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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 부른 노래인데... '친일 전향서' 쓴 작곡가가 준 충격
[친일 작곡가, 그 실체 ④] <봉선화> <고향의 봄> 홍난파
김종성(qqqkim2000) 19.08.02 08:37 최종업데이트 19.08.02 08:37
'애국가'와 '고향의 봄', 그리고 '가고파'까지. 아이와 어른 모두 무심코 흥얼거리는 이 노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친일 음악가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친일 작곡가, 그 실체'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친일 음악가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편집자말]
☞이전기사 : 은근슬쩍 친일 숨기고... 조용필도 부른 대표 가곡의 '배신' http://omn.kr/1k422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김형준이 작사한 노래 <봉선화>에 친일파 홍난파가 곡을 붙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로 시작하는 <고향의 봄> 역시 그가 작곡한 작품이다. 이 노래의 작사가 이원수도 친일파다.
<봉선화> <고향의 봄> 외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성불사의 밤>도 홍난파의 작품이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도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후삼국 시대인 899년에 도선대사가 창건하고 오늘날의 황해북도 황주군에 위치한 성불사를 소재로 한 노래다. 이은상이 지은 시조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작품이다.
▲홍난파.ⓒ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홍난파는 조선 멸망 12년 전인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영후이고, 난파는 아호다. 홍난파는 보통학교를 거쳐 YMCA 중학부와 조선정악전습소 서양학부를 졸업한 뒤인 1915년, 17세 나이로 모교에서 바이올린 교사가 됐다.
3·1운동 전년도인 1918년에는 스무 살 나이로 도쿄음악학교에 유학해 1년 뒤 수료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연주자·작곡가·음악비평가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 중에도 학업은 계속했다. 1926년 28세 나이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음악학원(지금의 구니다치 음악대학)에 입학했다. 서른한 살 때 귀국했다가 서른세 살 때는 미국 셔우드음악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졸업했다. 그 뒤로는 주로 국내에서 활동했다.
홍난파의 신변에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때
홍난파는 민족주의 운동에도 어느 정도 간여했다. 미국 유학 시절인 서른세 살 때 흥사단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에도 참여했다. 수양동우회에는 문인 이광수도 있었다. 이 단체들의 특징은 민족의 실력을 점차 양성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에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데 이어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 기운을 고조시키고 있을 때인 1937년부터 홍난파의 신변에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노동은 목원대 음악학 교수가 쓴 '홍난파: 민족음악 개량운동에서 친일 음악운동으로'에 이런 일이 소개돼 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7월로부터 몇 달 전 일이다.
"홍난파는 1937년 4월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조선의 문예가 30여 명이 결성한 사회교화단체 조선문예회에 회원으로 가입한다. 조선문예회는 작가들과 홍난파·김영환·박경호·윤성덕·이종태·함화진·현제명 등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친일단체였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엮은 <친일파 99인> 제3권에 수록
친일단체 조선문예회에 가입하기는 했지만 친일 활동을 본격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홍난파에게 그해 6월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이 치안유지법 위반죄 명목으로 홍난파·이광수를 비롯한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체포한 것이다.
일제는 그들을 잡아다놓고 고문을 가하면서 전향을 강요했다. 홍난파는 고문을 참아내지 못했다. 구속 2개월 만에 석방된 그는 전향서를 작성하고 협력을 약속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제3권에 따르면,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이라는 제목 하에 일본어 친필로 쓰인 그의 전향서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 여하와 그 활동 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상 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는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 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자신이 참여한 음악회 수익금은 전쟁 성금으로 사용
홍난파의 친일은 이 전향서를 쓰기 직전, 그러니까 석방 뒤부터 본격화됐다. 구속 2개월 만의 출소가 있기 직전에 일본과 홍난파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일이다.
그때 일본은 베이징 서남쪽 바오딩을 점령했다. 이 사건을 기념해 서울에서 '바오딩 함락 축하 황군 감사 대음악회'라는 행사가 열렸다. 이 음악회에서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노래>를 발표하는 것으로 홍난파는 친일파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가 참여한 이 음악회의 수익금은 전쟁 성금으로 사용됐다.
전향서를 쓴 다음해인 1938년, 홍난파는 수양동우회 회원들과 함께 대동민우회라는 친일단체에 가세했다. 이를 통해 조선과 일본의 통합인 내선일체 사업에 참여했다. 또 조선의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하는 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문화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노래도 만들고 악단도 지휘하는 방법으로 그는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에 일조했다.
구속과 고문 때문에 억지로 한 일들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처음에는 억지로 친일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자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이 시키지 않은 일, 그래서 일부러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스스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일이 1940년, 그의 나이 42세 때 있었다. 그때 '일본 건국 2600년'을 기념하는 음악 작품의 현상 공모가 있었다. 전쟁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행사였다. 현상 공모였으므로, 억지로 응모할 필요는 없었다.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홍난파는 <순정의 꽃 장사>란 작품을 만들어 응모했다. 그리고 당선됐다. 그의 친일이 자발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음악뿐 아니라 기고 활동으로도 친일
그는 1941년 8월 30일 사망했다. 전향서를 쓴 지 4년 좀 안 되는 시점에 죽은 것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는 그 기간 동안 아주 열심히 친일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그가 곡을 붙이거나 지휘한 작품 속에는, 제목만으로도 친일 냄새가 풍기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황국 정신으로 돌아가서>, <부인 종군의 노래>, <태평양 행진곡>, <국민 총력의 노래>, <모두 병사다, 탄환이다>, <출정 병사를 보내는 노래> 그리고 <이겼다 일본> 등등이다.
음악뿐 아니라 기고 활동으로도 친일을 했다. 1940년 7월 7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아래와 같은 글도 실었다. 괄호 속의 한글은 이해의 편의를 위해 추가한 부분이다. 문장이 너무 길어서 둘로 나누었다.
"거룩한 전쟁이 이제 제3단계에 들어가서 신동아 건설의 대업이 하루하루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가는 이때에, 총후(銃後, 후방)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했던 악인(樂人, 음악인)들의 원정(援程, 지원 활동)에는 의당히 넘쳐흐르는 감격과 예술적 감흥이 성숙해 갈 것인즉,
이번의 성업(聖業, 거룩한 과업)이 성취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곡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낼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후방 국민으로서 음악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운동에 용감하게 매진할 것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악으로써 일본을 세우고 음악으로써 나라에 보답하자고 했다. '음악 일본'의 건설을 통해 '거룩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는 글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친일파라는 증거를 확실히 남겨둔 것이다. 일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한국 음악인들과 음악계를 오염시키는 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에 있는 홍난파 노래비.ⓒ 위키백과
홍난파의 대표작인 <봉선화>는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한다. 이 가사처럼, 우리 민족은 친일파 홍난파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처량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홍난파가 죽은 뒤로 그의 음악적 혼은 오히려 강력해졌다. 이 점은 1968년부터 홍난파를 기리는 난파음악상이 한국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간 이 상의 수상자 중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1968년 정경화(바이올린), 1973년 백건우(피아노), 1974년 정명훈(지휘·피아노), 1977년 강동석(바이올린), 1978년 금난새(지휘), 1980년 김남윤(바이올린), 1990년 장영주(바이올린), 1991년 조수미(성악), 1995년 장한나(첼로), 1997년 백혜선(피아노), 2001년 이신우(작곡), 2003년 조성온(작곡) 등을 들 수 있다. 정상급 음악가들한테 홍난파를 기념하는 상이 수여됐던 것이다.
그런데 1968년에 제정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난파음악상에는 친일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입김이 묻어 있다. 이 상은 박정희의 후원을 받은 상이다. 이런 사실은 1968년 4월 1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박 대통령 내외분은 지난 11일 난파기념사업회 윤석중 이사장과 미망인 이대형 여사를 청와대에 초치, 난파상(像) 건립을 치하하고 고 홍난파 선생의 거룩한 뜻을 후진들에게 계승하는 난파음악상 기금에 금일봉을 전달했다."
난파음악상을 수상한 음악가들은 한국 음악계를 이끄는 이들이다. 그런 음악가들에게 홍난파를 기념하는 상이 주어지고 여기에 박정희 정권의 지원까지 제공됐다. 이는 한국 음악인들과 음악계를 오염시키는 일이나 다름없다.
한국 음악계를 이끄는 훌륭한 음악가들에게 난파음악상 같은 상이 수여됐다는 것은, 해방 70년을 넘도록 친일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와 한국 음악계의 처량한 현실을 보여주는 일이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란 가사가 떠오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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