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도읍지 졸본은 어디일까?
고구려사 명장면 146
임기환 2022. 3. 31. 15:03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찾아 환인시를 방문하면 오녀산성은 빠뜨릴 수 없는 필수 코스이며, 부랴부랴 집안시로 발길을 돌리지 않고 좀 더 여유가 있는 분들은 하고성자 토성과 상고성자 고분군을 찾아보기도 한다. 환인이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가 위치했던 곳이라고 하지만, 고구려의 역사적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유적은 그리 많지 않아서 이 세 곳이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하고성자 토성은 혼강 서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고, 또 가까이에 상고성자 고분군까지 자리 잡고 있어서 졸본 도성의 평지 거주성으로 주목받았던 유적이다. 토성 유적은 현재는 서, 남, 북쪽 성벽의 기초부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며, 혼강과 접하고 있던 동벽은 홍수로 아예 유실되었다. 흙으로 층층이 다져 쌓은 판축기법으로 성벽을 쌓고, 전체 성의 형태는 장방형이며 둘레가 800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성안에는 마을이 자리 잡고 성벽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각하다.
장방형 토성이기 때문에 전에는 한군현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유력하였지만, 성안에서 그 시기 유물이 출토된 바가 없기 때문에 의문을 낳았다. 근래에는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인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고성자에서 동북쪽으로 혼강을 따라 10㎞ 올라가면 오녀산성이 위치한다.
하고성자 토성에서 동북쪽으로 1.5㎞ 거리에 상고성자 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군은 동서 200m, 남북으로 150m가량 범위에 200여 기의 무덤들이 6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대부분 무덤이 파괴되어 지금은 27기 정도만이 남아 있고, 그나마 훼손이 심각하다.
고분은 대부분 고구려 초기 형태의 적석총(돌무지무덤), 기단적석총이다. 중후기에 등장하는 계단적석총과 봉토무덤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고분군의 사용 시기가 고구려 초기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리상으로 보아 상고성자 고분군이 하고성자 토성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만든 고분군일 가능성이 크다. 적석총은 고구려 초기 국가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환인의 고구려 유적 분포지도 / 사진-기경량, 2017, <고구려 초기 왕도 졸본의 위치와 성격>에서 인용
평상시 거주 공간과 지배층의 고분군이 서로 이웃하고 있는 이런 모습은 고대 도읍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국내에 있는 고대 도읍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고분군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고성자 토성과 상고성자 고분군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환인 지역에서는 또 다른 평지성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오녀산성과 세트를 이루는 평지도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런데 "비류곡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아 도읍하였다(忽本西城山上而建都)"는 광개토왕비문의 내용과 하고성자의 지리적 위치가 잘 맞지 않는다. 즉 오녀산성을 기준으로 보면 홀본은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하고성자 토성은 오녀산성의 서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비문에는 홀본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하여 또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미 소개한 "홀본 서쪽 산에 성을 쌓고 도읍하였다"는 문장에 이어서 다음 문장이 이어진다. "(추모)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왕께서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즉 이에 따르면 추모왕(주몽왕)이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승천지,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추모왕의 장지는 홀본의 동쪽 언덕이다. 즉 홀본 서쪽에는 건국지인 오녀산성이 있고, 홀본 동쪽 언덕(홀본동강)에는 승천지(주몽왕릉)이 위치하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홀본은 오녀산성과 주몽왕릉이 있는 '동강' 사이가 된다. 오녀산성은 그 위치를 알고 있으니 '동강'의 위치를 찾으면 홀본의 위치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몽왕릉이 있는 '동강'은 어디일까?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본기'에는 주몽의 장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주몽왕 재위) 19년 가을 9월에 왕이 승하하셨다. 그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냈다." 주몽왕의 장지가 있는 용산은 광개토왕비문의 '홀본동강'과 같은 곳을 가리킨다.
주몽왕의 장지인 용산을 산꼭대기로 볼 수 없으니 아마도 용산 산기슭쯤 위치하였을 터이고, 이런 구릉 지형을 '강(?)'='강(岡)'이라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집안시 용산 산기슭에 위치한 장군총이다. 이를 광개토왕릉에 비정하면, 광개토왕 왕호에 있는 '국강상(國岡上)'이 장군총이 위치한 지형과 일치한다. 장군총의 입지를 염두에 두면 주몽왕릉이 위치한 '홀본동강'의 지형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다.
앞서 제시한 환인 지역 고구려 유적 지도를 다시 보자. 오녀산성의 동남쪽으로 고력묘자(古力墓子)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지금은 환인댐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저수지에 잠겨 있다. 이 고력묘자 고분군 동쪽과 남쪽에는 산줄기가 남북으로 이어지는데, 이 산줄기를 주몽왕의 장지로 기록된 용산쯤에 비정할 수 있겠다. 주몽왕의 장지 역시 아무래도 당시 공동 장지였을 고력묘자 고분군 안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위치한 집안시에서도 거대한 왕릉이 다른 고분들과 함께 고분군을 이루고 있음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고력묘자 고분군의 범위는 남북 1㎞ 정도로 앞서 본 상고성자 고분군보다 훨씬 컸으며, 1963년 북한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40기의 적석총과 봉토묘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분 성격으로 보아 상고성자 고분군보다는 중심 시기가 늦고 중후기까지 지속된 고분군이다. 고분군의 규모나 조영 시기로 보아 고려묘자 고분군을 환인현의 중심 고분군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오녀산성에서 동쪽을 보면 물속에 잠겨 있는 고분군의 능선이 내려다보인다. 갈수기에는 몇몇 무덤이 모습을 드러나기도 해서 필자는 한두 차례 배를 띄워 살펴본 적이 있다. 고구려 초기 역사가 가득 담겨 있는 이곳이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대로 수몰된 현장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이렇게 보면 오녀산성과 고력묘자 고분군 사이 혼강변 일대가 홀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까?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홀본서성산'과 '홀본동강'이란 문구 그대로 해석하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사실 이 문구는 홀본이란 지역 내에서 서쪽 성, 홀본이란 지역 내에서의 동쪽 언덕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즉 홀본은 오녀산성과 용산과 고력묘자 고분군 등을 모두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홀본의 지역적 범위를 넓게 본다고 하더라도 위 지도에서 보면 그 지리적 환경이 산세로 둘러싸인 좁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아래 위성 지도를 다시 살펴보자.
환인 일대 위성 지도
위 위성 지도를 보면 수몰로 인해 원래의 지형을 알기는 어렵지만, 환인 저수지에서 가장 넓은 수면을 보이는 부분이 고력묘자 고분군을 포함하여 평탄지를 포함하고 있는 '홀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다. 오녀산성 아래와 그 건너편의 평지를 주변 산세가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방어상으로는 유리하겠지만, 그래도 도읍지로서는 폐쇄적이고 비좁아 보인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지금의 환인시가지가 있는 곳과 하고성자 토성이 위치한 곳에는 제법 너른 평탄지가 펼쳐져 있다.
게다가 이곳은 육도하 등 혼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지류를 통해 주변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상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을 놔두고 산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서 도읍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여러 의문이 남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리적 환경은 그리 차이가 없다. 오늘날 환인시가지가 있는 곳이 고구려 시대에도 가장 좋은 도읍터였을 것이다.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혼강과 환인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필자-trimming)
혹 건국 초기에 방어상의 이점으로 고력묘자 일대에 거점을 마련했을지라도 아마 얼마 뒤에는 보다 넓고 개방적인 지금 환인시가지 일대 역시 졸본 도성의 범위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환인시가지 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조사된 바 없다. 또한 하고성자 토성이나 상고성자 고분군이 졸본 도성에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도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역시 졸본 도성의 의문을 풀 열쇠는 고려묘자 고분군에 있다. 이 고분군의 수몰로 인해 더 이상 해답을 구하기 어려운 초기 역사가 적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풀리지 않은 모든 비밀이 물속에 담겨 있는 듯 미루어두는 연구자의 나태한 변명처로 삼는 것이 아닌가 반성해본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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