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62456


이명복도 당했다, 이명박은 다를까?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21편] 미국 시장개방, 고종과 MB의 경우

11.11.28 11:47 l 최종 업데이트 11.11.28 11:47 l 김종성(qqqkim2000)


▲  고종황제 이명복(왼쪽)은 선비들과 전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미국 시장개방을 단행했다. 하지만 미국은 결정적인 순간에 두 번씩이나 그에게 등을 돌렸다. 1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명박 대통령의 선택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 시스템/창와대


철종 14년 12월 8일(1864년 1월 16일), 조선왕조 제25대 주상(왕의 공식 명칭)인 철종이 창덕궁에서 사망했다. 그가 후계자 없이 죽었기 때문에, 종친 중에서 새로운 주상을 선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차기 주상을 선정하기 위한 전·현직 대신 회의가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조씨(추존왕 익종의 부인)의 주재 하에 창덕궁에서 열렸다. 대신들이 신임 주상을 지명해달라고 요청하자 대왕대비는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철종 14년 12월 8일자 <고종실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흥선군의 정실부인이 낳은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익종대왕의 대통을 승계하는 것으로 결정한다."(以興宣君嫡己第二子命福, 入承翼宗大王大統, 爲定矣)


흥선군 이하응의 차남인 이명복을 순조(정조의 아들)의 장남이자 제24대 헌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의 혈통으로 입양하고 그를 새로운 임금으로 지명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달리 말하면, 대왕대비는 이명복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고 그에게 왕권을 넘긴 것이다. 제26대 고종 임금, 아니 이명복 주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MB 주상이 명석하고도 대담하게 구한말의 조선을 통치했다는 점은 학술적으로 이미 상당히 밝혀진 사실이다. 그가 부인인 명성황후 민씨(민비)의 치마폭에 휘둘렸다는 것은, 민씨 일족의 권력장악을 비판하는 세력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을 선포한 뒤에는 자신의 식견과 판단에 입각해서 국가를 통치했다. 


이명복 주상은 잘한 일도 많고 못한 일도 많았다. 명석하고 대담해서 잘한 일도 많았지만, 너무 명석하고 너무 대담해서 못한 일도 많았다. 그의 '너무 명석함'과 '너무 대담함'은 대외관계 특히 한미관계에서 잘 드러났다. 


'명석·대담' 고종, 잘한 일도 못한 일도 많다


구한말의 조선이 서양열강을 무조건 배척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 상황은 좀 달랐다. 개항 이전에 관한 기록인 고종 8년 2월 21일자 <고종실록>에도 표명된 바와 같이, 서양 선박이 조선 해역에서 곤란에 처하면 얼마든지 도움을 제공하겠다는 것이 조선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런 원칙을 수차에 걸쳐 실천한 바 있다. 이 원칙은 흥선대원군 시절에도 지켜졌다.  


조선 정부가 배척한 것은 서양열강 자체가 아니라 서양열강의 무리한 시장개방 요구였다. 당시 서양열강이 동양 국가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시장개방을 요구했기에, 조선으로서는 그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익에 도움이 됐다면, 서양열강을 마다했을 이유가 전혀 없다. 프랑스와의 전쟁인 병인양요(1866)와 미국과의 전쟁인 신미양요(1871)는 시장개방에 대한 거부였지, 서양열강 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니었다. 


▲  본문에 인용된 철종 14년 12월 8일자 <고종실록>. 고종의 아명인 이명복이 언급되어 있다. ⓒ 고종실록


그런데 친정을 선포한 뒤인 1880년대 들어 이명복 주상은 이런 기조를 일거에 뒤집었다. 서양열강에게 시장을 개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가 개방을 결심한 것은 조선 산업의 경쟁력이 튼튼했기 때문이 아니다. 

외세를 조선에 끌어들인 뒤 외세 상호간의 경쟁을 유도하면 어느 한 쪽도 조선을 독점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이 독립자주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른바 '이이제이' 구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복 주상이 서양열강을 대거 끌어들이겠다고 결심한 시점은 1880년이다. 그 해에 일본을 공식 방문하고 귀국한 김홍집이 <조선책략>이란 건의서를 갖고 오면서부터였다. 


일본주재 청나라 참사관인 황준헌이 본국 정부와의 교감 속에 작성한 <조선책략>의 핵심은 '조선이 러시아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청나라·미국·일본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이제이를 권유한 것이다. <조선책략>에 담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이명복 주상에게 특히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은)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백성을 탐내지 않으며 남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다. …… 항상 약소국을 돕고 공의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국에 시장 개방하기로 결정한 고종, 반대에 부딪히다


이 책에 대한 이명복 주상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는 <조선책략>을 받은 뒤로부터 9일 뒤인 고종 17년 9월 8일(1880년 10월 11일) 대신회의를 열어 그 속에 담긴 건의를 국가전략으로 공식 채택했다. 이 전략에 따라 그는 일차적으로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이명복 주상의 구상은 곧바로 국민적 반발에 직면했다. 선비들의 파워가 가장 강력한 경상도에서부터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고종 18년 2월 26일(1801년 4월 8일) 경상도 선비 1만여 명이 올린 '영남 만인소'란 상소에서 그런 분위기가 가장 상징적으로 표출됐다. 


선비들은 "러시아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다 똑같은 오랑캐입니다", "오랑캐 종자들은 그 본성이 탐욕스러운 것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습니다"라며 이명복 주상에게 재고를 촉구했다. 그들은 미국에 대한 시장개방이 장차 몰고 올 국가적 재앙을 우려했다. 


"저들이 풍랑을 몰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나라 관료들을 괴롭히고 우리 재산을 쉴 새 없이 빼앗아 가거나, 또 저들이 우리의 허점을 엿보고 우리의 빈약함을 업신여겨서, 들어주기 어려운 청을 강요하고 감당하지 못 할 책임을 지운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  영남 만인소. ⓒ 한국독립운동사 정보 시스템


선비들이 시장개방에 반대한 것은 그들이 세계정세에 어두워서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청나라가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시장개방 때문에 서양열강에게 경제적 침탈을 당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서양열강에 대한 문호개방이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그냥 '기브'뿐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서양의 시장은 사실상 개방되지 않고 동양의 시장만 활짝 개방되었으니, 이것은 누가 봐도 '주고받기'가 아니라 그냥 '주기'에 불과했다. 


선비들을 비롯한 전 국민이 강력히 반대했지만, 이명복 주상은 청나라의 도움과 중재를 빌려 고종 19년 4월 6일(1882년 5월 22일)에 대미(對美) 시장개방을 끝내 관철시켰다. 이 날, 조선의 시장개방을 핵심 골자로 하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이 미국 쪽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조약은 미국 상인이 조선에서 치외법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이 조약으로 개방된 것은 '양국의 시장'이 아니라 '조선의 시장'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명복 주상은 이 조약이 국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조약 제1조가 장차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제1조에서는 한·미 양국 중 한쪽이 제3국의 부당한 침해를 받을 때는 다른 한쪽이 신속히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명복 주상이 국민적 반대를 무시하고 미국을 끌어들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미국에 시장을 내주더라도, 위급할 때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조선으로서는 득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미 시장개방을 반대하는 백성들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봉황의 뜻을 참새가 어찌 알랴!'


이명복 주상 '어리석었다'... 2가지 사례를 보자


하지만, 그 후의 사건 전개를 보면 이명복 주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냥 시장만 개방했을 뿐,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2가지 사례가 그 점을 입증한다. 


첫째, 미국은 "청나라를 견제해달라"는 이명복 주상의 호소를 뿌리쳤다. 1882년에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사상 최고로 극대화되었다. 거기에다가 그 직후 발발한 임오군란이 청나라의 영향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이명복 주상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를 이용해서 반군을 진압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화를 초래했다.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청나라군이 '지원군'에서 '점령군'으로 돌변한 것이다. 한성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군은 조선 정부를 압박하는 흉기가 되었다.  


조선 주재 책임자인 원세개(위안스카이)의 극심한 내정간섭이 국제적 지탄을 불러온 사실에서 잘 나타나듯이, 1882년 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자율성을 존중하던 기존 관례를 무시하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다. 학계에서는 1882~1894년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평가하고 있다. 


청나라가 갑작스레 돌변하자, 이명복 주상은 미국에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의거한 조치였다. 이명복 주상이 고종 20년 6월 5일(1883년 7월 8일)에 전권대신 민영익을 미국에 파견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민영익을 통해 미국의 힘을 끌어들여 청나라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좋게 봤던 미국은 통상조약 제1조를 가차 없이 무시했다. 조선 문제에 대한 개입을 거부한 것이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다 똑같은 오랑캐입니다"라는 경상도 선비들의 주장이 입증된 순간이었다. 


믿었던 미국이 배신하자, 이명복 주상은 이번에는 러시아로 고개를 돌렸다. 김옥균·박영효·민영익·김관선 등을 파견해서 러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한 작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물이 1884년 한·러 수호통상조약이었다. 청나라가 돌변하고 미국이 배신하니까, 청나라·미국이 싫어하는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  고종의 무덤인 홍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 ⓒ 김종성


둘째, 미국은 "일본을 막아달라"는 이명복 주상의 절규를 외면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이명복 주상은 또다시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동학 시민군으로부터 정권을 사수하자면 청나라군의 도움이라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청나라군이 조선으로 출병하자, 일본도 "방관할 수 없다"면서 임의로 군대를 파견했다. 뜻밖에도 일본군까지 몰려오자, 정부군과 시민군은 서둘러 휴전에 합의하고 외국군 철수를 요구했다. 외세를 끌어들인 장본인인 이명복 주상까지 외국군의 철수를 희망할 정도였다. 


청나라는 조선의 요구를 수용했다. 하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일본은 차제에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한판 승부를 벌이겠다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이명복 주상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읍소 작전을 벌였다. 일본의 전쟁 개시를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명복 주상은 미국에 한 번 더 기대를 걸었다. 그는 이승도 주미공사를 통해 세 차례에 걸쳐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미국은 엄정하고도 편파성 없이 중립을 유지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일본의 개전을 사실상 지지했다. 미국은 또다시 이명복 주상을 배신한 것이다. 


이명복 주상을 배신한 것은 미국만이 아니었다. 그가 이이제이를 위해 끌어들인 러시아·독일·프랑스·이탈리아는 하나같이 조선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했다.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 땅에서 벌인 이 싸움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외세를 끌어들여 외세 상호 간의 경쟁을 유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독립자주를 지키겠다는 이명복 주상의 구상은 이렇게 해서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고 백성들은 비웃었을 것이다. 


"참새가 어찌 봉황이 될 수 있으랴!"


만약 조선에 들어온 외세들보다 조선의 힘이 더 강했다면, 이명복 주상의 전략은 성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조선보다 훨씬 더 강한 나라들을 끌어들여 그들을 이용해서 조선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다. 대담하지만,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이이제이는 강자나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것은 약자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이 아니다. 


이명복 주상이 그렇게 믿었던 '선의의 나라' 미국은 결국 그를 배신했다. 그는 위급할 때 미국의 도움을 빌리고자 했지만, 결정적 순간에 두 번씩이나 미국은 등을 돌렸다. 조선은 그냥 시장만 내주었을 뿐이다. 자기 나라보다 강한 외세를 끌어들여 국가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MB의 대담하고도 어리석은 '참새 같은 발상'은 그의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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