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56662


조선시대 '의적', 왜 징표를 남겼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짝패>, 다섯 번째 이야기

11.04.25 11:55 l 최종 업데이트 11.04.26 09:55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짝패>에서 ‘아래’의 수장인 강 포수(왼쪽, 권오중 분). ⓒ MBC 


조선왕조가 썩을 대로 썩은 19세기 중반을 다루고 있는 MBC <짝패>. 이 드라마의 주인공 천둥(천정명 분)은 요즘 '아래'라는 의적 조직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 아래(我來)는 '내가 왔다' 혹은 '내가 오다'란 뜻이다. 


천둥은 양반의 아들로 출생했지만, 유모의 농간으로 거지 소굴에서 성장했다. 정작 거지 소굴에서 자랐어야 할 유모의 아들 귀동(이상윤 분)이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부지런히 공부해서 무역회사(무역상단)의 전문 CEO(행수)까지 된 천둥. 


그런 그가 '아래'에 빠진 표면적 이유는 '아래'의 수장과 조직원들이 천둥의 지인들이라는 점에 있다. 하지만, 본질적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며 살다 보니, 일찍부터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상당히 출세한 천둥이 의적 조직에 빠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짝패>의 시대적 배경인 19세기 중반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살았던 조선의 서민들도 그러했다. 그들 역시 천둥처럼 '아래'라는 의적을 실제로 동경했다. 관료 겸 화가인 장한종(1768~1815년)이 엮은 민담집 <어수신화>에 '아래'가 등장하는 사실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드라마 속의 '아래'는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이나 로빈 후드처럼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민담 속의 '아래'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개인 의적'이었다. 


의적 '아래'는 중국 송나라 때 작가인 심숙의 민담집 <해사>에 아래야(我來也)라는 이름으로 맨 처음 등장했다. <어수신화>에서는 '아래야'에서 어조사 야(也)를 뺐을 뿐이다. '아래야'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어수신화> 편찬 시점과 비슷한 1806년 일본에서 <지라이야 설화>가 간행된 사실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일본어 지라이야(自來也)는 '아래야'와 같은 뜻이다. 


'아래' 이야기 속에는 '개인 의적'의 조건에 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식이 담겨 있다.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이나 로빈 후드 같은 '단체 의적'이 아닌, '개인 의적'이 갖춰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 말이다. 


'권력층이나 부유층의 돈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의적이 되는 게 아니냐?'고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민담 속의 개인 의적으로 추앙을 받으려면,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대도나 의적으로 불리고 싶어 했던 조세형·신창원이 그런 추가적 조건을 갖추고자 했다면, 그들은 필시 '조금은 늦게' 범행현장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조금은 늦게? 무슨 뜻일까? 


▲  ‘아래’에 빠지고 있는 천둥(왼쪽, 천정명 분). ⓒ MBC


신출귀몰한 도둑, 왜 조금 늦게 현장을 빠져나왔나


<어수신화> 속의 '아래'는 신출귀몰한 도둑이다. 그를 잡아달라는 탄원서가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청(포도청) 민원실에 접수될 정도였다. 그의 행동 패턴을 보면, 그는 항상 '조금은 늦게' 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신출귀몰의 신화를 이어나갔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처럼, 그러던 그가 어쩌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한껏 고무된 경찰청장(포도대장)은 "사형까지 몰고 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유치장에 갇힌 '아래'는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치장을 지키는 경찰(포졸)을 매수했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 몇 번째 소나무 밑에 300냥을 감춰뒀으니 필요하면 갖다 쓰라고 말한 것이다. 


전남 영암 지방의 쌀값 변동을 분석한 어느 논문에 따르면, 1744~1850년 기간에 쌀 한 가마니의 최고 가격은 3냥, 최저 가격은 0.4냥이었다. 이런 사실을 보면, 300냥의 값어치를 이해할 수 있다. 포졸은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긴가민가하고 그곳에 가본 포졸. 소나무 밑에는 정말로 거액의 돈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아래'를 신뢰하게 된 그는 포도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아래'에게 죄다 알려주었다. 


얼마 후, 포졸은 '내일, 포도대장이 아래를 심판한 뒤 사형에 처할 것'이란 첩보를 입수해서 '아래'에게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아래'가 청탁을 했다. "나를 잠깐만 풀어주면, 통행금지 해제 전까지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아래'와 친한 데다가 거금까지 받은 포졸로서는 부탁을 거절할 길이 없었다. '도망갈 사람은 아니야!'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옥문을 열어주었다. 


정말로 '아래'는 새벽 4시경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포도대장의 주관으로 열린 심판에서 그는 곤장을 맞고 석방되었다. 포도대장은 그가 '아래'가 아니라고 판정을 내렸다. 흔한 잡범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아래'였다. 그렇다면, 포도대장이 풀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포도대장도 포졸처럼 뇌물을 받았을까?'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럼,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포졸의 도움으로 유치장을 잠시 빠져나온 '아래'는 그 길로 포도대장 집으로 향했다. 그 집 침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방문을 열어 보니, 포도대장 부부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 부부는 서로에 대한 열정이 식어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 사이에, 한 명이 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의적 '아래'가 항상 '조금은 늦게' 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제 제시된다. 옷을 홀딱 벗고 부부 사이에 드러누운 '아래'는 두 사람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부자리에 '我來'를 써놓고 유치장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늘 하던 대로 글씨를 남겨놓고 현장을 떠난 것이다. 그가 항상 '조금은 늦게' 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가 '아래'로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보고 깜짝 놀란 포도대장은 '아래'가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출근한 그는 "쟤는 아니야!"라며 곤장 몇 대 때리는 선에서 '아래'를 풀어주었다. 실수로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는 도로 나무로 올라갔다.  


현장에 일부러 흔적을 남기는 '아래'의 특성은...


▲  1996년 홍콩영화 <아래야>. 출처: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 바이두. ⓒ 저작권자 미확인


현장에 일부러 흔적을 남기는 '아래'의 특성은, 현대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개인 의적'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쾌걸 조로는 알파벳 Z자를 남기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일지매(一枝梅)는 한 가지(一枝)의 매화(梅)를 그려놓은 뒤 현장을 빠져나왔다. 실제로 숙종 재위기에 일지매를 자처했던 도둑도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민담 속의 일지매는 매화 그림을 현장에 남기는 여유를 부렸다. 


민담 속의 '아래' 부류가 흔적을 남기는 것은 자신의 활동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사회 전체에 경각심을 주고 서민층에게 희망을 주려면 그런 표지를 남기는 일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이나 로빈 후드 같은 단체 의적의 경우에는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는 행위 자체가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는 방법이었지만, 개인 의적의 경우에는 그런 남다른 표지를 남기지 않고는 서민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었다. 


사건현장을 신속히 빠져나가도 힘든 판국에, 그림이나 글귀를 남기는 낭만과 여유 때문에 독자들은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권력층이나 부유층의 재물을 빼앗아 서민층에게 나눠주는 행위 못지않게, 공권력을 비웃으며 "나 잡아보라"며 일부러 흔적을 남기는 행위가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것이다. 


만약 조세형·신창원 등이 개인 의적의 조건을 갖추고자 했다면 '조금은 늦게' 범행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영리한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그런 행위 자체가 서민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기에, '아래' 부류가 비록 민담 속에서나마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오늘날, '나는 잡범이 아니라 의적이 되고 싶다'며 '역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의적이 되겠다'고 결심한 청년 도둑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따르는 후배들이 없어 '개인 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필체가 좋다면 사건현장에 글귀를 남길 수도 있고, 그림에 소질이 있다면 벽에다 꽃 한 송이를 그려놓을 수도 있고, 그런 아날로그적 방식이 시시하다면 집주인의 컴퓨터를 켜고 한글 문서를 남길 수도 있고, 그마저도 시시하다면 집주인의 스마트폰에 자기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얼른 끄고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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