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4949
김구부터 안창호까지... '1919지하철'을 소개합니다
[카드뉴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지하철로 떠나는 독립운동 여행
18.09.29 15:16 l 최종 업데이트 18.09.29 15:16 l 최종원·유재인(dhfl478)
3.1운동 100주년, 서울에서 느끼는 그 날의 기억
2019년, 내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청년기자로 활동하는 유재인 기자와 저는 지난 7, 8월 프로젝트 기사를 기획했습니다. 어떤 것을 기획할지 생각하다가 서울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들에 대해 취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하철 노선 형식으로 독립운동 관련 장소들을 모으고 만든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서울 안에서 가볍게 산책하면서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서울시 지도와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놓고, 장소들을 정해 서로 모여있고 의미있는 장소들로 최종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일상 중에 무심코 지나치는 곳 중에는 알고 보면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가령, 압구정역 주변에는 도산공원이 있었고, 은행과 언론사들이 모여있는 서울시 중구에는 보성사 터, 의병 항쟁 격전지, 태화관 터와 같이 현대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서울역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강우규 의사 동상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유재인 기자와 저는 기획을 취재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3.1운동 때 사용된 태극기가 일장기 위에 그려진 것이었고, 효창공원이 아닌 효창원으로 불려져야 하는 이유도 깨달았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보훈사업과 독립운동가 재평가에 대해 직접 언급하며, 효창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최근 발표했습니다. 지금의 시의성에 맞게, 이러한 카드뉴스를 기획했습니다. 3.1운동은 단순히 실패한 운동이 아닌, 임시정부가 시작돼 결국 대한민국이 건립된 큰 사건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1. 진관사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태극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3.1운동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밤새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는 일장기 위에 그려진 것으로, 독립운동가인 백초월 스님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보성사 터
본래 천도교의 기관지를 발행하던 보성사에서 1919년 2월 27일 2만 1000여부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고, 단 이틀만에 전국 각지로 배포되면서 3.1운동의 불을 지피게 됩니다.
3. 중앙학림
3.1운동 전날 만해 한용운 선생과 그 제자들이 시위 계획을 논의하던 곳으로, 독립선언서를 나누고 전국 곳곳의 사찰들로 보낸 곳입니다. 이곳은 조선총독부의 권유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오늘날 동국대학교로 이어집니다.
4. 태화관 터
3.1 운동 당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이 시작됨을 알렸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독립선언식사 이후 만세 제창이 이어졌고, 곧바로 태화관을 포위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 연행됩니다.
5. 탑골공원
탑골공원의 팔각정에서 학생대표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이뤄진 후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대한 민국 만세!" 공원을 가득 울렸던 그날의 함성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기를 보여준 큰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6. 보신각
탑골공원에서 출발한 3.1 운동 시위대는 당시 종각에 위치하던 남대문 광장을 기점으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집니다. 보신각의 종을 울리면서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함을 알렸습니다.
7. 이화학당
종로에서 시작한 3.1 운동은 정동길을 지나 덕수궁 대한문까지 이어졌습니다. 유관순 열사를 포함한 이화학당 학생들은 만세운동을 앞장섰으며, 그 영향으로 3월 10일 일제에 의해 휴교령이 내려지게 됩니다.
8. 서대문형무소
일제의 폭압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우리의 독립에 대한 열기도 뜨거워졌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수감시키기 위해 일제는 감옥을 증설했고, 서대문형무소 역시 그 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이용됩니다. 특히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은 대한의 독립을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9. 장충단 공원
일제는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때 희생된 열사들을 기리던 장충단을 없애고 이토 히로부미 등을 기리기 위한 박문사로 바꿉니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었고, 현재는 유관순 열사와 이준 열사 동상, 3.1운동 기념탑 등을 볼 수 있습니다.
10. 심우장
일제에 마지막까지 항거한 만해 한용운 선생이 최후를 맞이한 심우장 생가입니다.
1944년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선생은 신경통, 각기병,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결국 입적합니다. 조선총독부를 마주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북향으로 집을 지은 한용운 선생의 저항 정신이 느껴집니다.
11. 효창원
원래는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이던 효창원을 일제는 효창공원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최근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이 발표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백범 김구 기념관, 삼의사묘(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임정묘역(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 도산공원
안창호 선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3.1운동 당시 안창호 선생은 미국, 하와이 등지에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이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사상의 차이로 분리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며, 일평생 민족대단결을 위해 힘쓰셨습니다.
13. 독립운동가 그래피티
2015년에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녹사평역 안에 독립운동가 그래피티가 만들어졌습니다. 김구, 안창호, 이회영,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여운형, 김원봉까지 총 8명의 독립운동가 그래피티입니다. 경리단길에 가기 전에 마음 속에 역사를 품어보세요.
* 안중근청년기자단은 무엇? :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며, 글과 영상 등의 컨텐츠를 제작해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가는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 청년안중근> 소속 기자단이다.
덧붙이는 글 | 가톨릭프레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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