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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의 일제시기 행적 밝혀지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호수 423 승인 2015.10.28 03:07페이스북
일제 때 안익태의 행적을 알 수 있는 1950년대 글이 발굴되었다.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엘리트 에하라 고이치가 쓴 글이다.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음악잡지 <음악지우(音樂之友)>는 1942년 10월호에서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행사가 1942년 9월15일의 경축식전을 중심으로 최고조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만주국의 신국가 제정을 비롯해 일본에서 건너온 음악사절 등이 참여한 수많은 연주회가 줄을 이었다. ‘대동아 음악 건설’의 기치를 내건 이 경축행사에는 9월21~23일 신경(현 창춘), 하얼빈, 봉천(현 선양) 등지에서 개최된 만주국의 ‘맹방’ 독일,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의 경축곡 연주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를린에서도 만주국 건국 10주년 행사는 열렸다. 1942년 9월18일 오후 8시, 곡은 <만주국>, 지휘는 ‘일본 지휘자’ 에키타이 안(안익태)이었다. 마지막 4악장에 합창이 포함된 이 대편성 축전곡의 합창 대본을 작성한 이가 바로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다. 안익태보다 열 살 정도 위였던 그는 하얼빈시 부시장을 거쳐 주독 만주국 공사관의 참사관을 지냈다. 당시 공사는 여의문(呂宜文)이었다. 여의문은 일본 메이지 대학 출신으로 만주국 국무총리의 비서관과 통화성장을 지낸 뒤 만주국 공사로 임명된 사람이다. 당시 만주국의 정부조직 체계가 그러하듯, 에하라가 여의문 공사의 아래인 참사관이었지만 사실상 실세였다고 보면 되겠다. 에하라는 패전 후 소련군의 보호하에 모스크바를 거쳐 일본으로 귀국한 뒤, 도쿄에서 변호사로 활동한다. 반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은 귀국 후 친일파, 곧 한간(漢奸)으로 재판에 회부돼 총살되었다.
1942년 9월18일 베를린 <만주국> 공연장의 에하라 고이치.
사진 속 인물이 1942년 9월18일 베를린 <만주국> 공연 현장의 에하라다. 당시 이 공연은 기록영상으로 제작되어 추축국을 중심으로 배포되었는데, 이 사진은 그 한 장면을 갈무리한 것이다. 프랑스 국립시청각연구원이 소장한 당시 파리의 전쟁뉴스 영상 일부를 편집한 에키타이 안의 영상자료는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에하라는 1950년대 초 일본 음악잡지에 기고문을 세 편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안익태군의 편모>이고, 다른 하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추억>이다. 세 번째는 모차르트에 관한 거라 안익태와는 직접 연관이 없다. 세 편 모두 이번에 처음 발굴된 것이다. 그래서 앞의 두 글을 통해 지금까지 안익태 연구에서 투명하지 않았던 부분을 좀 더 뚜렷하게 조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대개의 회고록이 그렇듯이 에하라의 후일담 역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사사화(私事化)하면서 제국주의 엘리트로서 그의 역할이 생략되어 있음은 주지할 만하다. 또 당시 시점에서 10년도 더 된 과거를 회고하는지라 부분 부분 오류도 섞여 있다.
이번에 발굴된 안익태군의 편모 원고.
에하라의 기억에 따르면, 1941년 일본 4대 명절 중 하나인 명치절 11월3일 아침 루마니아 일본 공사관에서 식순에 따라 기미가요를 제창할 때 피아노 반주를 하던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 안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안익태의 베를린 시절 집주소는 에하라의 사저였다. 그런데 지금껏 어떻게 해서 안익태가 에하라의 집에 기거하게 된 건지는 의문이었다. 한데 이 회고록에 “에키타이가 나(에하라)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해, 그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내 집에 살게 해주었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더군다나 에하라의 동생도 도쿄 음악학교를 비슷한 시기에 다녀 에키타이를 동생처럼 여겼다고 한다. 아직까지 에키타이 쪽의 진술은 없다. 나치가 망할 때까지도 에키타이의 집 주소는 에하라의 집이었다. 구스타프 프라이탁 가 15번지, 베를린 반(Wann) 호숫가에 있는, 지금도 쾌적한 고급 주택가다.
1941년 11월3일 저녁 부카레스트, 자신의 음악회에 에하라를 초대한 에키타이는 <조선(코리아) 환상곡>의 ‘자기 표절’이라 할 <교쿠토(극동)>와 일본 궁중아악을 변주한 <에텐라쿠>를 연주해 호평을 받았다.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당시 루마니아 공사는 본국 외무성과 아울러 조선총독부에도 보고했다. 대략 1941년 말~1942년 초 무렵부터 에하라의 집에 기식한 것으로 보이는 에키타이는 이 집에서 <만주국>을 만들어 1942년 9월 무대에 올렸다. 에하라는 이 곡의 마지막 4악장 가사를 자신이 썼다고 확인해주고 있다. 오족협화(일본이 만주국을 건국할 때의 이념으로, 5족은 일본인·한족·조선인·만주족·몽고인을 가리킨다)를 칭송하는 가사 내용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리고 <만주국>이 중국의 멜로디를 따왔다고 말하는데, 이는 만주국 국가에도 사용된 ‘소무목양(蘇武牧羊)’의 멜로디로 보인다.
일반적 추측과 달리 에하라는 오히려 안익태가 슈트라우스와 자신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말한다. 에키타이가 일본 황기 2600년을 경축하는 슈트라우스의 작품 <일본축전곡>을 지휘한 직후인 1942년 3월14일, 지금도 영업 중인 빈의 유명한 레스토랑 ‘드라이 후사렌’ 별실에서 슈트라우스 부부, 에하라 그리고 에키타이가 저녁을 같이했다. 이 자리에서 에하라는 슈트라우스가 그의 첫 오페라 <군트람> 재공연을 위해 그해 6월 베를린에 방문할 때 자신의 집에 유숙할 것을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열흘 가까이 에하라의 집에 머무는 동안 슈트라우스는 생일을 맞았다. 극소수가 에하라의 집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치 선전성 음악국장 하인츠 드레베스였다. 괴벨스의 신임을 받던 그는 사실상 나치 독일의 음악정책을 총괄하는 실세였다.
갈무리 안익태의 베를린 시절 거처는 에하라의 사저로 돼 있다. 위는 그 위치를 구글 어스로 갈무리한 것. ⓒ구글어스
임정이 ‘혈전’ 결의할 때 안익태는 어디 있었나
에하라-안익태 커넥션은 그 자체로 하나의 블랙박스 같은 것이었다. 당시 드문드문 국내에 들려오는 그의 소식은 대개 과장되어 있었다. 그 시절 안익태의 유럽 활동 현장에 조선인이 접근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 조건에서 안익태는 ‘스폰서’ 에하라를 통해 일신상의 편익뿐 아니라 신분상의 안정, 음악적 커리어 구축 등에 상당한 이익을 취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에하라 참사관 또한 만주국의 국책사업이었던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사업에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주국>은 그 결과물이라 하겠다.
1940년 12월20일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이승만이 장악한 대한인국민회가 요구한 안익태 작곡 애국가의 신곡보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했다. 그 1년 뒤인 1941년 12월10일 임시정부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한다. 임정은 이를 통해 “왜구(倭寇)의 완전구축”을 위해 “혈전”을 결의했다. 바로 그 시점 안익태는 에하라의 베를린 사저, 스스로 일컫기를 ‘편안하고 안락한’ 그 호숫가 빌라로 가고 있었다.
국내 친일파의 경우, 당시에나 해방 이후에나 법적 청산은 아니지만 도덕적 비난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이에 비해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에키타이 안으로 살아간 안익태의 파열된 정체성은 철저히 은폐된 채 반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일부 알려지게 된다. 사적인 정체성 장애는 그렇다 치더라도, 애국가가 담긴 <코리아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의 정체성 문제는 이어져 지금도 만주가 한국인지, 한국이 만주인지 집단적 정체성 장애를 앓고 있다. 그것이 2015년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의 얘기이고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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