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cr.d_0006_0020_0060
평양천도의 역사적 경위
강세권(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연구사 학사)
일반적으로 수도는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해당 나라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것으로 하여 매 나라의 역사에서 수도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더우기 이러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고구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시기를 구획지은 427년의 평양천도 역시 그가 가지는 커다란 의의로 하여 주요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삼국시기 역사발전에서 중요한 사변의 하나였던 평양천도의 역사적 경위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고 한다.
고구려는 근 천년에 걸치는 존재기간 여러 차례의 ‘천도(수도옮김)’를 단행하였다. 그 가운데는 209년(산상왕 13년) 환도성으로의 천도나 247년(동천왕 21년) 평양성으로의 천도, 343년(고국원왕 13년) 평양동 황성으로의 임시이동과 같이 임시로 수도를 옮기는 경우도 있었고 3년(유리명왕 22년) 국내성으로의 천도, 427년 평양성으로의 천도와 같이 정식으로 수도를 옮기는 경우도 있었다. 또 평양 장안성과 같이 한 지역 안에서 위치를 옮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공식적인 천도는 국내성 천도와 평양성 천도 두 차례였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시기』의 기록 [주190] 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천도가 다 고구려 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기는 하지만 427년의 평양천도는 고구려 역사뿐아니라 삼국시기의 전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하여 더욱 중요시되는 사변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양천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목적에서 단행되었는가 하는 경위는 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고구려가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데 대하여 『삼국사기』는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극히 짧은 기록만을 전하고 있다. [주191] 국내성 천도라든가 임시 천도의 경우에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대체적인 경위가 전해지고 있다. 실례로 국내성 천도는 유리명왕 21년(2년) 봄에 교제(하늘을 대상으로 지내는 제사)에 쓸 돼지가 국내 위나암으로 달아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고 247년 평양성으로의 임시 천도와 343년 평양동 황성으로의 임시 이동은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파괴된 것과 관련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삼국시기 역사발전에서 중요한 사변의 하나였던 427년 평양천도의 경위가 단 한마디의 기록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까닭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은 잠시 뒤로 미루더라도 여기에는 그 어떤 온당치 못한 편견이 작용한 것과 같다.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양천도는 427년에만 있은 것이 아니라 247년과 343년에도 있었다. 그 때의 ‘천도’는 246년 위나라와의 전쟁, 342년 전연과의 전쟁으로 환도성이 파괴된 것으로 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427년의 평양천도 전야에는 그와 유사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4세기의 평양천도가 불가피한 것이었다면 5세기의 평양천도는 의도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평양천도의 경위를 밝히는 것은 결국 그 의도(목적)가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문제에 귀착된다. 그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를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건에서 고구려의 평양천도 경위는 천도 이전 시기의 역사발전 과정 즉 고구려를 둘러싼 대내외 정세와 그에 대처한 고구려의 정책을 통하여 고찰해보는 수 밖에 없다.
4세기 말엽에 이르러 고구려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변은 370연대 전반기에 있은 유주진출과 그에 뒤따른 고조선 옛 땅의 완전수복이었다.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발견된 벽화무덤은 고구려의 유주자사였던 진의 무덤이며, 벽화에 반영된 유주는 13군 75현을 거느린 고구려의 유주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수 세기 동안 나라의 기본정책으로 삼아오던 동족의 나라 고조선의 옛 땅 수복위업을 완수하였다.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는 세기적인 투쟁이 빛나게 결속되고 서북방의 정세가 점차 완화되어감에 따라 고구려는 점차 자기의 주공방향을 남쪽으로 돌리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남방에서 백제가 급속히 강화되어 고구려에 대항해 나서게 된 조건에서 이제 와서는 백제의 예봉을 꺾고 겨레와 강토를 통일하는 것이 목전의 긴절한 과업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370년대 초 이후 삼국통일을 위한 남방진출을 나라의 기본정책으로 내세우고 이 사업에 달라붙었다. 따라서 평양천도의 경위는 4세기 말엽 이후 시기 역사발전의 기본흐름으로 된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과정속에서 고찰해 보아야 한다. 4세기 말엽 우리 나라 중세 봉건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첨예하게 표면화 된 것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대립이었다. 이미 369년(고국원왕 39년)의 치양전투 이후 악화되기 시작한 고구려—백제관계는 371년 백제가 3만명의 무력으로 고구려의 남부지방을 공격하여 남평양성(황해남도 신원군 장수산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더욱더 적대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 시기로 말하면 고구려가 자기의 기본무력을 유주방면에 돌리고 있던 때였다. 이런 것으로 하여 고구려는 백제의 공세에 즉시적으로 대처 할 수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는 375년 7월 고구려에 의한 수곡성(황해북도 신계군 침교리) 함락 [주192] 을 계기로 하여 다시 재개되었다. 이것은 남쪽정세가 긴장해진 것과 관련하여 고구려가 유주방면에서 일부 병력을 떼내어 남쪽으로 돌린 결과 생겨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수곡성 전투의 승리는 고구려의 삼국통일을 위한 본격적인 진출의 첫 신호로 인정되고 있다. [주193] 그러나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백제의 완강한 저항과 대륙정세의 변화, 고구려의 내부사정으로 하여 380년대까지 이렇다할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377년 10월 백제가 3만명의 무력으로 고구려의 평양성(남평 양성)을 공격한 데 대하여 고구려가 반격을 가하여 다음달에 백제땅으로 진격해들어간 사실, [주194] 이듬해인 378년 9월 거란족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납치해간 사건, [주195] 380년대 초 후연침략 세력의 대두, 380년대 후반기 백제와의 일진일퇴 등으로 하여 고구려는 남북방의 방비를 동시에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378년과 388~389년 고구려에서는 심한 가뭄과 병해충의 피해로 농사가 잘 안되고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자 그에 대한 구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196] 이러한 제반조건은 고구려가 남방진출을 과단성있게 추진시키는 데서 일정한 장애가 되었다.
고구려의 남방진출은 역사에 유명한 광개토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섰다. 391년에 이르러 백제가 손아래 동맹자인 북부 규슈의 왜 세력을 끌어들여 고구려에 대항해 나선 조건에서 광개토왕은 서남쪽으로 백제에 대한 타격을 가하는 한편 동남쪽으로 신라를 보다 적극적으로 인입 하는 전술로 나갔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조 기사는 바로 삼국간에 조성된 이러한 사태발전의 경위를 반영한 것이다. 392년 7월 광개토왕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북방으로 쳐들어가 석현성을 비롯한 10여개 성을 함락시켰고 뒤이어 10월에는 백제북방의 요충인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만에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백제의 예성강 방면으로의 진출을 봉쇄하고 임진강 하류지역을 제압하였으며 앞으로 한강너머로 진출할 수 있는 요진통을 틀어쥐게 되었다. 이후 395년까지 백제가 여러차례의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고구려의 강력한 힘에 대항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396년 백제에 대한 또 한 차례와 대규모적인 공격을 단행하여 50여개 성을 함락시켰고 계속하여 백제 수도성에 대한 압박 공세를 취하여 백제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녀생구(노비) 1000명, 가는베 1000필, 58개성, 700촌지역 ,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의 볼모 등을 획득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광개토왕릉비 영락 6년의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고구려왕의) 노객이 되겠다.”는 기사로 나타났다. 이것은 고구려의 거대한 승리였으며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획기적인 사변이었다. 저들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고구려에 대항할 수 없다고 타산한 백제는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고구려의 신민이며 피보호국인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요청에 따른 고구려의 출병으로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이 399 ~ 400년 전역이었다.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공세는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광개토왕시기 고구려의 세력확장이 남방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더라도 395년의 비려정벌, 398년의 식신정벌, 410년의 동부여정벌을 비롯하여 북쪽방면으로의 진출도 현저히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 고구려는 서북방의 침략세력인 후연과의 전쟁(400 ~ 406)도 치뤘다. 이것이 4세기 말 ~ 5세기 초 고구려를 둘러싸고 일어난 대내외 정세의 대체적인 흐름이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기 즉 광개토왕 시기에 고구려의 기본역량이 북쪽보다도 남쪽으로 더 치중된 사실이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을 고찰해보면 광개토왕시기에 진행된 정벌사건은 모두 8차례였다. 그 가운데서 신묘년(391), 영락 6년(396), 10년(400), 14년(404), 17년(407)의 사건은 남쪽의 백제—가야—왜 세력을 대상으로 진행된 것이고 나머지 영략 5년(395), 8년(398), 20년(410)의 사건은 비려, 식신, 동부여 등 북쪽방면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남쪽방면으로 진출사건은 5건으로서 북쪽방면의 3건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197] 이것은 당시 고구려가 자기의 기본정책을 삼국통일에 두고 있었으며 또 여기서 주도세력으로 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는 삼국시기의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당시의 정세를 좌지우지하는 강대한 존재였다. 평양천도는 바로 이러한 환경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평앙이 천도의 대상으로 정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을 밝힐 수 있는 실마리를 247년 평양으로의 임시 천도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동천왕 21년(247)에 고구려는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 사직을 옮겼다. 그러면서 『삼국사기』는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거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주198] 여기서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전해인 246년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부수도였던 환도성이 파괴된 사건으로서 247년 평양천도의 경위를 전한 것이다.
기록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평양이 본래 ‘선인 왕검의 거처’라고 한 것이다. 결국 이때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환도성이 파괴된 데도 원인이 있지만 주된 원인은 평양이 ‘선인 왕검의 거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인 왕검의 거처’란 두말할 것도 없이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 살던 곳 즉 고조선의 수도를 가리킨 것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주몽)이 단군의 아들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주199] 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평양을 자기 조상의 발상지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따라서 평양으로의 천도는 고조선의 도읍지, 자기 조상의 발상지로 되돌아온 것이라고 할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의 평양에 대한 애착은 광개토왕시기에 와서 더욱 강렬한 것으로 되었다. 그것은 광개토왕이 자주 평양을 순행하였다는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평양천도가 광개토왕시기에 벌써 고구려의 국가정책으로 추진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393년에 평양에 9개의 불교사원을 한번에 세운 것 [주200] 도 가까운 앞날에 평양은 기본수도로 만들기 위한 조치의 하나였다고 인정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의 재위연대가 한해씩 차이나므로 광개토왕 2년은 3년 즉 393년의 일로 보아야 한다. 5세기 초에 이르러 삼국통일 정책이 더욱 더 본격적인 단계에서 추진된 결과 평양천도는 매우 긴박한 문제로 제기되었으며 이러한 필요성으로부터 427년(장수왕 15년)에 마침내 평양천도가 단행된 것이다. 안학궁과 대성산성 일대가 바로 427년 평양천도 당시의 중심지였다. 최근에 진행된 안학궁에 대한 조사과정에 그것이 더욱 확증되었다.
평양천도의 역사적 경위는 대체로 이상과 같다. 고구려 역사에서 평양천도가 매우 큰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었다는 것은 그후 고구려가 더욱 강력한 나라로 발전한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사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천도의 경위라든가 의의는 지난 시기의 기록들에서 완전히 도외시되어 왔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 까닭에 대하여 밝혀보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졸본에 첫 수도를 정한 경위와 3년 국내성 천도의 이유에 대하여 설화적인 방법으로라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여러차례 진행된 천도의 이유에 대해서도 밝혔다. 그런데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사실에 대하여서는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한마디 기록만을 남겼고 지리지에서는 “평양성은 지금 (고려)의 서경인듯 하다.”는 식의 모호한 표현을 썼다. 이것을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그 편찬자가 평양천도의 경위를 입증할만한 사료를 알지 못하였거나 그에 대한 주견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관사료들을 따져보면 사실은 정반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말년에 남긴 『10훈요』에서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요 대업만대의 땅”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왕들이 해마다 백날 이상 서경 즉 평양에 머무르도록 한 것이나 고려 초에 서경으로 천도할 논의가 고려조정에서 이루어진 사실은 고려의 지배층안에서 평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자처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평양의 중요성이란 다름아닌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어느모로 보나 타당하다. 그것은 993년 고려를 침략한 거란군과의 담판석상에서 “우리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그래서 국호도 고려라고 했고 수도도 평양에 정했다.”고 한 서희장군의 당당한 선언 [주201] 을 통하여 입증할 수 있다.
평양천도와 관련한 김부식의 입장을 해부하는 데서 주목되는 것은 1135년에 서경(평양)에서 일어난 묘청의 반란사건이다. 반란은 김부식을 비롯한 경주출신의 개경양반들이 정권을 독차지하고 금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일삼은 것을 계기로 하여 일어났다. 묘청과 류감, 조광을 비롯한 서경양반들은 옛날의 고구려처럼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면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경양반들의 평양천도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게 한 기본 장본인이 김부식 일파였다.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여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는 데 동원된 토벌군의 총지휘자 역시 김부식이었다. 이러한 김부식이 그로부터 10년후인 1145년에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겠는가 하는 것은 불 보듯 명백하다. 평양천도와 같은 고구려 관련 역사적 사실들은 김부식을 비롯한 경주출신 양반들에게 있어서 환영할 만한 일이 못 되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에서는 우리 나라 역사발전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고구려의 평양천도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평양천도의 경위가 무시된 것은 바로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의 지위를 깍아 내리고 나아가서 고구려의 강대성을 극력 왜소화하려는 김부식의 불순한 정치적 목적에서 산생된 것이라고 밖에 달리는 볼 수 없다. 이것은 평양천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가릴수 없는 법이다. 427년 평양천도 이후 시기의 역사적 사실은 평양천도가 고구려의 사회 역사발전, 나아가서 우리 나라 중세기의 사회 역사발전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주
주 190 『삼국사기』권37, 지리지, 고구려.
주 191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15년 ; 권37, 지리지, 고구려.
주 192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5년 7월 ; 권24,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7월.
주 193 1990, 『고구려사』1(과학백과사전출판사), 292쪽.
주 194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7년 10월, 11월, 8년 ; 고국양왕 5년, 6년.
주 195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7년 10월, 11월, 8년 ; 고국양왕 5년, 6년.
주 196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7년 10월, 11월, 8년 ; 고국양왕 5년, 6년.
주 197 영락 9년(399) 신라의 청병사건까지 환산하면 남쪽방면으로의 진출사건은 북쪽방면보다 2배나 된다.
주 198 『삼국사기』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21년.
주 199 『삼국유사』권1, 왕력, 고구려 동명왕.
주 200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2년.
주 201 『고려사』권94, 열전,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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