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77357
'여기선 뒈져도 아무도 모른다'... 억울함 안고 사망한 중령
[낮은 자를 위한 지혜, 유현석공익소송기금⑥] 고창표 간첩조작 재심 및 국가배상청구 사건
19.10.16 19:43 l 최종 업데이트 19.10.16 19:43 l 강래혁(chrc)
"법은 가진 자의 무기가 아니라 낮은 자를 위한 지혜가 되어야 한다."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 약자들의 벗으로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고 유현석 변호사님의 생전 말씀입니다. 유 변호사님은 70년대 남민전 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2009년 5월 유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연재를 통해 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소송이 우리 사회에 남긴 변화를 되짚고자 합니다. [기자 말]
여기, 지금은 세상에 없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남해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군에 남아 20년 넘게 군 복무를 했다. 군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요직인 육군본부 인사장교가 되었고 이후 중령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 새로운 삶을 준비하던 그는 1983년 겨울 이른 아침 집에 들이닥친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어 남산에 있는 안기부 고문실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50일 넘게 영장 없이 구속된 상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남산에 끌려간 첫날부터 고문을 당했는데, 안기부 수사관들은 "차라리 죽여달라"면서 매달리는 그를 기절할 때까지 폭행했다.
▲ 안기부의 남산 본관이 있던 곳으로 1층부터 6층까지 대부분 행정기능을 하는 사무실이었다. 현재는 청소년 숙박시설로 이용된다. ⓒ 오마이뉴스 강민수
고문이 만든 간첩
그는 재심 공판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매일 안기부 지하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안기부 조사관들은 내가 진술을 거부하거나 조사관들이 만들어 놓은 내용에 따라 작성하는 것을 거부하면 군에서 사용하는 야전침대봉으로 구타하거나 배를 찔렀고, 입은 옷을 모두 벗긴 채 여러 명이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거나 무릎을 꿇으라고 한 다음 그 사이에 각목을 집어놓고 허벅지를 밟았으며, 뒤에서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는 등 폭행 및 가혹행위를 하였다."
"(안기부 조사관들이) '이곳은 대통령님 외에 외부인 출입이 불가하다. 여기서는 뒈져도 아무도 모른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공범으로 지목되어 그와 같이 불법 구금되었던 초등학교 교사와 다른 사람들도 모두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몽둥이로 초등학교 교사의 낭심을 때렸고, 공범으로 지목된 20대 청년은 구금된 지 며칠 만에 고막이 터져서 청력을 상실했다.
그의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그는 사돈인 재일교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북한공작원에게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의 수 등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자 예비역 중령이었던 그는 안기부가 조작한 재일동포간첩단 사건의 주범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간첩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결국 안기부 수사관들이 불러주는 대로 자백서를 작성해야 했다. 그가 자백을 하지 않자 안기부 수사관들은 그에게 "니놈의 자식을 데리고 와서 자식놈을 고문할까, 아니면 니가 고문 당하는 것을 자식놈에게 보여줄까"라고 협박했다. 그에게는 어린 딸들이 있었다. 그는 '반드시 살아나가야 한다, 여기서 죽으면 내 새끼들이 모두 간첩의 자식이 된다, 검사를 만나서 내가 당한 일을 알려주고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 1984년 2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화면 갈무리) ⓒ 경향신문
'다시 안기부에 내려보내겠다'는 검사
검사를 만난 그는 "내가 안기부에서 작성한 자백서는 고문을 당해 작성한 것으로 모두 거짓이다,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검찰과 법원이 억울함을 밝혀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검사는 "간첩새끼야, 한번만 더 헛소리를 하면 다시 안기부에 내려보내겠다"고 그를 협박했고 그가 안기부에서 자백한 내용 그대로 피의자신문을 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검사실에 있던 젊은 여자가 그가 안기부에서 진술한 것을 그대로 타이핑했고, 그 종이에 그가 서명을 한 뒤 조사가 끝났다고 했다. 그는 안기부에서 50일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가지고 있던 희망을 그때 모두 버렸다고 했다. 당시 그가 수감되어 있던 서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는 난방이 되지 않았고, 그가 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갔을 때 그의 얼굴 한쪽은 고문을 받아 생긴 상처에 피가 엉겨 붙어 누더기처럼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심각한 고문을 당한 상태였고, 법정에서 변호인들이 그가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1심부터 대법원까지 1년여간 재판을 받는 동안 재판에 관여한 판사들 중 누구도 그에게 고문 당했는지 묻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판사들은 그에 대한 체포영장이 없었고, 그가 구속된 날과 구속영장이 발부된 날이 전혀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불법구금에 대해서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그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잠입한 간첩이라면서 그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고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그는 1993년 5월 27일 가석방으로 출소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생활 중 3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재판을 받는 동안 그의 아내는 충격을 받아 뇌출혈로 쓰러졌고, 자식들은 간첩의 자식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신문과 방송에서 재일동포간첩단 사건이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그의 사진이 매일같이 신문과 방송에 나와서 가족들은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출소한 뒤에도 그는 보안관찰법으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2009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을 결정하기까지 그는 재일동포간첩단이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에도 불구하고 법원, 검찰, 국가정보원 누구도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재심을 청구했고, 2012년 11월 29일 마침내 대법원은 그가 불법구금되어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았고, 안기부 수사관들의 위와 같은 행위는 형법 제124조(불법체포, 불법감금)를 위반한 것이고 그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실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 "자유 평등 정의"가 새겨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그러나 고창표에게 이러한 가치들은 허상에 불과했다. 재심으로 무죄를 받아냈지만 누구 하나 사과하지 않았다. ⓒ 권우성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재심 재판을 받는 동안 그를 고문했던 안기부 수사관들을 증인신청했지만 그중 단 한 명도 증인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다시 안기부에 내려보내겠다"고 그를 협박한 검사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그를 재판했던 판사들은 모두 고위직으로 승진했다. 1983년 겨울 불법구금된 지 2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후에도 법원, 검찰, 국가정보원 누구도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그의 피해를 배상해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재판 끝에 피해배상을 받았다. 필자는 그의 변호인으로 3년 동안 그의 무죄를 밝히기 위한 재심소송과 피해배상을 받기 위한 소송을 담당했다. 30년 전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찾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그와 같이 수감되었던 피해자들을 찾아서 대구, 부산 등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길고 긴 소송 끝에 무죄가 확정되었을 때에도 그는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재판이 끝나고 소감을 묻자 그는 "오랫동안 나 때문에 고생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나는 그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그는 죽기 전까지 사과를 받지 못했다. 19살 어린 나이에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평생 군인으로 살았던 그는 예비역 육군 중령 고창표다.
지금 나는 1983년 고창표와 같이 재일동포간첩단 사건으로 안기부에서 고문을 당해 며칠 만에 고막이 터져 청력을 상실한 청년을 변호하고 있다. 청년은 이제 손녀, 손자가 있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얼마 전 법원은 할아버지가 된 청년이 제기한 소송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이 할아버지를 고문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판결을 선고했다.
30여 년 전 같은 사건으로 고문을 당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세상을 떴고 또 한 사람은 시효가 지났다고 배상도 받지 못한다.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던 이들은 승승장구했고 여전히 사과하지 않았다.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유사한 잘못은 되풀이된다. 조작간첩 사건 재심의 물꼬를 튼 인혁당 사건의 재심청구서 결론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권력이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우리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다면 유사한 잘못이 되풀이되는 것도 막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유산을 청산하지 못하는 이상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부당한 공권력이 사법절차를 이용하여 인간의 존엄한 생명을 박탈한 비인도적이고 반민주적인 역사를 참회하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해야 할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가 다시는 이런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당연히 수행하여야 할 역사적인 의무이기도 합니다."
[기획 / 낮은 자를 위한 지혜, 유현석공익소송기금]
① 브래지어 강제로 벗으라는 경찰들, 속셈은 따로 있었다 (http://omn.kr/1j3li)
② '임신한 아내' 진료기록 가져간 경찰, 어이없다 (http://omn.kr/1jfg8)
③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정, '성기 성형수술' 꼭 필요한가 (http://omn.kr/1ji47)
④ '25분 기자회견' 진행하고 전과자 된 대학생 (http://omn.kr/1jvrd)
⑤ 강제이발 거부하자 징벌... 팀장님의 황당한 '지시' (http://omn.kr/1k2xu)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강래혁 변호사(법무법인 한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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