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59617
"왜 수출 안 하느냐" 일본 본격 침략의 서막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1889년 방곡령을 빌미로 조선 경제를 공격한 일본
19.08.05 20:51 l 최종 업데이트 19.08.05 20:51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예지(jeor23)
▲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해주세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규탄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일본제품 불매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남소연
지금의 한일 무역분쟁과 외견상 유사한 사건이 130년 전인 1889년에도 있었다. 이때는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방곡령 사건'이 그것이다. 누가 수출을 규제했는가는 다르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공통적인 게 있다. 고압적인 쪽은 똑같이 일본이라는 점이다.
조선 멸망 21년 전인 1889년에는 세계적으로 곡물 사정이 어려웠다. 1889~1891년 기간은 1876~1879년 및 1896~1902년 기간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뭄 피해가 심했다.
아프리카 최남단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서북쪽에 나미비아가 있다. 대서양 연안에 있는 이곳은 1800년대 후반에 독일인들이 일확천금을 목표로 몰려들었던 땅이다. 1883년 이곳에서 독일인 아돌프 뤼데리츠는 16km에 달하는 해안가 땅을 영국 돈 100파운드와 총기 200정을 주고 매입했다. 이때는 헐값이라도 지불됐지만, 대가뭄이 휩쓴 뒤인 1892년에는 그나마 그런 돈도 제공되지 않았다. 길이 1600km에 달하는 해안가 땅이 무상으로 독일인들에게 넘어갔다. 약육강식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될 정도로 세계 식량사정이 안 좋았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인들도 조선에 대한 경제 침략에 박차를 가했다. 조선은 식량 및 생산 원료를 수출하도록 하고 일본은 공산품을 수출하는 분업 구조가 일본의 희망 사항이었다. 일본 경제의 이익을 위해 조선 경제를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아시아·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 때 사용하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이런 속에서 일본 기업들은 조선 식량을 헐값에 매입하는 데 주력했다. 2000년에 작고한 김옥근 전 경상대 교수의 <한국 경제사>는 "일본 상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쌀 1섬을 40~45전의 헐값으로 사서 일본 시장에서 6~8원에 팔아 10배 이상의 막대한 폭리를 취하였다"고 설명한다.
일본 기업들이 폭리를 취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같은 무역구조는 조선 백성들의 생계에 직접적 타격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소작농과 서민층의 식탁에 올라갈 쌀·콩 등의 부족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일본의 식량 약탈... 민중의 요구가 반영된 방곡령
이런 속에서 1889년 하반기 함경도에서 실시된 곡물수출 규제 조치가 바로 방곡령이다.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원산항을 통한 함경도산 콩 수출을 1년간 금지한 사건이었다.
같은 해 상반기 황해도에서도 관찰사 조병철(趙秉轍)에 의해 방곡령이 발동됐다. 조병식(趙秉式)과 형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조병식은 양주 조씨로서 조유순의 아들이고, 조병철은 풍양 조씨로서 조발영(친부 조대영)의 아들이다.
조병식의 방곡령은 조선 식량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리사욕을 위한 일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당시의 정치 평론가인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인들이 함경도에서 콩을 무역했다. 이는 외무아문의 지시로 하는 일이었다. 감사 조병식은 백성들의 굶주림을 빙자해서 항구로 빠져나가는 것을 엄금했다. 그것은 조병식이 백성들의 먹을 것을 걱정해서가 아니고, 성격이 실로 집요한 데다가 일에 어두웠고 또 일본인의 뇌물을 낚아보기 위해서였다."
함경도 백성들의 먹거리를 지키겠다는 취지로 벌인 일이지만, 일본 기업들한테 뇌물을 받을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조병식이 탐관오리로 알려져 있다 보니, 그의 방곡령이 그렇게만 비쳤던 모양이다. 조병식은 조병철과는 형제관계가 아니지만, 동학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갑과는 사촌관계였다. 조병식도 청렴한 공직자가 아니었으므로, 방곡령이 의심을 받을 만했던 것이다.
조병식의 동기는 의심 받았지만, 방곡령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정당한 조치였다. 한국사연구회가 1985년 발행한 <한국사 연구> 제50호·제51호 합본에 실린 하원호의 논문 '개항 후 방곡령 실시의 원인에 관한 연구(하)'는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잇던 도시의 빈민이나 농촌의 임노동(賃勞動) 계층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방곡령 실시 요구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말한다. '임노동'은 임금 노동의 약칭이다.
이처럼 방곡령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에 조선 민중의 요구 사항이었다. 일본인들이 식량을 수입해 가는 게 아니라 약탈해 간다고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베 신조는 경제보복의 명분을 제대로 대지 못하고 있다. 신뢰 문제 때문인 듯이 하기도 하고, 안보 문제 때문인 듯이 하기도 한다. 실상은 역사 문제 때문이지만, 그것은 정면으로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자국의 전쟁범죄가 들춰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들만 제기하고 있다.
그와 달리 1889년의 조병식은 당당히 할 말이 있었다. 탐관오리인 그의 입에서도 '우리 함경도 백성들을 위한 조치'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다. 그만큼 정당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 역시 탐관오리였으면서도 '조병갑의 사촌'으로 기억되기보다 '방곡령의 주역'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가 발포한 방곡령이 그만큼 정당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일본은 가만있지 않았다. 왜 수출을 안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조선 백성들의 식량 사정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점에는 관심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문제를 일으킬 뿐이었다.
조병식은 1883년 체결된 조일 통상장정(한일 통상장정)에 따라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중앙정부를 통해 일본 영사관에 통지했다. 그런데 일본 영사가 통지를 받은 날은 방곡령 시행 13일 전이었다. 그는 1개월 전에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방곡령 연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조병식은 예정대로 시행했고, 일본 기업들은 곡물 구입에 차질을 겪게 됐다.
일본은 이를 외교문제로 비화시켰다. 황해도 관찰사 조병철이 발포한 방곡령까지 한 데 묶어 조선 정부를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위의 <한국 경제사>는 이렇게 말한다.
"1889년과 그 다음해에 황해도와 함경도에 실시된 3건의 방곡령에 대해서 일본이 한일 통상장정 조항에 위배된다는 터무니없는 말썽을 부려 외교문제로 번져 4년 동안에 걸쳐 시비가 벌어졌다."
조선 정부는 서양식 국제법과 외교협상에 미숙했다. 또 고종이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다면서 청나라군을 불러들인 게 화근이 돼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주체적인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굴복했다. 위 인용문의 이어지는 대목이다.
"결국 일본의 비타협적인 강압적 요구로 말미암아 3건의 방곡령에 대해 조선 정부가 11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4년간이나 끌었던 양국 간의 분규가 해결되었다."
군사력 과시하며 위협... 조선 정부 압박한 일본
▲ 방곡령으로 인한 손해배상의 이행을 촉구하는 일본측 문서.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외교적 방법으로만 문제 해결을 시도한 게 아니었다. 군사적 카드가 사용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1800년대 후반 한일관계를 다룬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의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는 "일본 정부는 이 문제 처리를 위해 우익 강경파의 수령이던 오오이시 마사미를 이 사건의 전담을 위한 주한공사로 특별히 부임시켜 군사력을 과시하며 사태를 전쟁으로 몰고갔다"고 말한다. 또 "유명한 일본의 우익 강경파가 속속 서울로 몰려왔는가 하면, 정부에서도 대청(對淸) 주전파 가와가미 참모차장이 서울을 방문, 군사적 시위를 벌였다"고 말한다. '왜 수출 안 하느냐?"며 참모차장까지 파견해 위협적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외교부장관을 보내 군사정보보호협정을 폐기할 수 있을 것처럼 암시하는 선에서 그치는 데 반해, 당시의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하는 참모차장을 파견함으로써 군사행동이라도 벌일 수 있을 듯이 행동했다. 이런 속에서 조선 정부가 굴복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또 다른 경제 침략의 서막이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으며, 일본 상인들은 무력과 자본을 배경으로 하여 도처에서 횡포를 부리며, 또한 곡물유통 과정을 지배하고 생산 과정에 깊숙이 침투하였다"고 <한국 경제사>는 설명한다. '정당방위'인 방곡령을 빌미로 일본이 배상금도 받아내고 경제 침투도 심화시켰던 것이다.
당시에는 지방 차원의 방곡령이 비일비재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에 시장을 개방한 이후에는 100건 이상 발포됐고, 1876년 이전에도 동일한 일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병식이 발동한 방곡령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이 개항 23년 만인 1889년에 이 문제를 유독 강력하게 문제 삼은 배경이 있다.
1876년에 조선 시장을 개방시킨 일본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발생한 1894년에야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했다. 그전에는 조선 시장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만 확보했을 뿐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을 도와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지만, 청나라에 밀려 실패했다. 1882년 이래로 조선을 장악한 쪽은 한양 남쪽에 '용산 청군기지'를 두고 조선 문제에 간섭하는 청나라였다.
갑신정변 이후로 일본은 조선에 욕심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주력했다. 군사력을 갖추기 전까지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장악한 청나라는 물론이고, 조선에 욕심을 보이는 러시아에 대해서도 경쟁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군사력 양성에 주력한 결과, 1889년에는 상당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위의 최문형의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야욕을 버린 것처럼 가장했고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것처럼 처신했지만, 실제 내용은 전혀 달랐다. 1889년을 기해 그들의 군사력은 1885년보다 현격하게 증강되어 이미 청과의 전쟁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면, 해군력도 6개년 동안의 함선 건조 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마침으로써,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전보다는 크게 증강된 것이 사실이었다."
이 같은 군사적 자신감이 방곡령에 대한 일본의 과도한 대응을 부추기는 배경이 됐다. 청나라와 부딪혀도 지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청나라의 간섭을 받는 조선을 상대로 고강도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지금은 일본이 수출을 규제하지만, 그때는 조선이 수출을 규제했다. 그렇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위압적인 쪽은 똑같이 일본이다. 그 당시 '왜 수출 안 하느냐'며 인상을 썼던 일본이, 지금은 '수출 안 하겠다'며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다. 한국을 대하는 일본의 자세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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