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2794&PAGE_CD=N0120  

조선어학회 핵심 이만규, 사실은 친일파였다
[발굴] 일본어를 국어로 표기...내선일체교육 지지하기도
12.02.04 20:59 ㅣ최종 업데이트 12.02.04 21:30 이길상 (leegs510)

우리 역사에서 친일은 안타까운 개념이 아니라 불쾌하고 역겨운 개념이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역사적 찌꺼기이고 문화적 얼룩이다. 그런데 매우 안타까운 친일도 있다. 바로 민족주의 교육자로 알려져 있던 이만규의 알려지지 않았던 친일이다.
 
이만규는 "일제 하에서 국내에 살면서도 끝까지 침략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민족주의자의 길을 고수한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로 인정되어 왔던 인물이다. 편안한 삶이 가능한 의사였음에도 힘든 교육자의 길을 걸었고, 과학자였음에도 식민지 지배 하에서 조선어맞춤법통일안 작성을 주도하고 조선어학회 회장을 지냈다. 일제가 조작한 흥업구락부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식민지하에서 여학생용 가정교과서를 집필할 정도로 여성교육에 관심을 두었고 해방 이후에는 진보적 교육개혁운동을 주도하였던 '진보적' 교육자였으며,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북한에 남아 1978년 작고할 때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문자개혁위원회 위원장, 조국통일사 사장 등을 지낸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통일운동가였다.
 
북한의 보통교육국장을 역임하였고, 일찍이 고려사와 리조실록의 번역 사업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해방직후에 간행된 그의 '조선교육사'는 남쪽에서 1988년과 2010년 두 차례나 재간행 될 정도로 한국 교육사 연구 분야에서 고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런 다양한 업적과 행적으로 그는 남과 북에서 동시에 존경을 받아온 흔치 않은 지식인이었다. 남쪽 출신이었음에도 북에서 권력을 누릴 수 있었고, 북한 정권의 실세임에도 남쪽에서 지존의 교육사학자로 존경을 받아온 것은 그가 식민지 지배 하에서 보여주었던 비타협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삶의 흔적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흠결이 없는 민족주의자로 각인되어 있다.
 
일본어를 '국어', 일본을 '내지'로 표기 

 
▲ 이만규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의 활동에서 아주 강한 친일의 흔적이 엿보인다. 일제는 1936년 1월 제2차 초등교육확충 10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10년간 1면 2교를 목표로 초등교육 시설과 인력 확충을 함으로써 의무교육 중간 단계에 진입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이 계획을 발표하면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 계획에 대한 교육계 인사들의 희망을 소개했다.
 
조동식(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은 이 계획에 대해 "감사하고도 통쾌함을 금할 수 없다"고 평하였고, 현상윤(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또한 계획 자체에 대해 감사를 표한 후 "의무교육의 즉시단행"을 주장하고 있다. 유억겸(연희전문부교장)은 이 계획의 발표가 반가운 일이라고 전제한 후 문맹퇴치를 위해 "간이학교의 증설"과 "서당확충"을 요구하였다.
 
당시 배화고등여학교 교무주임이었던 이만규는 이 계획에 대해 지지를 하며 "기쁜 일" 혹은 "고심 중에 소신을 다한 것"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완전한 의무교육 실시를 위해 "서당을 개량장려"하고 "강습소를 장려"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개량서당과 강습소의 교육내용을 제안하면서 "국어, 조선어, 아라비아숫자, 주산, 습자, 수공, 운동, 수신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일본어를 "국어"로, 우리말을 "조선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어가 국어이면 이만규에게 국가는 '일본'이었다.
 
게다가 이 신문 기고문에서 이만규는 일본을 '내지'로 표기하고 있다. 당시 내지는 문명화된 제국 일본이었고, 기타 지역은 문명화의 대상이었다. 식민지 하에서 과거에 '안'이었던 조선은 밖이 되었고, '밖'이었던 일본은 '안'이 된 것이다. '안'은 문명이고 '밖'은 야만이었다. 많은 조선인들에게 문명화된 '내지'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인이 일본을 '내지'로 표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타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태도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이만규가 일본을 '내지'로 부른 것은 단순한 표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만규의 개인 경험도 일본에 대한 태도변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컨대 1934년 10월에 있었던 경기도 학무과에서 주관한 이른바 '내지학사상황시찰단'의 일원으로 21일간 일본 본토의 문화시설을 시찰한 바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은 일본의 황국신민화 교육정책의 가속화를 가져왔다. 1937년 황국신민서사의 제정과 학교에서의 암송 및 궁성요배 강요에 이어 1938년 3월에는 내선일체를 표방한 '조선교육령개정령'(이른바 3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였다. 핵심적인 내용은 첫째 교명의 통일이었다. 즉, 모든 학교 명칭을 일본식으로 변경함으로써 보통학교는 심상소학교,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는 고등여학교가 되었다. 둘째는 일본어, 일본사, 수신, 체육 과목의 강조였다. 황국신민양성에 긴요한 과목이었다. 셋째는 조선어 과목이 필수에서 수의과목으로 격하되었다. 학교에서의 조선어 사용 또한 금지되었다.
 
이 개정령에 대하여 매일신보는 "미나미 총독의 일대영단" 혹은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한 내선공학을 향"한 "획기적 스타-트"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당국의 이 영단에 대한 교육계 종사자들의 감상과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매일신보는 1938년 5월 2일 명월관에서 좌담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5월 5일자에 실었다.
 
이만규, 내선일체 교육정책에 대한 지지 표시
 

▲ 평양 방문시 애국열사릉에서. ⓒ 이길상

내선일체 교육에 대한 조선 학생과 일반 교육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식민지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동의 창출과정이었다. 여기에 동원된 인사는 김활란(이화전문 부교장), 윤일선(세브란스의학전문 교두), 이춘호(연희전문 학감), 조동식(동덕고등여학교 교장), 그리고 이만규(배화고등여학교 학감) 등 조선인 교육자 12명이었다. 대부분이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적극 동조하던 인물들이다.
 
이 좌담회에서 이만규는 일제의 내선일체 방침에 따른 학교명칭 통일, 일본학생들과 조선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내선공학, 일본교과서의 전면적 사용, 교과서에 대한 총독부 검정제도 등 모든 내선일체 교육정책에 대해 지지를 표시하였다. 이만규는 이미 1938년 2월 2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개정교육령 지상좌담회'와 3월 17일자 기고문을 통해서도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위한 수신교육의 강화, 특히 개인주의 중심에서 국가주의 중심으로의 수신교육의 방향 전환에 대해서도 지지를 한 바 있었다.
 
좌담회에서의 발언 내용 뿐 아니라 좌담회 참석 자체도 문제다. 좌담회가 개최된 날짜가 1938년 5월 2일이다.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이만규를 비롯하여 50여 명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경찰의 조사활동이 시작된 지 2개월이 경과한 시점에서 총독부 기관지가 주최하는 좌담회에 참석하여 친일 경향의 교육자들과 함께 일제의 교육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만규는 이미 흥업구락부와 관련된 총독부의 혐의에서 벗어나 있었거나 아니면 총독부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좌담회에 참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대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사실일 수 없다. 
 
이만규를 포함한 흥업구락부 관련자 54명 전원은 1938년 9월 3일자로 공개적으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전향성명서에서 이들은 "내선일체의 사명을 구현시키는 것이 조선민중의 유일한 진로인 것을 인식하여 신일본 건설의 대국민적 긍지와 포부 하에 그 주어진 바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조선민중의 장래의 행복과 발전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성명서에서 이들은 일본을 "아일본(我日本)"으로 표현하였고, 활동자금으로 모았던 2400원을 국방비로 헌납했다. 이후에도 매월 10원 씩 국방헌금을 바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흥업구락부 사건 후 이만규의 행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1939년 2월 10일 개최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제36회 정기총회에서 새로 선임된 4명의 이사 중 1명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날 함께 이사로 선임된 인물은 김종우, 양주삼, 그리고 원한경이었다. 김종우와 양주삼은 1938년 12월에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를 시작하는 등 황민화 정책에 호응하여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던 대표적인 기독교계 인사였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은 선교사의 아들로서 기독교의 신사참배를 지지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과 함께 이만규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신임 이사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는 대표적 친일 기독교도인 신흥우가 총무로, 윤치호가 부총무로 있던 친일 종교단체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2월 3일 이만규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시가정시간 <질서 있는 생활을 합시다>'라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가정교육 전문가로서 전시에 즈음하여 일반국민들이 생활 속에서 준수해야 할 지침을 전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학생용 부교재 '가정독본', 조선총독부 발표한 '의례준칙' 준수 주장
 
이만규는 1941년에 여학생용 부교재 '가정독본'을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놀랍게도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발표한 '의례준칙'의 긍정적 영향을 인정하고 그것의 철저한 준수를 주장하고 있다. '가정독본'의 내용 중 의례개혁 부분은 '의례준칙'의 복사물이었다. 당시 총독부 '의례준칙'의 준수는 일제의 가정보국운동의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그의 '가정독본'은 친일의 흔적임이 틀림없다.
 
1942년 10월 1일부터 일제는 이만규를 비롯한 조선어학회 핵심인사 33명을 순차로 검거하였다. 이만규는 초기 기소대상자 16명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담당 검사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수감을 면할 수 있었다. 기소유예 사유는 분명치 않다. 조선어학회의 핵심 간부로서 활동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에도 기소를 당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만규가 교육부문에서 기왕에 보였던 타협적 활동이 그의 기소유예를 가능하게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어학회에서 이만규에 비해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인사들 다수가 기소, 재판, 복역, 혹은 옥중사망의 길을 걸었던 것과 대비된다. 이 사건 이후에도 그가 배화여고에서 교두로서 활동을 지속한 것 또한 당시 총독부와 이만규와의 관계가 대립이나 투쟁의 상태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만규는 해방 직후에 쓴 '조선교육사'에서 민족적 양심을 지녔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이를 지켜내지 못했던 교육자를 가장 불행한 생활을 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가면을 쓰고 이중생활을 하지 않으면 교단에 설 수가 없었"던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인 교육자들의 양심의 고통을 타자화하여 말하고 있지만 이상에서의 이만규의 삶을 고려해보면 민족적 양심은 지녔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끝까지 이를 지켜낼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다름없다. 식민지 후반 시기를 이만규는 교육파멸기라고 불렀지만 이 시기는 교육만이 파멸된 것이 아니라 교육자인 이만규 자신도 파멸을 경험한 시기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길상 기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입니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