤은 이곳을 1996년 금강제화에 매각했다. 지금은 포시즌스 호텔이 들어서 있다.


조윤 부장판사의 아버지 조진만은 1927년 해주지방법원 판사를 시작해 1938년 조선총독부 부장판사에 임명됐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가운데 부장판사가 된 이는 조진만과  김준평이 유일하다. 그는 1939년 고등관3등으로 승급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일제로부터 기념장과 훈장까지 받았다. 1928년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42년에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또 1943년 정5위에 승서됐다. 친일판사였던 조진만은 친일인명사전 사법 분야에 등재된다.


▲ 일제 강점기 친일 조진만의 주요 이력


조진만은 해방 후에도 영전을 거듭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 박정희 정권에서 7년 동안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을 지냈다. 사후 그는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국가유공자 공훈록에는 박정희가 은인으로 생각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1950년대 조진만은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당시 지주)의 변호를 맡아 고등법원에서 지주와 경작인들의 화해조서 작성을 이끌어 내서 뒤에 박정희가 '은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조진만 공훈록 일화 중

“어느 사회나 금수저, 흙수저는 있다”

뉴스타파는 지난 7월 서울 연희동 집 앞에서 조 전 판사를 만났다. 그는 부친의 친일행적을 묻자 “모른다”고 짧게 답했다. 또 “원래 아버지 쪽이 인천에서 부자였다”다고 답했다.


부의 대물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그 어떤 사회나 금수저 흙수저는 다 있다”면서 “그런 거 없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일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친일 판사는 해방 후 단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대한민국 사법부의 수장에 올랐다. 또 ‘금수저’였던 아들은 다시 고위법관이 됐다.



퇴직 대법관들의 ‘도장 값’은 얼마일까


2018년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인 퇴직 대법관은 3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형 법무법인에 영입된 이들도 적지 않다.



또 2017년 일부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의 대법원 사건 수임은 30여 건에서 많게는 60여 건으로 나타났다.(경향신문 보도)


▲ 2017년 퇴직대법관의 대법원 사건 수임 상위 건수 (출처 경향신문)


그렇다면 퇴직 대법관들은 사건 수임료로 얼마나 벌까.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2016년 총선에 출마한 안대희 전 대법관을 통해서다. 당시 안 전 대법관이 중앙선관위에 제출한 5년 치 납세 내역을 확인했다.


▲ 중앙선관위 자료에서 확인한 안대희 전 대법관의 5년치(2011-2015) 소득세 납부액


2011년 대법관 재직시설 소득세는 400만 원이었다. 그런데 대법관 퇴임 이후인 2014년과 2015년 연속 6억 원의 소득세를 냈다. 대체 얼마를 벌어들인 것일까? 김경률 회계사는 “소득세가 6억 안팎이면 연간 수익금액, 이른바 매출 금액이 20억 원을 웃돌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퇴직 이후 안대희 전 대법관의 재산은 크게 늘었다. 2012년 대법관 퇴임 시 9억 9천만 원, 2014년에는 22억 원으로 증가했고, 다시 2년 뒤인 2016년에는 31억 원으로 불었다. 퇴직 이후 4년 만에 20억 원이 늘어난 것이다. 전관예우와 이에 따른 고액 수임료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재산 증가폭이다.


뉴스타파는 안 전 대법관이 변호사로 있는 법무법인을 찾았다. 그를 만나 한해 수임료로 얼마를 받는지 물었지만 “할 말이 없다”며 “세금을 제대로 신고했고 평소 기부도 많이 했다”고 답했다. 전관예우 등 전직 대법관의 변호사 개업이 적절한지 물었지만 “내가 해당자인데, 말할 수가 없으니 이해해달라”며 자리를 피했다.


 免飢難富(면기난부) : 굶어 죽지는 않을터이니 부자될 생각은 하지마라

한때 법관을 가리켜 免飢難富(면기난부)라 했다. 판사를 하면 ‘굶어 죽지는 않을 터이니 부자 될 생각은 하지마라’는 뜻이다. 그러나 2018년 대한민국 법관들은 돈과 권력의 욕망에 갇혀, 스스로 법관의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취재 박중석, 최윤원, 문준영, 박정남, 신학림 전문위원

데이터 최윤원, 임송이

촬영 최형석, 오준식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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