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91103.22020201849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7> 가야의 청동솥과 돼지국밥

북방 유목민과 한반도 가야인은 '코드' 가 맞았다?

초원지역 흉노에서 시작된 청동솥…신라 백제에서는 전혀 발견 안돼

철을 잘 다루고 주변교류 많았던 가야, 북방 철제무기·마구 등 도입한 듯

부산 경남에서 돼지국밥 인기있는 건 그 옛날 북방과의 교류 때문은 아닐는지…

국제신문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입력 : 2009-11-02 20:43:21 |  본지 20면


■돼지국밥과 부산


보야르암각화. 자세히 보면 가운데 놓여있는 구리솥(붉은 점선 동그라미)을 식별할 수 있다.


돼지국밥을 빼고 부산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선회 같은 바다음식이 많은 부산의 대표음식이 돼지국밥이라는 점은 타지 출신인 나에게는 언제나 미스터리였다. 어떤 사람들은 돼지국밥은 원래 밀양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원래 북한 쪽의 음식이 6·25를 기점으로 널리 확산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짭조름한 바닷내음 풍기는 곳에서 구수한 고기국밥을 즐긴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근대 이후 일본문화의 유입창구였고 6·25때에 피난민들이 모이면서 부산은 팔도 음식들의 각축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 중 유독 북쪽에서 내려온 돼지국밥만 대표음식이 되었을까. 아마도 돼지국밥은 진정한 유목민적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야는 철을 중심으로 주변지역과 다양한 교류를 하며 살던 나라였기 때문인지 북방초원의 물건을 좋아했다. 철제무기와 마구는 멀리 흉노에 연원을 두고 당시 요서지방에 자리잡고 고구려와 대적하던 모용선비계통이며 구리솥(동복), 동물장식 등도 많이 발견된다. 특히 한문으로 동복(銅)이라고 하는 구리솥은 북방 초원의 대표적인 유물로 기원전 9세기께부터 서쪽으로는 흑해 연안에서 알타이, 바이칼 등지와 북중국까지 모든 초원지역에서 널리 쓰였다.


■가야인, 초원의 청동솥을 쓰다


알타이 비스크박물관에 소장된 구리솥.


한국에서는 평양의 낙랑과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며, 서기 3세기가 되어 가야가 세력을 팽창하면서 도입되기 시작했다. 경남 가야고분에서는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2점, 양동리에서 1점이 발견되었다. 가야에서 발견된 구리솥의 먼 기원은 기원전후 북방 초원지역의 흉노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흉노 계통의 물건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요서지방의 모용선비, 고구려, 부여, 그리고 북부 중국에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한에서는 신라나 백제에서는 구리솥이 발견된 적이 없다. 단순히 북방지역 유물이라고 쓴 게 아니라 초원계 유물이 구미에 맞은 사람들만 도입한 셈이다. 가야에는 구리솥 말고도 북방초원계 유물이 많이 있으니 요즘 말로 가야사람들과 북방초원계의 유물은 '코드'가 맞았던 셈이다.


원래 구리솥은 기원전 8~3세기 초원지역에 살던 스키타이문화의 민족이 쓰던 도구다. 정착하지 않고 초원을 따라 이동하던 유목민들은 야영지에 솥을 걸어놓고 요리를 했다. 샤브샤브의 기원도 초원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구리솥에 물을 끓여서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여러 먹을거리를 한데 넣어서 먹었던 데에서 기원한다. 남부 시베리아의 유명한 암각화인 볼쇼이 보야르 암각화에는 당시 초원민족의 삶이 잘 묘사되어 있다. 초원에 사슴을 방목하고 그 가운데에는 천막들이 있다. 마을 사이사이에는 구리솥이 있고 그 주변으로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보인다. 당시 초원의 사람들이 축제를 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커다란 솥에서 모두가 먹을 음식을 끓이는 장면이다.


■구리솥, 초원 사람들의 잔치에 쓰이다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구리솥.


몽골이나 알타이 초원에 가면 비슷한 광경이 펼쳐진다. 잔치를 하면 들판에 솥을 걸어넣고 양고기를 끓인다. 손님이 오면 얼른 한 덩이 잘라서 건네주면 허리춤에 차던 칼로 쓱쓱 베어먹곤 한다. 양고기 특유의 노린내가 좋지는 않지만 손님이라고 제일 맛있는 부위를 잘라주는데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느끼한 양고기를 한입 베어 물고 뒷맛은 보드카나 쿠미스(말젖으로 짠 술)로 누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양고기가 싫다고 해도 그 정겨운 분위기에는 반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도 한 30여 년 전 시골에서 결혼식을 할 때에 마당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하객들이 올 때마다 멸치 우린 국물에 만 장터국수를 내밀던 정겨운 모습이 떠올랐다.


 

유라시아를 대표하는 그릇인 이 청동솥은 때로는 대마초를 흡입하는 도구로도 쓰였다. 헤로도투스가 기록한 스키타이인의 풍습에 따르면 부족장들이 모이면 천막 안에 모여서 천막을 닫은 다음에 동복에 빨갛게 달군 돌을 넣고 그 위로 대마씨를 뿌린다. 같이 대마연기를 흡입하고 환각상태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말초적인 쾌락을 얻기위한 마약흡입이겠지만 당시에는 각 부족 간의 결속력을 다지는 과정이었다. 같이 기분 좋은 상태가 되어서 서로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결의를 하는 도구였던 셈이다.


유목민족들은 광활한 초원에 흩어져 살기 때문에 봄과 가을에 목초지를 이동하면서 한번씩 모였다. 같은 부족이라 할 지라도 1년에 두 번만 서로 볼 뿐이니 오랜 만에 보면 저 부족은 반역의 뜻을 품고 우리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불안감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결속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인에 대한 기록을 보면 술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해서 족장들이 모이면 일단 술을 만취될 때까지 마신 다음에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취중진담이 당시에도 통했던 모양인데, 그 다음날 술이 깨서 전날에 한 말이 진심이었는지를 확인해서 맞을 경우 곧바로 부족회의의 결론이 된다.


고대인 초원인들의 생활상과 잔치 장면을 보여주는 보야르 암각화. 이들의 생활 속에서 구리솥이 쓰였다.


실제로 알타이 파지릭 고분에서는 자갈돌이 들어있는 구리솥이 발견된 적이 있어서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6·25때 내려온 돼지국밥이나 가야의 동복이나 왜 하필이면 부산에서 유행했을까? 동복을 봐도 같은 시기 백제나 신라에서는 유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원지역과 가장 먼 지역인 가야에는 동복을 비롯해서 수많은 북방계 문물이 출토되고 있을까. 필자는 그 답을 경남지역만의 지리적 환경에서 찾고 싶다. 농경문화가 강한 한반도 서남부지역은 자신들이 농사짓는 그 지역에 기반해서 살아야했기 때문에 외부문화가 유입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경남지역은 상대적으로 비옥한 평야지대가 덜 발달했고 강과 바다를 통한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생존기반이었다. 빠르게 물자를 운송하고 급변하는 정세에 빠르게 대응했다. 지역간의 교류에 기반한 가야의 문화는 초원지역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초원지역은 넓은 벌판이 무대라면 가야는 각지를 잇는 강과 넓은 바다가 무대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왜 부산인가?


초원을 질주하다 천막을 치고 동복을 장작불 위에 걸어서 고기와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넣어서 먹는 음식, 그리고 질박한 듯하지만 빠르고 자신의 입맛대로 먹을 수 있는 돼지국밥에는 유사성이 많아 보인다. 부산에는 골목마다 있는 국밥집이 경상남도만 벗어나면 사라진다. 서울에도 수많은 부산 사람들이 올라와서 살건만 변변한 돼지국밥집 하나 없다. 아마도 돼지국밥은 경상남도의 지리,환경적인 산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도 돼지국밥을 참 좋아한다. 한때는 세 끼를 다 돼지국밥으로 해결할 때도 있었다. 나에게 이 음식의 매력은 반제품이라는 데에 있다. 뽀얀 돼지국물에 밥을 말아서 나올 뿐이다. 여기에 고추장, 소면, 새우젓, 양파, 마늘, 정구지(왠지 돼지국밥에는 '부추'라고 하면 맛이 없을 것 같다) 등을 입맛에 맞게 넣는다. 미식가는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재료를 먹는 사람이 골라서 넣는 음식은 없는 듯 하다.


지금도 서울에 다녀오는 출장길에 KTX가 대구를 지나면 어느덧 객차 안은 한산해지고 몸도 조금씩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 무렵 갑자기 탁 트인 낙동강이 창가 너머로 펼쳐지면 마음은 벌써 부산에 다 온 듯하며 머릿속엔 고소한 돼지국밥이 아른거린다. 한국에 항구는 많지만, 부산은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바로 유목민과 바다의 심성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에만 발견되는 많은 북방계유물은 대량의 이주민은 아니어도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도 숨 가쁘게 백두대간을 지나 이 낙동강 변에서 잠시 쉬어가며 구리솥에 이런저런 국밥을 해먹으며 내려오지 않았을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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