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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4] 학익진(鶴翼陣)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입력 2016-05-02 09:29 승인 2016.05.02 09:29 호수 1148 49면 


- 응용은 기본과 교과서에 철저할 때 가능

- 진법(陣法)과 진도(陣圖)에도 조예 깊었던 장군


유엽전 화살촉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 소장)


두뇌가 기억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몸이 기억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이다. 몸이 했던 일은 손을 놓은 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자동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머리를 쓰든 몸을 쓰든 결론은 반복된 숙달이 최고라는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군인 이순신이 활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쉴 새 없는 자기 단련


▲ 1592년 2월 28일. 흐렸으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 1592년 3월 1일. 망궐례를 했다. 식사를 한 뒤, 별군(別軍)과 정병(正兵)을 점검했다. 복무가 끝난 군사들은 점검하고 돌려보냈다. 공무를 처리한 뒤, 훈련용 화살 10순을 쏘았다.


《난중일기》에서는 “활을 쏘았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그 원문 표현은 대부분 “사후(射帿)”이다. 활과 화살의 종류도 많다. 어떤 활로 어떤 화살을 쏘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명확히 어떤 화살을 쏘았는지 명기한 경우도 있다. 장전(長箭)·편전(片箭)·육량전(六兩箭) 같은 경우다. 예전의 《난중일기》 번역본들에서는 대부분 일기 원문의 ‘장편전(長片箭)’을 하나의 화살로 보았지만, 전 해군사관학교 최두환 교수가 장전과 편전으로 구분해 번역한 이후 지금은 장전과 편전으로 각각 구분해 번역하고 있다. 실제로 오희문의 1593년 12월 6일 일기에서도 장전이 별도로 언급된다.


임선빈 등이 저술한 《조선 전기 무과 전시의 고증 연구》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 사용된 화살의 종류로는 목전, 철전, 예전, 편전, 대우전, 세전, 유엽전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 중 목전을 제외하고 고려시대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난중일기》에 언급된 장전(長箭)은 철전(鐵箭)의 한 종류로 무게는 1냥부터 1냥 5·6돈까지 있고, 전투용이다.


편전(片箭)은 조선시대 화살 중에서 짧아 ‘아기살·애기살’로 부른다. 일반적인 화살과 달리 ‘통(筒)·통아(筒兒)·시도(矢道)’라고 불리는 대롱 속에 넣고 쏘았다. 그 때문에 명중률과 관통력이 뛰어났다.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 때 ‘통사(筒射)’가 그 유래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이성계가 편전을 쏘아 야인들을 격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편전의 위력 때문에 비밀무기로 취급되기도 했다.


필자 같은 경우, 일기에서 특정한 화살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는 “활을 쏘았다”는 원문을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활쏘기 훈련을 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살은 유엽전이다. 화살촉이 버들잎 모양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전투용 화살과 달리 화살 끝이 날카롭지 않아 수십 수백 번을 사용했다. 그림 속의 화살이 바로 훈련용 화살인 유엽전이다. 끝을 자세히 보면 전투용 화살과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월 1일 일기 속의 별군(別軍)과 정병(正兵)은 조선시대 군사제도와 관련된 용어이다. 별군(別軍)은 태종 4년(1404년)에 함경도 출신 군사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사조직이다. 군기시에 소속되어 화포를 주특기로 하는 부대였다가 1445년 화포 부대인 총통위가 생겨나면서 잡역에 동원되는 부대가 되었다.


정병(正兵)은 조선의 정규군이다. 일반 양인으로 의무복무병이다. 각 지역에서 서울로 상경해 일정기간 근무하는 번상정병과 출신 지역의 군대에서 근무하는 유방정병으로 구분된다. 번상정병은 성종 3년(1472년)의 기록에 따르면 4만 2500명이었다. 정병은 8교대로 2개월씩 서울로 상경해 근무하거나, 지방의 여러 진(鎭)에서 4교대로 1개월씩 근무했다. 일기 속의 “복무가 끝난 군사”는 바로 교대근무를 마친 군사를 말한다.


조선시대 군역은 오늘날의 군역과 달리 60세까지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군대도 부실해졌다. 오늘날도 군대를 갖다 온 사람들은 예비군 훈련에 바쁘다. 나라를 지켰던 사람,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는 여전히 부족하다. 게다가 목숨을 잃고 다친 사람들에 대한 처우도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도 멀다. 국가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목숨을 걸고 나라와 가족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전공에 최선


▲ 1592년 2월 29일. 맑았으나, 큰 바람이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다. “순천 부사를 중위장으로 바꾸어 정했다”고 했다. 한숨이 났다.


《난중일기》에는 조선의 제도와 문화가 들어 있다. 그 때문에 오늘날과 다른 다양한 용어들이 나온다. 이 날 일기 속의 ‘공문’의 원문은 ‘관(關)’이다.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공문으로 번역했지만, 실제로는 그 시대의 제도가 담긴 말이다.


‘관’은 같은 급의 관청 상호 간 혹은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공문을 보낼 때 쓰는 표현이다. 상급자인 순찰사 이광이 하급자인 이순신에게 공문을 보냈기에 ‘관’이라고 쓴 것이다. 하급관청에서 상급관청으로 공문을 올리는 경우는 ‘첩정(牒呈)’이라고 했다. 일기 속의 공문서를 뜻하는 글자 한 자에도 그 시대의 제도가  담겨 있다.


중위장(中衛將)은 군사제도 용어이다. 문종 때 조선 군대의 틀이 갖춰졌다. 국가 전체 혹은 지방의 각급 부대 시스템을 ‘오위(五衛)’로 조직했다. 국가 전체의 오위는 전위(前衛, 전라도 관할), 후위(後衛, 함경도 관할), 중위(中衛, 경기·충청·강원·황해 관할), 좌위(左衛, 경상도 관할), 우위(右衛, 평안도 관할)로 구성했다. 전위인 전라도의 경우도 《경국대전》에 따르면 하부조직을 다시 5부로 나누었다. 서울 남부 및 전라도 전주 지역의 군사는 중부, 순천 지역은 좌부, 나주 지역은 우부, 장흥·제주 지역은 전부, 남원 지역은 후부가 된다. 이에 따르면, 순천 부사 권준은 좌부에 소속되어야 한다.


이순신이 한숨을 쉰 것은 이순신과 함께 해전을 준비해야 할 순천 부사 권준이 육군 중위장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권준은 이순신의 1차 출전 때에 이순신과 함께하지 못했고, 2차 출전 때부터 이순신과 함께 맹활약을 했다. 조선의 5위제는 조선시대의 진법, 즉 전투시의 전투 대형과도 관계 있다. 한산대첩의 신화 속에 언제나 언급되는 학익진(鶴翼陣)이 바로 그런 전투 대형의 하나다. 학익진은 이순신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학익진은 문종이 직접 저술한 《신진법(新陣法)》에 처음 등장한다. 부산해전에서 활용한 장사진(長蛇陣)도 마찬가지다.


이순신이 상황에 맞게 학익진과 장사진을 펼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병법은 물론이고, 진법(陣法)과 진도(陣圖)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그의 일화에도 진법을 설명하고, 진도를 능숙하게 그려내는 모습이 나온다. 장수 이순신이 일기를 쓰고, 시를 썼지만 그는 군인이었다. 그는 최고의 군인이 되기 위해 수많은 병법서와 전쟁사를 읽었다.


손자병법이나 기타 중국의 병법은 물론이고, 조선의 특징에 맞게 개발된 문종의 신진법에도 아주 능수능란했다. 많은 사람들이 최고가 되길 원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갈고 닦아야 한다. 그 방법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당장 해야 할 일에 대한 기본을 갖추는 것, 원론과 교과서를 읽고 사색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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