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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한국인집단거주지 겨우 찾아갔는데... 화가 치밀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 '임정로드'를 떠나다] 열일곱 번째 이야기, 류저우~충칭까지
조종안(chongani) 등록 2019.11.11 20:32 수정 2019.11.11 20:32
▲ 대한민국 임시정부 치장 사무처 구지(왼쪽)와 충칭 연화지 청사 구지(오른쪽) [사진출처:임시정부 충칭진열관에서 찍음] ⓒ 조종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8년 11월, 중국 서남부 도시 류저우에 청사를 마련한다. 그러나 전선이 확장되면서 이듬해 4월 치장(기강)으로 옮긴다. 공습 때마다 방공호로 숨어야 했던 임정 가족들은 김구가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보내준 버스를 이용해 구이양(귀양)으로 간다. 구이양은 귀주성(貴州省) 성도로 해발 3000m 넘는 봉우리가 즐비한 고산지대였다.
구이양에서 치장은 버스와 선박, 두 팀으로 나눠 이동한다. 피난길이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암초를 피하고자 밑창이 평평한 목선을 구해야 했으며, 계곡에서는 젊은이들이 밧줄로 끌고 나아갔다. 버스는 이동 중 자주 고장을 일으켰고, 산악지대에서는 아찔한 절벽 길을 지나기도 했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긴 임정 가족들은 5월 치장에 안착한다.
기록에 따르면 1939년 5월 치장으로 이전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해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 홍진, 최동오, 지청천 등 13인을 의원으로 보선하고 이동녕, 김구, 송병조, 조소항, 이시영, 차리석 등 11인을 국무위원으로 선출하여 제14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구성한다. 별도로 선전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소앙, 홍진, 엄항섭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비교적 안전한 치장에 거처를 마련한 임정 가족들. 그들은 임시정부가 치장에 머무는 1년 5개월(39년 5월~40년 9월) 동안 이동녕, 이시영 등 임정 원로들을 젊은 층 가족이 모시고 지낸다. 1940년 3월 이동녕 선생이 영면하여 슬픔에 잠기기도. 이들은 그해 9월 충칭으로 이전한 임시정부를 따라 충칭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토교촌(토교마을)으로 옮겨간다.
류저우-충칭 야간열차에서
▲ 기차에서 본 귀주성 어느 시골 풍경 ⓒ 조종안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일곱째 날(7일)은 야간열차(류저우-충칭)에서 날이 희번하게 밝아오는 이른 아침에 시작했다. 전날 류저우 지역 임정 유적지를 돌아보고 밤 9시 30분발 기차(4인실 침대칸)로 이동한 것. 낭만과 운치가 동행하는 기차여행. 특히 장거리 야간열차는 향수 어린 경적과 선로의 마찰음(덜커덩 소리)까지 감상할 수 있어 기차여행의 백미로 꼽는다.
류저우~충칭 거리는 약 900km. 새벽에 잠들었다가 오전 7시쯤 눈을 떴다. 기차는 중국 서남부 지역에 위치한 '구이저우성(귀주성)'을 지나고 있었다. 평균 해발 1,000m 정도의 고원지대여서 그런가,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고 통증이 느껴진다. 마주 앉았던 일행이 휴대폰으로 검색하더니 "우리는 지금 해발 380~400m 상공을 달리고 있다"며 놀라워한다.
▲ 기차에서 찍은 계곡 풍경 ⓒ 조종안
갑자기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든다. 산허리를 감도는 희끄무레한 구름과 고산준령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계곡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고가철도와 터널, 철교도 보인다. 소나기가 쏟아진 뒤여서 진녹색의 들녘과 울창한 숲이 무척 싱그럽다. 하늘과 맞닿은 고지대임에도 기차는 헉헉대지 않고 미끄러지듯 달린다. 경적도, 마찰음도 남기지 않고.
가이드가 충칭이 머지않았음을 알린다. 일행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가 항저우, 난징, 광저우, 류저우 등을 거쳐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20년 남짓 걸렸는데, 생명을 담보해야 했던 그 험로를 일주일 만에 무사히 횡단했음을 자축했다. 담소는 계속 이어졌다. 애국지사들과 가족들의 험난했던 피난길 이야기가 나올 때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산과 강, 구름에 둘러싸여 '안개의 도시'로 불리는 충칭도 분지 지형이란다. 그래서일까. 기차가 달리는 좌우로 산봉우리와 구름만 보인다. 아늑한 마을과 계곡, 산장 분위기의 촌락 등이 조화를 이룬다. 다랑논도 보이고, 오솔길도 보이고, 비닐하우스도 보이고, 폐가도 보인다. 산허리마다 설치된 대형 송전탑들이 진즉부터 산업화가 이뤄졌음을 암시한다.
한국인 집단 거주지 '토교촌(토교마을)'에서
▲ 임정 요인과 가족들이 거주했던 토교 한인촌(출처:임시정부 충칭 진열관에서 찍음) ⓒ 조종안
기차는 예정보다 1시간 30분가량 늦은 오전 10시 50분 충칭역에 도착했다. 일행은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점심을 먹고 호텔에 도착, 한 시간쯤 휴식을 취한 뒤 오후 1시경 탐방을 시작했다. 이날 찾아간 임정 유적지는 토교촌, 임시정부 충칭 진열관, 광복군사령부 건물터, 약산 김원봉 집터 등.
첫 방문지는 충칭에서 약 15km 떨어진 파남구 화계촌(토교촌)이었다. 이곳은 1940년 9월 치장에서 옮겨온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과 한국광복군 산하 토교대 대원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한인촌'이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정부로부터 6만 원을 지원받아 화계촌 지역 대지 2천여 평을 매입하여 한국인 마을을 조성하였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토교촌입니다, '화계촌'으로도 불리고요. 우리나라 애국지사 100여 명과 '토교대' 대원들이 함께 살았던 한인촌 텁니다. 애국지사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죠. 당시 토교촌 동감 폭포 위에 큰 기와집 3채를 짓고 살았는데요. 그 한인촌이 현재는 공장 안에 있습니다. 일단 입구에서 승인을 받고 차로 10분, 걸어서 50~60분 더 들어가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가면 승인을 안 해줘요."
한인들이 살았던 곳에 '한인거주 옛터'가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며 출입 허가를 받아낼지 모르겠다는 김종훈 기자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강관(鋼管) 공장 입구에 도착, 현지 가이드가 몇 차례 사정했으나 한사코 거절, 발길을 돌려야 했던 것. 이동녕 선생 집터가 있는 치장 코스도 포기하고 달려왔는데 표지석도 못 보다니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 토교 한인촌 삼일유치원 추계 개원기념(1941년 10월 10일)[사진출처: 임시정부 충칭진열관] ⓒ 조종안
옛날 신문에 따르면 토교마을에는 한국광복군 훈련병 숙소와 연병장이 있었다. 한국인 자녀들이 다니는 중학교와 신한교회, 삼일유치원 등이 있었으며 삼일운동 등 국가적 행사도 개최하였다. 정정화 여사는 <장강일기>에서 "토교촌에 머무르는 광복군부대를 '토교대'라 불렀으며 교회 강당은 식당과 침실로 꾸며 학도병 출신 청년 광복군 50여 명이 막사로 사용했다"라고 기록하였다.
부부 독립운동가(양우조, 최선화)가 쓴 <제시의 일기>는 "토교 한인촌은 마을 전체가 대나무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시냇물도 흐르고 그 주위에 사철나무가 우거져 있어 무척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언덕에 있는 YWCA 회관과 민가에서는 아이들을 모아 한국말과 한국노래를 가르치고 있어 그 앞을 지날 때면 고향에 온 느낌이 들곤 했다"라고 적고 있다.
토교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화상산(和尙山)은 공동묘지였다. 이곳에는 조국 광복을 그리다가 숨져간 이름 없는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있다. 조선의용대와 광복군 제1 지대에서 요직을 맡아 활약하다가 1942년 순국한 이달(李達) 선생을 비롯해 김구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큰아들 김인(金仁)도 묻혀 있었다고 한다(곽 여사와 김인 유해는 1948년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충칭 연화지 청사 가는 길
▲ 환국 앞둔 임시정부 요인들(충칭 청사 계단에서 1945년 11월3일) ⓒ 조종안
일행은 아쉬움을 남긴 채 버스에 올라 투중구 칠성강에 자리한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아래 연화지 청사)'으로 이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 머무는 5년 동안(40년 9월~45년 8월) 전열을 재정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창립하고, 다당 합작을 기초로 하는 내부 개편을 진행하였다. 일본군의 공습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반영한 '임시헌장'을 개정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반포했으며, 군대를 조직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연화지 청사는 1940년 9월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치장을 거쳐 충칭으로 옮겨와 입주한 네 번째이자 마지막 청사입니다. 그렇게 네 번을 옮겨 다닌 결정적인 이유는 일제의 공습 때문이었죠. 그렇게 숱한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광복군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에 온 힘을 다합니다. 정부로서 완전한 모습을 보여줬던 거죠.
특히 연화지 청사 계단은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 후 환국 기념사진을 찍은 장소입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훌쩍 지난 2017년 12월 16일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애국지사 후손들, 그리고 우리 정부 내각 요인들이 그 계단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좋은 옷을 입고 가달라고 부탁한 거죠."
김종훈 기자는 "연화지 청사는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 건물 중 가장 조직된 형태로 애국지사들이 독립을 위해 실질적으로 활동했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말로는 아무리 설명해도 부족하다. 조금 후 도착하면 백범과 임정 요인들이 기념비적인 사진을 찍었던 그 '백범의 계단'에 서서 직접 감동을 느껴보자!"라고 덧붙였다. (계속)
▲ 충칭 임시정부 청사 ‘백범의 계단’에 선 임정로드 탐방단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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