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61643


대구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일제 잔재

[대구 완전 학습] '달성 공원'이 아니라 '달성 토성'이다

19.08.15 11:20 l 최종 업데이트 19.08.15 11:20 l 글: 정만진(daeguedu) 편집: 이주영(imjuice)


▲  달성토성이 해자를 낀 절벽을 활용하여 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풍경. 사진의 건물은 경상감영 정문이었던 관풍루로, 친일파 박중양이 1906~1907년 대구읍성을 파괴한 이후 이곳으로 옮겨졌다. ⓒ 정만진


대구 달성토성은 서울 풍납토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고대 토성 축성술을 증언해주는 2대 유적이다. 축성 연대가 서기 261년(신라 첨해왕 15)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달성토성은 국가 사적 62호로 지정된 중요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곳이 대단한 역사유적이라는 점을 별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름까지 바꿔서 알고 있다. '달성토성'을 '달성공원'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달성토성은 신라 때부터 조선 초까지 1100년 이상 줄곧 대구의 관아였다. 그만큼 달성토성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대구의 핵심 공간이었다. 그래서 1390년(고려 공양왕 2)에는 토성 위에 석축이 추가됐고, 임진왜란 전후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기도 했다.


신라 이래 조선 초까지 대구 관아였던 달성토성


달성토성의 경상감영 건물은 정유재란 중인 1597년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달성토성에서 진행된 일본의 행패는 이 일만이 아니었다. 1894년에는 동학 진압을 구실로 일본군이 달성토성 안에 주둔했다. 외국 군대, 주로 왜구나 일본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우리가 쌓은 국가 사적 군사시설이 날마다 저들의 군화 아래 짓밟힌 것이다.


일본은 1905년에 이르러 드디어 달성토성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우리 겨레의 역사의식을 말살하기 위한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1700년 이상 국방 요지 역할을 해온 유서 깊은 군사시설을 오락을 위한 공원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조선인들을 몰역사적 존재로 만들려는 정치적 음모였다.

 

▲  이등박문과 순종이 나란히 일본산 향나무 두 그루를 기념식수하였는데, 달성공원 한복판에 있는 이 두 그루 일본산 향나무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 정만진

 

달성토성을 달성공원으로 만든 일제는 그 이듬해인 1906년 공원 한복판에 요배전을 세웠다. 일본 국왕이 있는 동경을 바라보며 절을 올리는 공간을 공식적으로 건립했던 것이다. 왜적을 방어하고 격퇴하기 위해 축성한 달성토성 중심부에 일본 왕을 경배하는 시설이 들어섰으니, 이는 나라가 사실상 멸망했음을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1909년 1월 12일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끌려 요배전 앞에서 열린 기생 공연을 관람했다.


1910년 결국 국망의 치욕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그로부터 4년 지난 1914년 일제는 달성공원 중심부 요배전 자리에 신사를 세웠다. 대구신사는 서울 남산 신사에 이어 전국 2위 크기의 규모로 지어졌다. 대구와 경북 사람들은 강제로 이곳 신사로 불려나가 참배를 해야 했다.

 

▲  1910년대 최고의 무장 항일결사 광복회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토성에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현재 달성"공원" 안에는 그 사실을 말해주는 안내판 하나 없다. 이곳에서 광복회가 결성된 일을 기념하는 행사도 한 번 없었다. 사진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가 2018년 8월 25일 사상 처음으로 광복회 결성 103주년 기념식을 달성공원 신사터 앞에서 개최하고 있는 광경이다. ⓒ 정만진

 

대구신사가 지어지고 1년여 시간이 경과한 1915년 8월 25일 전국의 청년들이 달성토성을 찾았다. 그들은 달성'공원'이 아니라 달성'토성'에 모였다.


대구의 우재룡, 경주의 박상진, 경북 고령의 김재열, 영주의 채기중, 청송의 권영만, 강원도 삼척의 김동호, 황해도 해주의 이관구, 충남 예산의 김한종, 전남 보성의 이병호 등 독립운동에 목숨을 내놓기로 결의한 의열 청년 200여 명이었다. 청년 지사들은 이날 "1910년대 항일 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제6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내용) 광복회를 결성했다.


광복회가 결성된 독립운동 성지


그러나 달성'공원' 안에는 이곳이 광복회 결성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광복회 기념관은 고사하고 안내판 하나 없다. 광복회 결성 기념 행사가 전무했던 것도 물론이다.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가 2018년 8월 25일 개최한 '광복회 결성 103주년 기념식'이 최초로 마련된 기념 행사였다. 

 

▲  신사가 설치되어 있는 달성공원의 모습(정인열 "대구독립운동사" 수록 사진을 재촬영하여 사용함). 서울 남산의 신사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컸던 신사로 알려지고 있다. ⓒ 정인열


해방 후인 1946년 신사의 내부가 철거됐다. 건물은 철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신사 안에 단군을 모셨다. 일본 신사 건물 안에 단군을 모실 만큼 우리의 역사의식은 죽어 있었다. 이 일은 달성'토성'을 달성'공원'으로 바꿔버린 일제의 음모가 결과적으로 성공하였음을 증언해주는 사건이라 할 만하다.


대구신사 건물은 나라가 독립을 되찾은 지 20년도 더 지난 1966년에야 철거됐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정부는 1969년 달성공원을 현대화해 더 크게 재개원했다. 달성토성을 달성공원으로 만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더욱 강화하고 말았다. 게다가 1970년에는 달성토성을 동물원으로까지 만들어버렸다. 

 

▲  달성토성의 훼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들 (위) 국가 사적지 안에 테니스장을 설치해 두었다. (가운데) 국가 사적지 안에 동물원을 설치해 두었다. (아래) 정문 앞에 순종 동상을 세워 두었다. 순종은 1909년 1월 12일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달성"공원"을 방문했다. ⓒ 정만진


달성토성을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공원으로 유지하고, 나아가 동물원으로 만들고도 모자라 2017년 5월 11일에는 정문 앞에 거대한 순종 동상을 세웠다. 조선 황제를 부산, 청도, 마산 등지에 순회시킴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억누르고, 자신과 동행함으로써 조선이 일본의 손아귀 안에 있음을 서양 제국에 보여주려는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계산에 협조한 순종의 언행은 전혀 일국의 황제답지 못했다. 그런데도 거대한 황금빛 동상은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지부장 오홍석) 등 많은 시민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세워졌다.


달성토성 회복을 위한 다섯 가지 조치


딜성'공원'은 대구에서 없어져야 할 최고의 일재 잔재이다. 성벽 아래를 흐르던 해자를 복원하는 등 적극적인 토성 복구가 어렵다면 최소한 이름만이라도 달성'토성'으로 되돌려야 한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때 달성'공원'이 아니라 달성'토성'에 간다는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달성토성에 가면서 계속 달성공원에 간다고 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일제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꼴이 된다. '달성공원관리사무소'가 아니라 '달성토성관리사무소'로 바꾸는 일부터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


둘째, 달성토성 안에 무수히 식재되어 있는 일본 향나무들을 제거해야 한다. 일제 맞서 싸운 동학의 초대 교주 최제우 동상, 허위 의병대장 기념비,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선생 기념비들이 일본 향나무에 에워싸인 채 숨을 허덕이고 있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셋째, 테니스장을 없애야 한다. 국가 사적지 안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는 풍경을 보는 일은 이곳 말고 세계 어디에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넷째, 마찬가지 이유에서 동물원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다섯째, 달성토성의 역사적 의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곳이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사실을 부각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하기로는 달성토성 안의 기존 건물이나 공간을 재활용하여 광복회기념관을 개관하는 방법이다. 두류공원에 세워져 있는 우재룡 의사 기념비와 흉상을 역사적 연고가 뚜렷한 이곳으로 이전할 필요도 있고, 광복회 창립지 표지석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  달서구 두류공원에 있는 우재룡 흉상과 기념비. 우재룡은 1910년대 최고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 광복회의 지휘장을 역임한 애국지사로, 거의 20년에 육박하는 수형 생활을 했다. 그는 1915년 8월 25일 박상진 채기중 등과 함께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창립했다. ⓒ 정만진

 

대구에는, 현재 남아 있는 그대로 일제 강점기 역사를 청소년들에게 알려주기에 적합한 일제 잔재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구 봉무동 1522(팔공로 274) 뒤쪽 봉무천 개울가에 있는 일제 군사 동굴이다.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곡괭이 등으로 이곳 암벽에 10기나 되는 진지용 동굴을 팠다. 안에 대포를 숨겨 두려고 판 군사 진지였다. 현지 안내판도 '이곳은 일제 침략의 현장이 남아 있는 곳으로,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 현장'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역사교육의 현장, 봉무동 일제 군사 동굴


군사 동굴은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로 유명한 동구 도동 측백수림의 절벽에도 있다. 그냥 발딛고 서 있기도 어려운 암석 절벽에 변변한 장비도 없이 동굴을 팠을 우리의 앞세대 선배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  봉무동 일제 군사 동굴의 내부. 멀리 보이는 사람을 통해 동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 정만진


▲  봉무동 일제 군사 동굴의 내부 구조 ⓒ 정만진


대구에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일제 잔재로는 수성못도 거론할 만하다. 수성못은 원래 현 위치에 있던 작은 자연 못을 1927년에 인위적으로 확대해서 키운 인공 못이다.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은 일본인 수기임태랑(水岐林太郞, 미즈사키 린타로)이고, 공사비를 댄 곳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북도청(지금의 대구광  역시청과 경북도청) 등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수탈한 돈으로 수성못을 키웠고, 다시 우리나라 농부들에게 물 사용료를 징수했다. 따라서 수성못은 단순히 뱃놀이만 즐겨서는 안 되는 일제 강점기 수탈의 현장이다. 시민들이 수성못에 서린 아픈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적합한 안내판 등이 세워져야 한다. 그런데 못 뒤로 가면 수기임태랑을 '현창'하는 비석 등만 있다.

 

▲  수기임태랑 묘비 제막식에 참석한 주한 일본대사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본래 묘소 앞에 게시되어 있었으나 요즘은 철거되고 없다. ⓒ 정만진


그 외 대구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로는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건물, 대구문화재단이 사용 중인 대구상업학교 건물, 미8군이 쓰고 있는 남구 이천동의 일본군 80연대 주둔지 등이 있다. 그러나 봉무동 일제 군사 동굴 및 수성못과 더불어 이들은 없애버려야 할 일제 잔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건물은 없어졌지만 터만 남은 곳도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대구형무소 터(삼덕교회 기념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대구지점이 있었던 신용보증기금 대구지점 자리가 그렇게 터만 남은 대표적인 곳이다.


한 곳을 더 든다면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이다. 장진홍 의사가 1927년 10월 18일 폭탄을 터뜨렸던 곳이다. 그 의거로 장진홍 의사는 끝내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자진 순국했고, 이육사 시인 형제는 2년 가까이 고문과 투옥을 당했다. 하지만 건물은 철거되고 없고, 빈 터의 사방은 거대한 빌딩 신축을 앞두고 몇 년째 안전벽으로 봉쇄되어 있다.


다만 바라는 바는, 새로 건물이 완공돼 우리 앞에 출현할 때 장진홍 의사를 기리는 조형물 하나가 함께 나타났으면 하는 것뿐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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