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94122


토목공사 강행한 개로왕, 그 최후는 '죽음'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첫 번째 이야기

10.12.17 14:50 l 최종 업데이트 10.12.17 14:50 l 김종성(qqqkim2000)


▲  서울시 송파구 소재 풍납토성. 1-2-3을 잇는 구간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1은 천호대교 남단, 3은 올림픽대교 남단이자 서울아산병원 정문. ⓒ 네이버 항공사진


서울시 동대문에서 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직진하면, 아차산을 지나 천호대교가 나온다. 천호대교를 막 지나면, 오른쪽에 토성이 나온다. 천호대교 쪽에서 찍은 항공사진에서는 ㄴ자 모양으로 보이는 곳이다. 이곳이 바로 풍납토성이다. 한성 즉 서울에 도읍을 두고 있었을 때에 백제인들이 지은 토성이다.  


천호대교 쪽을 기준으로 할 때, 풍납토성의 끝부분은 올림픽대교 남단과 맞닿는다. 유명인들의 장례식장으로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서울아산병원도 이 토성의 끝 부분에 있다. 병원 정문의 맞은편에서 토성의 끝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풍납토성에 얽힌 흥미로운 사건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온다. 풍납토성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였다가 바로 그 장소에서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백제 임금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개로왕(재위 455~475년)이다. 지금 KBS1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근초고왕>에 나오는 근초고왕(재위 346~375년)보다 80년 뒤에 등극한 인물이다.


개로왕때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겼으니, 개로왕의 최후는 그 자신의 최후인 동시에 한성시대 백제의 최후였다. 그런 비참한 최후가 시작된 곳이 바로 풍납토성이었다. 


▲  천호대교 남단 쪽의 풍납토성. ⓒ 김종성


개로왕이 보수한 풍납토성, 정치적 무덤된 이유는?


직접 보수한 풍납토성이 개로왕의 정치적 무덤이 된 이유는, 그가 풍납토성을 둘러싼 토목공사에 국력을 탕진하다가 그 틈을 노리고 침공한 고구려 장수왕에게 참패를 당해 수도 서울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백제본기' 개로왕 편에서 개로왕의 대규모 토목사업을 확인할 수 있다. 


"나라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宮室)·누각·정자를 마련했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제방을 쌓으니, 사성(蛇城, 풍납토성) 동쪽에서 숭산(검단산) 북쪽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기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했다."


이 기록만 놓고 보더라도, 개로왕이 벌인 토목공사가 규모나 종류 면에서 꽤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나라 사람들을 모두 동원"(盡發國人)했다는 것으로 보아, 전국적으로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토성을 쌓는 것 외에, 궁실·누각·정자도 새로 마련하고 한강에서 큰 돌을 가져와 아버지의 관도 새로 만들고 강을 따라 제방도 쌓았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은 "참, 가지가지 한다!"며 "개로왕 때문에 괴로워!"라고 불평했을 것이다. 


특히 한강변 정비 사업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풍납토성 동쪽에서 검단산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다고 하니, 오늘날로 말하면 천호대교에서 미사대교(하남시와 구리시 연결) 정도까지 제방을 쌓은 모양이다. '토목공화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천호대교·미사대교·팔당대교의 위치. ⓒ 구글지도


개로왕이 토목공화국을 만든 결과는 어떠했는가?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하니, 나라의 위기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동그란 알을 층층이 쌓아놓기도 힘들지만,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모습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런 상태를 표현하는 사자성어는 누란지위(累卵之危)다. 


재정적자로 국고가 텅 빌 경우, 가장 위험해지는 것은 국방이다. 돈이 없으면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또 백성들을 대규모 공사에 자주 동원하다 보면, 막상 외국의 침공을 당했을 때에 백성들을 즉각 징발하기도 힘들어진다. 


그런 누란지위를 놓치지 않고 백제 수도 한성을 빼앗은 인물이 바로 고구려 장수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로왕 21년 9월(475.10.16~11.13)에 장수왕이 3만 군대를 이끌고 백제 수도를 포위해서 불과 7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적군을 피해 달아나던 개로왕은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군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이 고구려 장군들은 말에서 내려 개로왕에게 절한 뒤에 곧바로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서는 아차산(풍납토성 건너편, 천호대교 북단)으로 끌고 가서 죽여 버렸다.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바로 이 사건 때문이었다. 


▲  주택가 사이에 있는 풍납토성. ⓒ 김종성


개로왕이 토목사업에 매달린 이유는, 장수왕 때문?


백제 개로왕이 나라를 망치면서까지 토목사업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부추긴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장수왕이었다. 대대적인 침공 작전에 앞서서 백제를 사전에 약화시킬 목적으로 토목공사를 부추긴 것이다. 물론 장수왕이 직접 개로왕을 부추길 수는 없었다. 그럼, 어떻게 했을까?


이 과정이 <삼국사기>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고자 하면서, 그쪽에 간첩으로 갈 만한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그때 모집에 응한 사람이 도림(道琳)이라는 승려였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에게 거짓으로 백제에 망명해서 개로왕에게 속임수를 쓰라고 지시했다. 


장수왕의 지시에 따라, 도림은 백제로 떠나기 전에 거짓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고구려에서 암약하고 있는 백제 첩보원들이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대형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도림은 백제로 피신해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이렇게 해서 도림은 망명객의 신분으로 백제 고위층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도림은 '북'에서 온 거물급 망명객이었다.


도림이 개로왕에게 접근하자면, 뭔가 핑계가 있어야 했다. 도림이 수집한 정보는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바둑은 도림의 주특기였다. 도림은 자신의 실력을 한번 구경이나 해보시라면서 개로왕에게 접근했다. 


도림의 실력에 탄복한 개로왕은 그를 국수(國手)라고 떠받들면서, 도림을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개로왕이 도림을 신하가 아닌 상객(上客)으로 존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림은 드디어 비밀지령의 이행에 착수했다. 개로왕한테 받은 은혜는 너무나도 큰데 자신이 개로왕에게 해 드린 것이 너무나 적어서 마음이 괴롭다며,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개로왕이 "말을 해보라"며 재촉하자, 그제야 도림은 마지못해 하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도림의 발언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이웃나라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에서 나라를 통치하고 계신 분이라면 그에 걸맞게 위엄과 권위도 갖추셔야 하는데, 이처럼 성곽도 제대로 짓지 않고 궁실도 제대로 짓지 않고 백성들의 가옥을 홍수에 방치하고 있으니,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왕의 체면을 살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왕의 체면도 세우시고 홍수 피해도 막으셔야 하는데, 이렇게 가만히 계시니 자기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  올림픽대교 남단 쪽의 풍납토성.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서울아산병원이다. ⓒ 김종성


개로왕은 백성 괴롭힌 '괴로왕'


이 말에 자극을 받은 개로왕은 즉각적으로 대규모 토목사업에 착수했다. 앞에서 소개한 여러 가지 토목사업들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이다. 국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질 정도였다고 하니, 그가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사업을 강행했음을 알 수 있다. '북'에서 온 가짜 망명객의 꼬임에 빠져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장수왕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 침공을 위한 사전 작업이 완료된 셈이었다. 


고구려 출신의 가짜 망명객에게 속아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다가 나라를 망친 것도 모자라서,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군들에게 붙잡혀 침 뱉음을 당하다가 죽임을 당했으니, 개로왕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 수 있다. 백성들을 괴롭게 하다가 그 자신도 괴롭게 죽은 것이다. 개로왕이 아니라 '괴로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장수왕의 지령를 받아 개로왕을 부추긴 도림은 어떻게 됐을까? 개로왕이 그를 죽였을까? 물론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일 수가 없었다. 대규모 토목사업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도림이 고구려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개로왕은 "내가 간사한 놈한테 속았다!"며 괘씸해 했지만, 마냥 그러고만 있을 여유도 없었다. 도림이 간 뒤에 곧바로 장수왕이 군대를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개로왕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온 나라를 들들 볶는 통치자들이 자꾸 출현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보수한 풍납토성에서 결국 최후를 맞이한 개로왕 같은 통치자들이 자꾸 출현하면, 통치자 자신의 말로도 좋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백성들이 괴롭기 때문이다. 제2, 제3의 '괴로왕'이 자꾸 출현하는 나라는 그만큼 백성들이 괴로운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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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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