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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46] 명량해전과 숨은 영웅들
《난중일기》 백성과 영화 속의 백성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ilyo@ilyoseoul.co.kr [1060호] 승인 2014.08.25 11:21:48
임진왜란 진짜 주인공은 피난민
영화 <명량>의 주인공은 이순신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감독이 의도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순신 이외의 승리의 주역을 찾아낼 수 있다. 무명(無名)의 수군들과 백성들이 그 주인공이다.
영화 대사 속에서도 주인공들이 이순신에 의해 언급되거나, 스스로 주인공임을 드러냈다. 아들 회가 “이겨도 임금은 아버지를 버릴 텐데 왜 싸우시는 겁니까?”라고 했을 때 이순신은 "의리(義理)다.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쫓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라고 했다. 이순신도 진짜 역사의 주인공을 ‘백성’이라 생각한 것이다.
전투가 끝난 뒤 한 노젓는 군사가 “나중에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한 걸 알까 모르겠네”라고 했을 때, 다른 한 군사가 “모르면 호로새끼지”라고 한 것에서도 진짜 승리의 주역이 자신들, 이름 없는 군사들이었음을 주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전투 막바지에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순신의 전선(戰船)을 백성들이 끌어내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명량해전에서 백성들은 어땠을까? 영화처럼 이순신의 전선을 구했을까? 산 위에서 응원했을까?
노인들, 음식·음료수 바쳐
명량해전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이순신 자신이 남긴 《난중일기》이다. 이순신과 백성들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들도 나온다. 일기 중 그와 관련된 부분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1597년 8월 6일. 맑았다. 아침을 먹고 출발해 옥과 경계에 도착했더니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뒤엉켜 가득 차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해 가고 있었다.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울부짖으며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살 길이 생겼습니다(使相再來 我等生道)"라고 말했다.
▲ 1597년 8월 9일. 맑았다. 일찍 출발해 낙안군에 도착했다. 관사와 창고의 곡식과 병기가 모두 불탔다. 관리와 고을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점심을 먹은 뒤 길을 떠나 10리 쯤 지났을 때 길가에 노인들이 줄을 서서 앞다투어 환영하고 위로하며 음식과 음료수가 든 항아리를 바쳤다. 받지 않으면 울며불며 떼를 썼다.
이순신은 4월 1일부터 시작된 120일 여일 동안의 백의종군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면서 끝냈다. 그는 그 즉시 9명의 군관과 함께 전라도 쪽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8월 6일, 원균의 패전 소식에 놀라 피난을 떠나는 백성들을 만났다. 그 때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살 길이 생겼습니다”라고 했다. 8월 9일에도 그에게 울며불며 자신들의 상황을 말했고, 노인들은 줄을 서서 환영하며 음식과 음료수를 바쳤다.
백성의 눈에는 이순신은 생명줄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이순신을 그렇게 믿었고, 젊은 백성들은 이순신의 구국의 길에 동참했다. 이순신이 백성의 생명을 지키려는 모습은 명량해전 전전날인 9월 14일 일기에도 나온다.
▲ 1597년 9월 14일. 맑았다.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 건너편에서 연기가 올랐기에 배를 보내어 실어오게 했더니, 곧 임준영이었다. 정탐한 내용을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 척 중에서 55척이 이미 어란에 들어왔다"고 했다. 또한 적에게 사로잡혔다 도망해 온 김중걸의 말을 전해 주었다. 중걸은 이달 6일, 달마의산에서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묶인 채로 왜선에 실렸는데 다행히도 임진년에 포로가 된 김해 사람을 만나, 그가 왜장에게 빌어 결박을 풀고 같은 배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왜놈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에 김해 사람이 귀에 대고 왜놈들이 모여 의논한 것을 소곤소곤 말했는데,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 쏘아 죽이고 배를 불태웠으니 아주 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합세해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 후 곧바로 경강(京江, 한강)으로 올라가자”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나 그럴 까닭도 없지 않아 곧바로 전령선(傳令船)을 보내 피난민들에게 알아듣게 타일러 급히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게 했다.
이순신은 나라의 운명을 건 전투를 앞둔 상태에서 예상 전투 장소 인근의 백성들이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지 않도록 피난 중이던 피난민들을 육지로 올라가게 했다. <명량>에서 백성들이 산 위에서 성원하던 모습이 바로 그 때문에 생겨난 장면일 것이다. 백성들은 9월 16일에 있던 명량해전을 그 산위에서 지켜보며 영화에서처럼 이순신의 수군을 힘껏 응원했을 것이다.
일기에 없는 의병의 참전
명량해전에 피난민으로 구성된 의병(義兵)이 참전했을까? 《난중일기》에는 피난민 의병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피난민들이 이순신 부대의 후방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행록》과 이순신과 동시대 사람인 이항복이 지은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가 대표적인 기록이다. 《이충무공행록》에는 명량해전 전에 백성들이 이순신의 수군에게 군량과 옷감을 제공했으며, 명량해전 때에는 “(피난민들의) 배를 시켜 먼 바다에 늘여 세워 후원하는 배처럼 보이게 해 놓고 공(이순신)이 앞으로 나가 힘써 싸웠다”고 나온다. 이항복이 남긴 글에서도 “공(이순신)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해 먼저 피난민들의 배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나 진을 치게 해 이들을 가짜 군사(疑兵, 의병)으로 삼고,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라고 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피난민들의 일부는 이순신의 당부에 따라 산위로 피난을 했고 전투를 직접 목격하면서 응원했고, 다른 일부는 피난선을 타고 이순신의 후방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이순신을 지원한 피난선의 수는 기록(《선조수정실록》, 《난중잡록》, <고통제사이공유사(이항복)>, <오익창전(서명응)> 등)차이는 있지만 최소 100척 이상이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1533~1592)의 후손 고정헌이 1799년에 간행한 《호남절의록》에는 단순히 의병(疑兵)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명량해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피난민들의 사례도 나온다. 마하수는 두 아들 성룡·위룡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고, 문대상과 김영수도 전사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감(造船監)으로 전선을 제작했던 김세호도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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