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62116394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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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K/단독] "전 재산 담보"..임정의 비밀 자금줄 최부잣집

이세중 입력 2019.06.21. 16:39 



최부잣집 고택


매년 곡식을 만 섬 이상 거둔다는 만석꾼을 12대에 걸쳐 배출한 경주 최부잣집.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하고, 사방에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는 최부잣집은 약 4백 년간 이어져 온 대표적인 조선 부자 가문이다.


최준과 안희제


1919년 일제강점기 당시 최부잣집 12대 종손 최준 선생은 백산 안희제 선생과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자금을 보낼 수 없으니 회사를 설립해 중국 등과 무역을 하는 명목으로 상해를 오가며 일제의 눈을 속인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자금의 6할은 백산에게서 나왔다"


이는 광복 이후 백범 김구 선생이 과거를 회상하며 남긴 유명한 말이다. 백산무역회사가 얼마나 독립운동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경주 최부잣집이 백산무역회사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은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져 온 사실이다. 조선 최고 부자일 뿐 아니라 서민들의 존경을 받아온 최부잣집은 그 자체가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지원 내용 등 근거들을 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부잣집 창고에 숨어있던 백 년 전 문서


경주 교동의 한옥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경주 최부자 고택. 대문을 지나 안채로 향하는 길 한쪽에 오래된 창고가 있다. 이 창고 안에 있던 함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들이 발견됐다.


최부잣집 창고


최부자 고택을 돌보는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최창호 이사는 우연한 기회로 창고를 열었고, 함 속에 담긴 자료 수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편지와 공문서, 명함, 서책 등 온갖 자료가 한가득했다. 1972년 사랑채에 불이 나 급히 방에 있던 자료들을 모두 밖으로 꺼냈는데 경황이 없다 보니 어떤 자료인지 확인도 없이 창고에 있는 함 속에 넣은 것이다.


KBS 탐사보도부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분석한 결과, 최부잣집이 독립운동자금을 댔다는 구체적인 물증들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확인했다.


전재산을 담보로 백산무역회사를 살린 '최준'


1922년 작성된 '근저당권설정계약서'.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조선식산은행에서 35만 원을 대출받는 내용의 계약서다. 35만 원은 현재가치로 2백억 원 이상의 거금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계약 조항 8조, '최준이 백산무역회사와 연대해 채무 이행의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다. 최준은 당시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표이사였다.


문서 뒷부분에는 저당 잡힌 최부잣집의 부동산 목록이 수십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적혀있다. 경주와 울산의 논과 밭 785필지로 모두 2백2십만 제곱미터에 달한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75% 정도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독립자금을 보내느라 경영 위기에 빠진 백산무역회사를 살리기 위해 보증을 들어 대출을 받은 것이다. 백산무역회사에 들어간 돈이 오롯이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상해에 간 최부잣집.."최완은 2만 원을 가지고"


최부잣집의 재산이 어떻게 상해임시정부에 전달됐을까. 취재진은 이를 입증하는 또 다른 문건을 추가로 발굴했다. 일본 외무성에서 보관 중인 이 문건은 1919년 5월 13일 작성됐다. 제목은 '독립운동에 관한 건'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 직후 조선인들의 동향, 특히 임시정부의 구성과 관련된 움직임을 일제의 밀정이 보고한 내용이다.


문서를 보면 "독립을 믿고 그 상세를 시찰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모여든 자는 그 수가 약 천 명에 달한다. 조선 각 지방에서 속속 모여드는 상황"이라며 당시 정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임시정부 자금 유통 과정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최근 상해임시정부에 송금된 것은 미국에서 4천 불, 평안남북도 교회에서 8천 원이다" 이어 "경상북도 경주 부호 최준의 남동생인 최완은 현금 2만 원을 소지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2만 원은 현재가치로 10억~20억 원 정도로 초기 임시정부 자금이 10만 원으로 알려진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거금이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 최부잣집 형제가 돈을 들고, 상하이에 온 상황을 보고한 건데 이름을 거론하며 구체적인 액수까지 적힌 점을 보면 최부잣집 형제들이 일제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실제로 임시정부에 합류한 최완 선생은 재무위원을 역임했다. 최부잣집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 그것도 액수까지 구체적으로 적힌 문서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국채보상운동도 주도


이외에도 최부잣집 창고에서 수많은 자료가 발견됐다. 예로 1907년 나랏빚을 갚자고 남녀노소 시민들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의 경주지역 명단이 적힌 '단연회 성책'이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성책을 일일이 확인해보니, 경주 지역 참여자 5,086명의 명단과 성금액이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그간 발견된 성책의 최대 규모는 천여 명으로 지역별 명단 가운데 원자료를 기준으로 최대 규모다. 성책 제일 앞부분에 적힌 이름은 단연회 회장을 맡았던 경주 최부잣집 11대손 최현식 선생, 최부잣집이 국채보상운동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KBS 탐사보도부는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3.1운동 계보도'를 단독 발굴해 보도했고, 4월 11일 임정 수립일에는 '임시정부 초기 2백여 명의 사진'을 단독 보도한 바 있다. 탐사보도부는 역사적 의미가 깊은 올해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기 위한 다각도의 취재를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이세중 기자 (cente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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