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00126/1/BBSMSTR_000000010417/view.do


<54>역사의 큰 자랑 귀주대첩

기후와 역사 전쟁과 기상

기사입력 2010.01.26 00:00 최종수정 2013.01.05 05:16


강한 비바람 등진 고려군 쾌승…애국심도 한몫


강감찬 장군의 초상화


귀주대첩의 기록화


거란 3차 침입로와 강감찬의 귀주대첩 지도.


2007년 국군의 날, 4400톤급 한국형 구축함이 해군에 인도되어 실전에 배치됐다. 이 구축함은 5인치 주포 1문과 일명 ‘골키퍼’라 불리는 근접방어무기체계(CIWS), 대함·대공 유도탄, 어뢰 등을 장착했다. 대공·대함 레이더와 수중음탐기, 해상 작전용 헬리콥터 등도 갖추고 있다. 한 마디로 공수능력이 크게 강화된 최신형 구축함이다. 해군은 이 구축함을 ‘강감찬’함이라 명명했다.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격퇴시킨 강감찬 장군의 이미지가 나라를 지키는 해군력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신예 구축함에 명명될 정도로 강감찬 장군은 우리 역사의 큰 자랑이다.


거란(契)은 4세기 이래 동 몽고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의 국가로 고대 튀르크어로 ‘키타이’라고 불렸다. 중화항공(Cathay Pacific)에서 Cathay가 바로 키타이에서 유래됐을 만큼, 거란은 칭기즈칸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상당한 국력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이런 거란에 대해 고려는 태조 왕건 때부터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펼쳐왔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 거란은 고려를 1차 침공했다. 그러나 고려는 서희(徐熙)의 외교적 담판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강동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 제2차 침략을 시도했다. 별다른 소득 없이 철수한 거란은 1018년 12월 3차 침공을 단행했다. 거란 성종은 소배압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정복할 것을 명했다.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거란에 맞서 싸운다.


물밀듯 쳐들어오는 거란의 군사를 맞아 강감찬은 을지문덕식 수공작전을 사용했다.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은 후 거란군이 강을 건너자 물 보를 터뜨려 혼비백산하는 거란군을 공격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전술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했다. 거란군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아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그러자 소배압은 개경 함락을 위해 직할대를 직접 이끌고 신계까지 진출했다. 고려는 성 밖의 모든 작물과 가옥을 불태우거나 없애버리는 청야작전을 실시했다. 또한 후방보급을 차단하는 작전으로 개경사수의 의지를 불태웠다. 정월의 맹추위와 함께 식량보급이 끊어진 데다가 무리한 행군으로 지칠 대로 지친 거란군은 결국 개경을 눈앞에 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퇴하던 거란군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곳은 귀주였다. 이곳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이 대규모로 마주쳤다. 처음에는 양 진영이 팽팽하게 맞섰다. 하늘의 도우심인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강한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한 것이다. 남쪽에서 공격하던 고려군은 백만 원군을 얻은 듯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고려군이 쏘아대는 화살은 백발백중했지만 비바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거란 군이 쏘아대는 화살은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허공만 갈랐다. 강한 비바람을 등에 지고 고려군이 강력하게 진격해 들어가자 패닉 상태에 빠진 거란군이 등을 돌리며 패주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병사는 거란군의 목을 줍기만 하면 됐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이 공격을 시작할 무렵 바람의 급변과 함께 동시에 비가 내렸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기압골에서 자주 발생하지는 않는다. 온난전선 전방에서는 바람이 변하지 않아도 비가 내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랭전선의 이동이 빠른 경우, 즉 활강형 한랭전선이 형성된 경우 귀주대첩의 기상현상이 발생한다. 활강형 한랭전선 전방에 수직적인 구름이 발생하면서 강한 바람의 급변과 비가 동시에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2006년에 4월 19일에 있었다. 이때 강한 비구름은 충청 해안을 거쳐 내륙으로 이동하며 최고 순간풍속 20m/s 이상의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 이보다 바람이 다소 약한 15m/s 였다고 해도 거란군이 비바람을 맞보고 화살을 쏘는 것은 물론 정상적인 전투를 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후세의 사가들이 ‘귀주대첩’이라 이름 붙인 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이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할 만큼 고려는 놀라운 쾌승을 거뒀다. 그 이후 거란은 언감생심 고려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못했다. J. 미치너는 “한국인에게 영원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라고 했다. 당시 최강대국과의 싸움에서 단 한 치도 밀리지 않았던 원동력은 바로 이 애국심이 아니었을까?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Tip-강감찬 장군 天·地 통달 날씨 예측 전투에 이용


손자병법에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승산(勝算)을 점치는 다섯 가지로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을 꼽는다. 명장(名將)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첫째, 길 도(道)자 도다. 장수는 부하들과 목표와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조직의 분위기를 도가 있는 조직이라고 한다. 둘째로, 하늘 천(天)자 천이다. 외부적 환경에 대한 분석으로 기상조건을 가리킨다. 장수는 전투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날씨를 예측하고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땅 지(地)자 지다. 지형조건에 대한 분석이다. 장수는 어떤 지형을 선택해야 전투에서 승리할 것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장수 장(將)자 장이다. 장수의 능력을 뜻한다. 성품과 전투능력과 판단 능력 등을 두루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법 법(法)자 법이다. 조직과 편성, 임무의 정확한 배분, 군사물자의 적시 공급과 관리, 그리고 군법을 정확히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강감찬 장군은 이미 8살에 천문과 지리에 밝았으며 평생 천문지리를 공부했다고 한다. 날씨와 지형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즉 천(天)과 지(地)를 통달한 명장이었던 것이다. 사가들은 귀주대첩이 우연한 비바람의 도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강감찬 장군이 날씨를 미리 예측하고 이용해 전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승리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의 연구와 노력의 열매인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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