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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옛터 고구려가 개축..오랜 세월속 숨결만 남아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38>
중부일보 2010.11.08  남도일보 2012.09.19 14:39

<고구려 중심도시 요동성①>
기자조선의 땅…고구려가 차지한 뒤 240년간 다스려
성 안팎 주민 30만명 추산…동북지역 정치·경제·문화 중심지

심양(瀋陽)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는 요양(遼陽)은 필자가 여러 번 다녀온 곳이라서 잘 안다고 할 수 있지만, 고구려 역사가 그렇게 깊이 깃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요동 제1성’ 양평성을 개축하여 형성,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옛날 고구려시기 요동성(遼東城) 성터는 지금 요양시 시가지다. 요동이란 지명은 요하(遼河)와 관련된다. 중국의 7대 강으로 꼽히는 이 강은 발원지가 두 곳으로, 상류가 동요하와 서요하로 갈라져 있다. 서요하는 노합하(老哈河)라고도 부르는데 하북성에서 발원하여 하북, 내몽골, 길림성을 거쳐 요령성 철령(鐵嶺)지역으로 흘러들고, 동요하는 길림성 요원(遼源)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요령성 철령 경내에서 서요하와 합류한다. 사람들은 합류한 이 강을 요하라고 일컫는다. 두 줄기 물결이 합류된 이 요하강은 철령, 심양, 안산(鞍山) 지역을 거쳐 반금(盤錦) 경내에 들어선 다음 지류인 혼하강과 태자하가 합류된 강줄기와 합쳐지는데 그 지역을 삼차하(三叉河)라고 부른다. 삼차하는 또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른다. 한 갈래는 반금에서 발해(渤海)로 흘러들고 다른 한 갈래는 영구(營口)에서 발해로 유입된다. 이 두 강줄기는 원래 서로 통하였다 한다. 그런데 1950년 이후 삼차하에다 수문을 건설하여 인위적으로 두 물줄기가 제각기 바다로 흘러들게 하였다. 반금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쌍대자하(雙臺子河)라 부르고, 영구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대요하(大遼河)라 부른다. 요동은 바로 이 요하 중·하류 동쪽지역과 요남지역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다. 이 지역에는 끝없이 넓고 아득한 풍요로운 평원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 옛 성이 산재해 있는 백두대간과 이어진 용강(龍崗), 합달령(哈達嶺), 천산(千山) 등 산맥과 면면하게 기복을 이룬 구릉지들이 분포되어 있다.
 
“요동의 이 벌판을 언제면 다 지날꼬 / 열흘을 와도와도 산 하나 안 보이네 / 새벽별 말머리를 스치어 날아가고 / 아침해 발 사이서 돋아서 올라오네.”

200여년 전, 조선의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던 연암 박지원은 광막한 요동벌을 지날 때의 감회를 이렇게 시를 지어 읊조렸다.
 
고구려의 요동성은 바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요동벌 한켠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요동성 자리는 원래 기자(箕子)조선의 땅이었다고 한다. 후에 중국 전국7웅(戰國7雄) 중 하나인 연(燕)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이곳을 차지한 후 여기에다 양평(襄平)성을 축조하고 새로 설치한 요동군부(遼東郡府)의 수부(首府)로 삼았다. 그 후 서한(西漢) 왕망(王莽)시기에 이 성을 창평(昌平)성으로 고친 적이 있지만 동한, 삼국, 서진, 동진(북방에는 전연, 후연 등 정권) 몇 개 조대(朝代)가 이어서 교체되어도 600여년 동안 양평성으로 불려왔다. 기원 404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후 양평성을 손보아 고치고 그 성을 요동성이라 불렀다. 그 후 240년 동안 고구려는 계속 요동성을 다스려 왔다.

고구려에 의해 요동성이라 개칭된 양평성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제일 먼저 세운 옛 성이라 한다. 연나라에 이어 진(秦)나라 대장군 몽괄(蒙括)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양평성을 손질하여 그 규모가 늘어났고, 삼국시기 공손씨(公孫氏, 즉 공손도<公孫度>, 공손강<公孫康>과 공손연<公孫淵>)가 임금으로 자처하며 요동을 50여년 간 웅거(雄踞)하고 있을 때 또 양평성을 도읍지 못지않게 건설하였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양평성은 규모가 웅장하며 4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네 면에 문이 설치되어 있다. 성 안에는 정연한 거리가 있고 호화롭고 아름다운 궁전식 건축물이 있었으며, 성 내외에 주민이 4만여 세대, 인구는 30만 안팎이라고 한다. 그 당시 양평성은 요동뿐만 아니라 동북 전 지역에서 으뜸가는 큰 도회지로서 정치,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었다.

이곳이 옛날 고구려의 요동성이었다는 것은 1953년 조선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용봉리(龍鳳里)에서 5세기 이후의 ‘요동성총(遼東城塚) 고구려무덤이 발굴되면서 확인됐다. 그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에 고구려 요동성 성곽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로 인해 요동성은 그 위치뿐만 아니라 성곽의 배치와 내부 주요 건축물까지 밝혀지게 되었다.

요양 기차역광장에서 동으로 뻗은 널따란 큰 길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백탑공원 안에 높고 하얀 탑이 우뚝 솟아있다 이 전탑은 탑신(塔身)과 탑첨(塔첨)의 벽돌과 기와에 백토로 발랐다 하여 백탑이라 부른다. 800년이 넘은 이 백탑은 요양시 고대문화를 상징하는 요양 옛 성의 표지성 건축물이다. 이 탑 동쪽에는 백탑공원 동쪽 담장을 사이에 두고 두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담장 안은 광우사(廣佑寺) 사찰건축물이 늘어서 있고, 담장 바깥에는 요양 옛 성 남쪽 성지(城池: 즉 해자)와 이어진 서쪽 성지가 그 동쪽으로 2.5km 떨어져 있는 태자하강과 남북으로 거의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두 줄기 물 사이에는 현재 시가지 중심구역으로서 상점, 학교, 공장, 기관, 시장, 아파트단지 등 현대식 건물들이 꽉 차 있다. 이 가운데 동순성로(東順城路), 남순성가(南順城街), 서순성로(西順城路)와 북순성가(北順城街) 4개 큰 길로 둘러싸인 구역 안에 바로 고구려의 요동성 성터(역시 요양 옛 성터)가 있었다 한다. ’요동성총‘ 벽화에 의하면 요동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된 2중 성벽을 가진 성곽이다. 서남쪽을 차지한 내성 안에는 골기와를 얹은 2층집과 3층 누각이 있는데 그곳은 관공서가 있는 구역으로 보이고, 그 북쪽과 동남쪽으로 이어져 있는 외성은 상업구역이나 일반 주거지역으로 보인다. 성문은 세 개 설치되어 있다. 쌍층 문루가 쌓여있는 동문은 내성동문(역시 문루가 있음)을 중간에 두고 서문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이는 성 안에 동서로 큰 길이 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방의 성벽 위에는 적루(敵樓), 각루(角樓), 여장(女墻) 등 건축시설이 있다. 그리고 외곽성문 안쪽에는 아래위로 ’요동성‘이라는 한자 세 글자가 씌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당태종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들에 의해 요동성이 침공을 받아 위기에 몰렸을 때 성 안의 백성들이 주몽 사당에 모여 미인에게 옷을 차려 입힌 후 신에게 시집을 보내는 의식을 치렀다. 그러자 무당이 “주몽신이 기뻐서 성이 안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 당시 요동성 안에는 주몽 사당도 있었을 것이다.

옛날 금, 목, 수. 화, 토 5행(五行)설에 따라 요동성 성터에 쌓은 요양성을 두고 하는 이러한 말이 있었다. “성동갑을목(城東甲乙木), 성남병정화(城南丙丁火), 성서경신금(城西庚辛金), 성북임계수(城北壬癸水).” 이 말을 풀이하면 요양 옛 성 동켠 산간지역은 목재산지로 체벌한 나무를 고려문(高麗門)부두와 아방(鵝房)부두에서 배에 실어 태자하로 수운하고, 성 남쪽에는 불을 지펴 도자기를 굽거나 제철을 하며, 성 서쪽에는 철로 농기구, 병기와 생활용구를 만드는 공장이 있으며, 성 북쪽에는 흐르는 강이 있어 수로로 운송하기가 좋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요양성의 옛 성인 요동성도 지리 위치가 좋고 물산이 풍부하며 그 당시 번성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요동성은 비록 평지에 있지만 성벽을 튼튼하고 높게 쌓은 데다 요하와 혼하강 동쪽에 자리를 잡고 태자하를 동쪽과 북쪽의 천연적인 해자로 두어 쳐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요새였다. 이곳은 요동평원을 따라 남으로 안시성을 지나 건안성, 역성(力城: 즉 득리사산성), 비사성(현재 대련) 등 요동반도 남부지역으로 가고, 북으로 혼하강 하곡지대를 거슬러 올라 현토성(현재 심양), 신성(현재 무순)을 거쳐 국내성(현재 집안)으로 들어가며, 동쪽으로 천산산맥을 넘어 동남방향의 오골성(현재 단동의 봉황산성)을 지나 압록강 일대에 이를 수 있는, 또한 태자하와 요하를 이용해 발해와 서해로도 나아갈 수 있는 수륙교통 중추이자 고구려 서부방어망의 중요한 전략 거점이다. 요동성은 이렇게 여러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어 자연적으로 역대 정치세력이 쟁탈하는 중점목표로 됐다.

이런 요동성과 훗날 그 성터 위에 쌓았던 요양 옛 성은 긴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차 훼손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번창한 도시의 현대화한 건축물 숲이 그 자리를 지키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속삭이고 있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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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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