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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 문화콘텐츠닷컴 http://bit.ly/2NRVEv2" 글 중 행궁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북한행궁


해동지도 경도 오부


한행궁 내정전 전경



행궁(行宮)


행궁이란 정궁(正宮)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行幸))할 때 머무는 별궁(別宮) 또는 이궁, 임시궁궐(臨時 宮闕)을 말한다.


그 조성 목적은 왕이 능행(陵幸)을 목적(화성행궁)으로 혹은 전란(戰亂)에 대비(남한행궁, 북한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월미행궁, 격포행궁 등)하여 조성하거나 휴양(休養) 공간(온양행궁, 초수행궁, 이천행궁 등) 혹은 왕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하면서 중간 휴식지(休息地)로 이용(사근평행궁) 하는 것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행궁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 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어 왔다. 행궁을 만들어 이용한 기록은 백제 때부터 나타나는데, 삼국사기 백제 본기 진사왕(辰斯王) 8년에 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행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에서 40건의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행궁은 전 시기에 걸쳐서 조성되었는데 행궁의 이용 시기는 전기보다는 이괄의 난 등 국내 반란과 정묘호란ㆍ병자호란ㆍ임진왜란 이후의 군사적인 목적의 증대로 인하여 중 후기에 더 많이 조성되고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조성된 행궁은 풍양궁(豊壤宮)과 온양행궁, 초수행궁, 이천행궁 등이 해당한다. 임진왜란 이후 인조에서 숙종대까지는 남한행궁, 북한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격포행궁, 월미행궁이며, 경종대 이후는 정조대(1776~1800)가 화성행궁과 노량행궁(용양봉저정), 시흥행궁, 과천행궁, 사근참행궁, 안양행궁, 안산행궁 등을 조성하는 등 행궁을 활발히 조성한 시기였다.


북한행궁의 조성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에 축성되었는데, 비상시 장기적인 항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거처할 행궁도 함께 고려되어 진행되었다. 행궁의 조성과정에 대하여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배릉등록(拜陵謄錄)』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행궁조성 공사를 주관할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은 공사가 진행되기 직전인 8월 초에 결정되었다. 숙종은 호조판서 김우항(金宇杭)이 축성을 담당했으므로 그대로 행궁영건당상(行宮營建堂上)으로 차출하고, 다른 1명은 공조판서 이언강(李彦綱)을 차출하며, 낭청(郎廳)은 두 부서의 낭관으로 차출하였다. 이어 행궁의 조성을 담당할 기관으로「행궁영건청(行宮營建廳)」을 설치하였다. 남한행궁의 경우는 유수가 성 전체의 일을 전관하므로 행궁 공사도 그 속에 포함해서 진행하였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행궁영건청(行宮營建廳)」은 행궁의 조성을 담당할 임시 기구로 처음에는 별도의 기관을 설치하지 않고 호조와 공조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사의 진행상 전담 기관이 있어야 일을 추진하기에 편하고 효율적이므로 ‘영건청’이나 ‘영건소(營建所)’라는 명칭을 두기를 요청하여 설치하게 되었다. 이후 낭청으로 호조좌랑 서종유(徐宗愈)와 공조좌랑 이의화(李宜華)를 추가로 차출하고 사목(事目)을 마련하여 도감(都監)과 같은 공식 기관으로서 공사를 진행해 나갔다.


행궁의 영건(營建)은 일반적인 관영공사와 마찬가지로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길일(吉日)과 시간을 정하게 하여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조성공사는 1711년 8월 17일 진시에 착수되었고, 내전의 정초는 9월 26일 진시, 입주는 9월 29일 묘시, 상량은 10월 6일 묘시로 정하여 진행하였다. 외전은 다음해인 1712년 2월에 북청(北廳)의 공사를 시작으로 재개되었다. 당초 외전의 공사 일정은 정초가 2월 21일 진시, 입주는 2월 26일 묘시, 상량은 2월 29일 묘시로 정하고 진행하였으나 산속 깊은 곳이라는 점과 추위로 인하여 공사가 지연되면서 공사 일정을 다시 정하였는데, 정초는 3월 5일 묘시, 입주는 3월 8일 진시, 상량은 3월 10일 오시로 결정하여 진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5월에는 수라간을 포함하여 계획되었던 건축물이 모두 완성되었고, 6월 9일에는 공사에 참여한 관리자 및 원역, 공장에 대한 시상을 함으로써 행궁 조성은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행궁의 관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이후 행궁의 위치가 당시의 중흥사가 있던 자리가 더 좋다고 하여 다시 옮겨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산사태의 위험 등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북한행궁의 규모


행궁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북한지』와 19세기초(1808년경)에 작성된 『만기요람(萬機要覽)』, 고종 초반기 문헌인『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가 있다. 이중 19세기 문헌인『만기요람』과『동국여지비고』는 행궁의 총칸수가 129칸으로 같다.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각 문헌별 북한행궁 건물 규모

건물 / 문헌내전내전 부속건물수라소측소외전외전부속건물비고총칸수
『북한지』
28칸
28칸
5칸
2칸28칸
33칸
124칸
『만기요람』28칸18칸6칸 (수라간)
3칸28칸46칸5칸 증건129칸
『동국여지비고28칸28칸

① ~ ④
합 : 73칸

129칸


1902년 북한행궁 모습


『북한지』와『만기요람』은 약 60여년의 시간 차이가 나는데 이 기간동안 영조는 1760년(영조 36)과 1772년(영조 48) 두 차례 행궁을 찾았다. 두 문헌상에 보이는 5칸의 차이는 두 차례 있었던 영조의 행행(行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중 수라소와 측소가 각각 1칸씩 증축되었다. 나머지 3칸은 행궁내 부속 행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함께 두 문헌은 행궁의 행각 칸수를 기록하는데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내전에 속한 행각 칸수에서 30칸과 21칸으로 9칸의 차이가 난다. 외전 행각 칸수 역시 33칸과 46칸으로 수라소와 측소 2칸외에 11칸의 차이가 난다. 이것은 두 문헌의 기록자가 내전과 외전의 부속 행각을 두 건물 중 어느 건물에 속한 것으로 보았는가 하는 시각 차이로 볼 수 있다.


현재 행궁의 유구 상태나 『한국건축조사보고』의 사진은 『만기요람』의 건물 구성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19세기 초 행궁의 배치 상태가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행궁은 순조 32년(1832)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피해를 입었으나 다음해 산성과 함께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1879년(고종 16)에는 홍수로 인하여 수리하였고, 1892년(고종 29)에도 수리를 결정하여 다음해까지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로 보아 행궁의 건물들은 홍수 등으로 피해를 입긴 하지만 중요시되어 계속 수리를 하여 유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북한행궁의 관리와 이용


행궁이 조성되는 중에도 산성과 함께 행궁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에 문제는 행궁의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산성의 관리자를 정하는 문제와 함께 지속적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논의 과정에서는 따로 위장(衛將)을 내자는 안과 삼군문의 장교에게 수직하게 하자는 안이 대두되었다.


행궁 공사가 마무리되는 1712년 5월 숙종은 비변사회의에서 행궁을 수직할 가위장(假衛將) 2원을 우선 차출하도록 했다. 이 문제는 몇 일 뒤 재차 논의가 진행되었고, 수라간을 제외한 공사가 마무리된 행궁에는 위장 2인을 차출하여 교체하도록 하였다.


이후 행궁의 관리는 1712년 산성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설치된 경리청(經理廳) 소속의 관성장(管城將) 1원(員)이 맡아서 하였다. 관성장은 처음에는 ‘행궁소(行宮所) 위장’, ‘도별장(都別將)’으로 부르다가 경종 2년(1722)부터 ‘관성장’으로 불렸다. 행궁의 수직은 관성소(管城所) 소속의 행궁군사 2인이 하였다.


행궁의 관리는 행궁 영역에 보각이 들어서고 고종대에 사고로 전용되는 점과 이곳에 보관했던 물품들이 왕실의 어제나 어보, 어책, 의궤를 비롯한 중요 유물들이었으므로 엄격하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행궁을 봉심하러 가기전 왕의 하교를 받는 기록 등을 통해 조정에서 행궁에 대한 정기적이면서도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행궁을 조성한 이후 행궁을 찾은 왕은 숙종과 영조 두 왕 뿐이다.


역대왕의 북한행궁 이용

시기/행행내역행행 일자행행 내용
숙 종
1712년(숙종 38) 4월 10일
산성, 행궁 조성 시찰
영 조1760년(영조 36) 8월 20일행궁 시찰, 보각 봉심
1772년(영조 48) 4월 10일선왕 행행 추모


숙종은 1712년(숙종 38) 4월 구파발을 거쳐 산성을 찾았다. 숙종은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행궁을 둘러보고 산성의 동장대(東將臺)에 올랐다. 당시 연잉군이던 영조는 19세였는데 총관(摠管)으로 부왕인 숙종을 호가(扈駕)하였다. 

이전에 숙종은 성역이 진행중이던 7월 이전에 북한산에 행행하고자 하였으나 도제조 이이명의 반대로 다음해(1712년)로 미루었다. 또한 1712년 3월에도 숙종은 행행 날짜를 늦춰 잡으라는 부제학(副提學) 이조(李肇)의 상소에 이미 행행 날짜를 늦추었다는 하교를 내린 적이 있었다.


숙종은 1712년(숙종 38) 대서문과 수문을 거쳐 행궁을 찾았다. 숙종은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행궁을 둘러보고 대신과 제신(諸臣)이 입시한 가운데 성의 서북변에 중성(重城)의 축성을 지시하고, 산성내 사찰의 건립시 공명첩의 발행과 양향(糧餉) 문제를 결정하였다. 이어 시단봉(柴丹峰)에 올라 산성의 동장대(東將臺)를 살펴보았다.


행궁을 조성할 무렵부터 행궁에『조선왕조실록』의 한 본을 베껴 본관(本館)이나 북한에 두도록 요청한 것으로 보아 평상시 이용에 대해서는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로서의 기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하들과 산성에 관한 제반 문제를 의논한 곳은 편전의 역할을 하는 외전이었을 것이다. 행행 당시 행궁 공사는 막바지 단계로 5월 8일 공조판서 조태구의 보고에 의하면 수라간 이외에는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다. 당시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왕의 행행에 대비하여 진행 상황에 맞게 다소 정리된 상태로 왕의 행행을 맞았을 것이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년 8월과 1772년(영조 48) 4월 두 차례 행궁을 찾았다. 1760년 행행은 영조에게는 왕자일 때 부왕을 호위한지 49년만에 다시 행궁을 찾는 것으로 영조는 친히 눈물을 머금으며 「북한행궁기회(北漢行宮紀懷)」라는 글을 남겼다. 이날 영조는 행궁에 들어가 숙종이 쓰던 포진(鋪陳)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총융사(摠戎使)에게 궤(櫃) 안에 간직하게 하였다. 또한 돈령판관(敦寧判官) 서일보(徐日輔)에게 보각(譜閣)을 열어서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보각이 1760년 이전에 행궁 영역안에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1772년에도 79세의 나이로 험한 산행을 통해 행궁을 찾았다. 이날 행행은 선왕인 숙종의 행행이 주갑(周甲)을 맞은 것을 추모하는 의미였다. 1772년 영조는 부왕인 숙종이 1712년 행궁을 찾았던 4월 10일에 거동하여 선왕의 행행을 추모하였다. 행궁은 영조의 두 차례 행행이 있던 동안에 5칸이 증축되었다.


도성에서 행궁으로 진입하는 길은 기존에는 구파발을 거쳐 대서문(大西門)으로 들어가는 길을 이용했다. 이후 새로 도로을 조성하여 창의문(彰義門)을 통해 북한산성의 대성문(大成門)을 거쳐 행궁에 도달하는 길을 마련해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영조는 행궁을 정치적으로도 이용하였다. 영조는 세자와 갈등이 있거나 신하들과의 의견 충돌시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이어처(移御處)로서 북한산과 북한행궁을 제시하면서 결국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켜 나갔다.

행궁 관리 주체로서 경리청(經理廳)이 임시로 편성된 것은 1712년 1월이었다. 같은 해 4월 숙종의 행행 당시 산성의 관리 주체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11월 ‘경리청절목(經理廳節目)’이 마련되면서 하나의 관청으로 성립한다. 경리청의 중요한 임무는 향곡(餉穀)의 확보와 관리에 있었다. 북한산성의 향곡은 10만석으로 확정되었는데 이것은 강화나 남한산성과 같은 양으로 산성의 전략적 비중이 두 곳 보다 특별히 더 크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18세기 조선의 방어 전략은 적의 양태에 따라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또는 강화 중에서 선택적으로 피난처를 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리청에 대한 비판과 혁파의 주장은 숙종 말년부터 시작되어 경종대에 고조되었다. 그러나 북한산성의 중요성이 무시되지 않는 한 경리청은 혁파되기 어려웠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국가 방어전략은 산성방수체제(山城防守體制)에서 도성수호체제(都城守護體制)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북한산성에 많은 쌀을 저치(儲置)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를 관리할 관청 역시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영조 23년(1747) 경리청은 혁파되고 산성관리는 총융청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행궁 역시 건물 이용에 변화가 수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은 건립 단계부터『조선왕조실록』의 사본을 옮겨와 보관하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이이명은 『조선왕조실록』의 사본을 본관(춘추관)이나 북한에 두어 후일에 살펴보기 쉽게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강화사고에 보관중인 서책을 꺼내어 살펴보는 과정이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도성내에 두거나 강화보다 가까운 북한행궁에 두자는 주장이었다. 결국 행궁은 영조대에 있었던 방어체제의 변화에 따라 중요성이 다소 약화되면서 행궁 본래의 기능에 왕실 서고의 기능이 부가되어 운영되었다.


행궁의 기능 전환으로 인해 행궁은 본래의 기능에 왕실 서고로서의 기능이 첨가된다. 행궁에 왕실서고를 설치한다면 책들과 중요 물품들을 어느 곳에 보관했는가는 중요한 문제로서 기존에 있던 행궁 건물을 이용하는 방법과 별도로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방법이 있었다. 북한행궁은 후자를 택하여 보각을 설치하여 중요 서적들을 보관하게 했다.


1760년 영조의 행행은 행궁을 둘러보고 보각을 봉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1760년 이전에 행궁 영역내에 보각을 설치하여 왕실 족보 등을 보관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보각은 이후 고종년간에 와서 사고로 전용(轉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고에 보관했던 책의 목록은『북한책목록(北漢冊目錄)』에 전한다. 이중 사고가 지어지기 전에 보각에 보관했을 왕실족보는 5종 139책이 있다. 행궁이 건립되기 직전 이이명의 제안에 의해 행궁에 『조선왕조실록』의 사본을 보관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실제『북한책목록』에서 확인되는 것은『정조실록』1책 뿐이다.『북한책목록』의 책을 종류별로 정리하면 표와 같다.


『북한책목록』의 도서분류와 수량

분류수량분류수량
儀軌/謄錄
64종 323책弘齋全書
656책
族譜類5종 139책읍지류4종 85책
御寶/御冊類81점 (보함 25점)지도류7종 67점
御製/御筆類560점式年
155책
行狀/誌狀12책무제목34책
印章類

136점 (금함 24점)



목록에서 확인되는 의궤 등 서적의 상당 부분은 고종년간의 것이다. 이것은 병인양요(1866년, 고종 3) 때 외규장각(外奎章閣)의 소실로 인해 왕실의 중요 서적을 비롯한 물품들을 보관할 곳이 사라지자 이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왕실의 중요 서적이나 어보, 어책류 등의 보관 기능을 행궁내 사고가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행궁내 사고에 보관했던 책은 1909년(융희 3, 명치 42) 4월 상순에 소격동에 위치한 종친부(후에 총독부 학무과분실, 1934년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로 이장(移藏)하였는데, 이로써 사고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표면상 궁내부가 주도하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홍문관, 규장각, 집옥재(集玉齋), 시강원(侍講院)과 강화 정족산 사고의 도서들도 이때에 이관되어 궁내부 도서과(圖書課)에서 이관받아 집중 관리되었다.


따라서『북한책목록』은 궁내부(宮內府)가 행궁 서고에 보관했던 각종 서적과 왕실 물품들을 종친부로 이관하기 직전에 책의 종류와 수량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한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북한책목록』의 첫 장에 기록된 ‘隆熙三年四月一日’이라는 책의 작성 일자에서도 확인된다.


사고는 1912년 영국교회에 10년간 건물을 대여한 기록으로 보아 행궁과 같이 건물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건물은 현재의 지형 상황으로 보아 행궁이 파괴된 1915년 홍수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당시의 피해 정도나 건물의 손상여부는 알 수 없다. 일본학자인 세키노 다다스(關野貞)이 다녀간 1902년에도 행궁은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15년 대홍수로 파괴되었다.


한편 이곳에 조선시대 역대 왕의 옥쇄와 금은 옥대, 의궤, 고문헌 등을 비밀리에 보관하여왔고, 더불어 다량이 정제 금괴가 저장되어 있었으며, 전란에 대비하여 땅속에 막대한 돌소금과 목탕 수만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기도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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