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에만 1만평 소유... 최고갑부는 왜 만주로?
우당 이회영을 기리는 전시·강연회... 독립운동에 모든 걸 바친 '원조 보수'
15.02.14 21:22 l 최종 업데이트 15.02.14 21:22 l 이성훈(ssal123123)
서울 중구에 위치한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리는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회가 두 달 만에 누적 관객 7천 명을 돌파했다. 주최측은 시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2월 12일부터 매주 1회, 총 3회의 특별강연을 마련했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80) 전 국정원장과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전시 기획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와 소설가 서해성씨가 강연과 진행을 맡는다. 지난 12일 오후 2시 덕수궁 강당에서 열린 1차 강연은 백발의 노인부터 20대 청년까지 70여 명 남녀노소로 붐볐다.
"저는 십여 년 전에 생일을 11월 17일로 바꿨습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생일이 아니에요. 그날은 이회영 선생이 일제의 고문을 받아 만주 뤼순감옥에서 돌아가신 날이죠. 이회영 선생을 기리고 싶다는 다짐으로 전시회를 열게 되어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독립운동에 모든 걸 바친 조선 최고의 가문
서해성 작가의 모두발언을 시작으로 강의가 시작됐다. 조선 최고의 가문, 최고의 부자였던 이회영 일가가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재산과 목숨을 바친 숭고한 여정이 후손과 연구자들의 육성으로 무겁게 울려 퍼졌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나의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이라는 주제로 첫 강연에 나섰다.
"여러분이 그 넋을 기억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집안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 하잖아요. 내 입으로 우리 할아버지 얘기를 너무 많이 하면 팔불출 소리를 들을까 봐 겁나요."
▲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80) 전 국정원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 이성훈
이종찬 전 원장은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우당이 1931년에 일본 관동군사령부를 공격하려고 다롄으로 향했으니, 이 전 원장은 할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가문 어른들과 역사연구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강연을 이끌었다.
"우당의 일생은 단지 독립운동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당은 열린 지식인이었죠. 시대에 대한 저항, 새로운 시대정신을 받아들였습니다."
1867년 태어난 우당은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명재상을 배출한 가풍을 과감히 버렸다.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동기들과 모여 신학문에 열중했다. 그때 만난 이상설은 후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모의하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한 평생 동지로 함께했다. 그들은 적서타파, 재혼장려, 노비해방 등 평등사상을 실천했다. 과부의 재혼이 금기시되던 당시, 19살에 남편을 잃은 누이동생이 딱하여 누이의 '가짜 장례식'을 치르고는 타지방에 보내 재혼 시켰다는 우당의 일화는 유명하다.
국권을 빼앗긴 직후에는 서간도로 40여 식구와 20여 노비를 데리고 독립운동을 떠났는데, 집안 노비들을 자유인으로 해방시키고는 종의 말씨를 쓰는 자를 손수 회초리로 혼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자유∙평등∙연대의 정신을 실천한 아나키스트
"우당의 저항정신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익명성이지요. 어디 기관장으로 이름 새긴 적도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우당을 이면 지도자(behind seat)라고 불렀어요. 기명을 하면 신문에 실리고, 문서가 유출되면 독립운동을 할 수 없잖아요."
우당은 영하 30도의 만주 땅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자금이 부족할 때면 국내로 잠입해 후원금을 걷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공식문서로 남긴 행적은 거의 없다. 우당은 솔선수범하고 치열했지만, 겸손했다.
탈권위적인 우당은 만주에서 북경으로 건너간 시기에 아나키스트로 탈바꿈했다. 북경 시절 우당은 자식 뻘인 아나키스트 이을규와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고, 중국의 혁명사상가 루쉰과도 교류했다.
"단체 이름에 '적'이나 '흑'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대개 아나키스트인데요. 우당은 흑도회를 조직했습니다. 아나키즘을 보통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잖아요? 그런데 이건 일본식 번역이에요. 아나키스트들은 정부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아요. 다만 중앙정부의 힘을 약화 시키고, 권력을 분산하여 토론하고 합의하자는 게 아나키즘이죠. 그래서 아나키즘은 자유연합주의로 번역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우당은 일본인 전체를 적대시한 백범과 달랐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는 배격했지만, 일본인의 선함은 믿었다. 아나키스트라면 일본인까지 조직에 받아들일 정도였다.
조선 최고 갑부가 만주에서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소금죽 한 그릇을 들이키면 다행이고, 끼니를 수시로 굶었다. 자식이며 손주들이 굶어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우당은 조카 이규서의 밀고로 체포돼 뤼순감옥에서 고문을 받다 숨졌다.
부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종이었던 독립군의 시중을 들다
3시로 예정된 첫 강의가 30분이나 늦게 끝났다. 다음 강연은 한홍구 교수가 이어 받았다. 그는 이회영 일가를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해석했다. 한 교수는 보수란 '진정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자'라고 정의했다. 그는 "우당 가문은 현재 명동 인근에 1만여 평 토지를 보유했다"며 "굳이 계량해 보자면 오늘날 2조 원은 넘는다"고 했다. 그 외에도 개성, 양주 등 전국에 소유한 토지 266만여 평과 드러나지 않은 재산의 가치를 합하면 10조 원에서 수백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우당 가문은 그 모두를 포기하고 만주로 향했다. 또 자식까지 전부 독립전쟁으로 내쫓고, 몸수색이 덜한 딸의 몸은 폭탄으로 둘렀다. 한산이씨인 부인 이은숙씨와 며느리는 한때 종이었던 독립군들의 빨래를 해주고 밥을 짓고 옷을 수선해 줬다. 당시 이회영 가문을 따라 전국에서 모인 강화학파 대부분은 예순 살이 넘었다. 지금으로 치면 여든이 넘은 노인들이 모여서 천 리 길을 떠난 것이다.
"병약한 몸으로 무엇을 할 수나 있겠습니까? 도착해 보니 다리가 동상에 걸려 '썩은 무'같이 돼 앓다가 돌아가셨지요. 조선의 대표적 소론 명가 어르신들이에요."
▲ 우당의 부인 이은숙씨가 서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을 기록한 <서간도시종기> ⓒ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위원회>
친일파 득세하며 독립운동가 후손 숙청
항일투쟁의 선두에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던 사람들이 있었다. 한 교수는 "광복 이후 진정한 보수가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자료 화면에 안중근 의사와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씨 사진을 동시에 올렸다.
"안두희는 당시 사주세력에게 '안 의사'라고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안중근, 안두희 모두 '안 의사'네요? 두 '안 의사' 중 한 명의 동생은 연대 총장을 지냈어요. 바로 안두희의 동생 말이죠. 독립운동가와 수구세력 중 해방 이후 잘 먹고 잘 산 쪽은 누구일까요?"
역사는 승자의 것이지만, 이 땅의 보수주의자들은 광복에 앞장서고도 탄압당했다. 해방 직후 친일세력이 경찰권을 휘어잡고 국회 프락치 사건, 부역자 처벌을 핑계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숙청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 한홍구 교수는 이회영 일가를 진정한 보수주의자로 해석했다. ⓒ 이성훈
해방 이후의 기득권을 분석한 자료가 화면에 떴다. 먼저 수유동 4·19국립묘지 사진이었다. 한 교수는 "4·19 혁명은 왜 미완으로 끝났을까"라며 반문한 뒤 "당시 대학교수, 지식인, 정치인은 여기에 단 한 명도 묻히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이어서 천안함 사건 당시, 정부 주요인사의 병역의무 이행 여부를 정리한 표가 게시됐다. 국방부장관을 빼고는 대통령부터 국무의원의 80%가 병역면제를 받았음이 한 눈에 보였다. 한 교수는 "진짜 보수는 만주에서 모두 죽었다"며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어떻게 반환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한 이회영 가문이야말로 DNA부터 보수"라고 말했다.
독립운동을 예술로 승화하다
오후 4시가 되자 서해성 작가는 시간의 촉박함을 아쉬워하며 '우당 이회영의 난초'를 주제로 얘기를 이어갔다. 서 작가는 초등학생 시절 떠올리던 의문을 던졌다.
"독립운동가들도 무언가 그림과 노래를 남기지 않았을까? 어른이 되고 찾아보니 그분들이 남긴 예술작품이 많더군요."
▲ 서해성 작가가 우당의 묵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 이성훈
특히 우당은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나자, 묵란 작품을 여럿 그려서 중국의 지방 부자들에게 팔았다. 그는 '난을 치되 3번을 꼬아야 한다'는 추사의 3전법을 계승했다. 그의 작품은 품격이 높아 비싸게 팔렸다고 한다.
"묵란은 중세시대 해묵은 그림일 뿐일까요? 아닙니다. 매난국죽에는 사회학적 의미가 담겼어요. 난은 '친다'고 하잖아요. 난을 친다, 근사한 말이에요. 난을 친다는 건 '칼로 적을 친다'처럼 비장한 각오가 담긴 거죠."
묵란은 뿌리 없이 그려진다. 나라를 빼앗겨 발 디딜 곳이 없다는 은유이며, 침략자가 지배하는 땅에는 의지하기 싫다는 각오다.
"묵란으로 저항을 표현한 시초는 송나라 사람 정 아무개예요. 원나라에 나라를 빼앗기자 자기 이름을 버리고, 망국한을 상징하는 난을 그렸다고 합니다. 우당의 그림은 그걸 넘어섰어요. 그림을 팔아 일제에 저항할 힘을 키웠으니 우당에 이르러 독립운동은 예술이 된 겁니다."
▲ 우당은 묵란을 팔아 일제에 저항할 힘을 길렀다. 우당에 이르러 독립운동은 예술이 된 것이다. ⓒ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위원회>
마지막으로 서 작가는 독립운동가들의 예술을 발굴하여 교과서에 담을 것을 제안했다. 광복 이후 예술계는 친일 인사들이 장악했다. 음악교과서는 친일전선보국대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만들었고 미술책은 임전보국대 근무했던 화가들이 편집했다. 미술∙음악 교과서에 독립운동의 혼을 담을 수 없던 것이다.
"우당의 난들을 후대의 미술학계가 계승했으면 합니다. 독립운동가도 아이들이 부르도록 가르쳤으면 합니다. 우당의 난초를 심으면 자랄 겁니다. 우당 이회영, 이 사람을 우리 가슴 속에 심읍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와 위키트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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