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7027
아나키즘과 선비정신에 투철했던 단재 신채호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⑦민족사관 확립
| 제282호 | 20120805 입력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이다. 피압박 민족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과 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이 같았기에 신채호에게는 한국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인 아나키즘이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쓴 신채호의 저작은 21세기에 되살아나야 할 역사학이다.
중국 여순감옥 정문. 저항적 선비인 단재 신채호는 끝내 10년의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 [사진가 권태균]
‘의열단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에 정치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국어, 국사 교육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집필자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이기 때문이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자녀가 나면 ‘일어(日語)를 국어(國語)라, 일문(日文)을 국문(國文)이라’ 하는 노예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무(誣:왜곡)하여 소전오존(素<6214>嗚尊·스사노오노미코토: 일본 고대의 삼신(三神) 중 하나)의 형제’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의 땅’이라 한 일본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半) 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라고 일제의 국어·국사 교육을 강하게 비판했다.
일제는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제정해 훈민정음의 표기법을 크게 왜곡했는데, 현행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아직도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R과 L, P와 F, B와 V를 구분할 수 없지만 세종이 편찬한 ‘훈민정음해례본(解例本)’은 이를 모두 구분해서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아직껏 일제 식민언어학자들이 만든 ‘언문철자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1916년에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이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식민사학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고대사의 경우 단군 조선을 부인하는 한편 한(漢)나라의 식민통치기구였다는 한사군(漢四郡:낙랑·진번·임둔·현도)의 위치를 한강 이북이라고 강변했다. 또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일본의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고 주장해 남북 모두를 식민지라고 창작했다.
그런데 석주 이상룡(李相龍)이 1911년 2월 만주로 망명하면서 쓴 기행문 ‘서사록(西徙錄)’에는 수서(隋書)를 인용해 ‘한사군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수서 양제(煬帝) 본기에는 수(隋) 양제가 113만 대군을 24군으로 나누어 현 북경 지역인 탁군(<6DBF>郡)에서 평양까지 오가면서 각 군의 진군로를 명령하는데 그 진군로에 낙랑·현도·조선·요동 등의 지명이 있다. 이 지역들이 모두 만주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상룡뿐만 아니라 조선의 성호(星湖) 이익(李瀷)도 ‘조선사군(朝鮮四郡)’에서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강 이북 지역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제 식민사학의 중국판 버전에 불과하며 아직도 이를 추종하는 국내 식민사학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에 불과하다.
사학자 신채호가 1928년 5월 아나키즘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조선일보 신영우(申榮雨) 기자가 “오랫동안 끊어졌던 그의 소식이 의외의 사실로 나타나자 일세(一世)의 경악과 흥미가 크고 많았다”고 말한 대로 국내는 크게 놀랐다. 신채호는 1927년 9월 광동(廣東)의 중국인 아나키스트 진건(秦健)의 발의로 결성된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에 한국 대표로 가담했다. 한국·중국·일본·대만·인도·안남(安南:베트남)의 6개국 대표 120여 명이 모여 결성한 이 조직은 A동방연맹이라고 약칭되는데 신채호는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 대만 기륭항, 신채호는 외국위체를 찾으러 갔다가 수상서에 체포되어 대련으로 압송되었다. 2 수인 모습의 신채호. 눈빛이 형형하다.
북경우편관리국 외국위체계(外國爲替係)에 근무하는 대만인 아나키스트 임병문(林炳文)은 외국위체 200장을 위조 인쇄해 북경우편관리국을 통해 일본·대만·조선·만주 등 32개소의 우편국에 유치위체(留置爲替)로 발송했다. A동방연맹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인데 총 6만4000원에 달하는 이 거금을 찾기 위해 신채호는 대만, 임병문은 조선과 만주, 이필현은 일본지역으로 향했다. 임병문은 1928년 4월 25일 만주의 대련(大連)은행에서 위체 2000원을 가명으로 찾아서 북경의 이필현에게 부치는 데 성공했다. 고무된 임병문은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모지(門司)를 거쳐 고베(神戶)의 일본은행에서 2000원을 더 찾으려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유병택(柳炳澤)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신채호도 일본 모지(門司)를 거쳐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基隆港)에 도착했으나 수상서원(水上署員)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신채호는 1929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유가증권위조행사, 사기 등의 혐의로 대련지방법원에 서는데, 재판장 아즈미(安住)가 “무엇에 쓰려고 한 짓인가?”라고 묻자 “동방연맹 자금으로 쓰되 우선 주의(主義) 선전잡지를 발간하여 동지를 규합코자 한 것”이라고 답했다. “사기(詐欺)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나?”라고 묻자 “우리 ○○가 ○○를 ○○하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양심에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소(동아일보 1929년 2월 12일)”라고 대답했다. 총독부가 삭제한 부분은 “우리 겨레가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또는 “우리 민중이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라는 등의 말일 것이다. 신채호는 동방연맹에는 ‘이필현의 소개로 가입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임병문의 소개로 가입했다고 대답했다. 임병문이 체포된 지 넉 달 만에 옥사(獄死)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임병문은 이때 죽지 않고 석방되어 1931년 5월까지 살았다는 그의 아들인 대만 작가 임해음(林海音)의 연보가 발견되어 의문이 생기고 있다(최옥산, 문학자 단재 신채호론). 재판장이 “동방연맹에는 대정(大正) 14년(1926)경에 입회하였으며 그때 이필현과 안 일이 있는가?”라고 묻자 “일본 연대를 써보지 못하여 대정 몇 년이란 것은 모르며 어쨌든지 지금부터 3년 전 여름에 입회하였노라”고 답했다.
일제의 모든 정체(政體)를 부정하기 때문에 대정(大正) 운운하는 일본 연호를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재판장이 동방연맹의 목적에 대해서 묻자 “무정부주의로 동방의 기성 국체를 변혁하여 다 같은 자유로서 잘 살자는 것이요”라고 답했다. 그는 1930년 5월 수감 2년 만에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채호가 미결수 신분이던 1928년 11월 조선일보 기자 이관용(李灌鎔)은 대련경찰서 마키다(牧田) 경무주임의 소개로 신채호를 면회했다. 이때 신채호는 이관용에게 HG 웰스의 일본어판 세계문화사와 일문(日文)을 설명한 에스페란토 문전(文典)을 부탁하면서, “그밖에는 윤백호집(尹白湖集)을 육당(六堂)에게 말하였는데 어찌 되었는지…”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 주자학자들에게 이단으로 몰려 사형당한 북벌론자 백호 윤휴의 문집을 육당 최남선에게 부탁했는데 소식이 없다는 뜻이다. 주자학에 반기를 들었던 백호 윤휴 문집을 감옥에서 찾은 신채호는 한국 사상사에 나타나는 저항적 선비정신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조선일보 신영우 기자는 1932년 12월에 여순(旅順)감옥에서 신채호를 면회하면서, “옥중에서 다소 책자(冊子)를 보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신채호는 “될 수 있는 대로 책을 봅니다. 노역에 종사하여서 시간은 없지만 한 10분씩 쉬는 동안에 될 수 있는 대로 귀중한 시간을 그대로 보내기 아까워서 조금씩이라도 책 보는 데 힘씁니다”라고 답했다. 식민사학자들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총독부의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자국사 왜곡에 열중할 때 신채호는 감옥에서 노역 도중 틈틈이 자국사를 연구했다. 신채호는 안재홍의 주선으로 1931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연재했다. 당시 국내 신문들은 1면 상단에 대정(大正:1912~25), 소화(昭和:1926~) 등의 일본 연호를 표기했는데 신채호는 일본 연호를 사용하는 신문에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 원고료는 부인 박자혜(朴慈惠)와 차남 신두범(申斗凡)의 요긴한 생활비가 되었다.
신영우가 “건강이 앞으로 8년을 계속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이대로만 간다면 8년의 고역(苦役)은 능히 견디어 가겠다고 자신합니다”라고 답했지만 체포 당시(1928) 만 마흔여덟으로 병약했던 신채호에게 살을 에는 만주 추위를 이겨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영우에게 “조선 사색당쟁사(四色黨爭史)와 육가야사(六伽倻史)만은 조선에서 내가 아니면 능히 정확한 저작을 못하리라고 믿고 있다”면서 출소 후 이런 책을 쓰겠다던 신채호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국어학자 이윤재는 1936년 4월 조광(朝光)지에 ‘북경시대의 단재’라는 회상기를 싣는데 북경에서 신채호가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疆域考), 인물고(人物考)’라는 다섯 권짜리 저작을 보여주었다면서 “그 원고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그 원고가 아쉽기는 동북공정이 기승을 부리고, 아직도 식민사학이 건재한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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