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ocutnews.co.kr/news/5248539


생(生)의 기억조차 말살…제주 4·3 수장 학살의 비극

제주CBS 이인 기자·고상현 기자 2019-11-25 05:00 


[대마도가 품은 제주 4·3 ①] 70년 전 제주에서 무슨 일이


군·경, 초토화 작전 시기 제주 전역에서 수장 학살 자행

먼바다까지 끌고 가 몸에 돌 매달거나 총살 뒤 빠트려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500명도 산지항 앞바다에 수장

재판도 없이 임의 처분…시신 일본 대마도까지 흘러가


지금은 국제여객터미널까지 확장한 제주항. 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북부 예비검속 희생자 500여 명이 어선 10척에 실려 제주항 앞바다에서 수장됐다. (사진=고상현 기자)


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만 3만여 명. 이 중 '수장' 학살 희생자는 먼 타국 대마도까지 시신이 흘러가 여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대마도 주민이 시신을 거둬주고 위령하고 있을 뿐이다. 제주CBS는 대마도 현지에서 '역사의 어둠 속에 묻힌' 그들을 추적했다. 25일은 첫 순서로 70여 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수장 학살을 조명한다. [편집자 주]


제주 4‧3 당시 '수장(水葬)' 학살은 그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고, 시신을 수습할 수조차 없어 가장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희생자들은 배에 실려 먼바다에서 총살당하거나 몸에 돌이 매달린 채 물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야 했다.


◇ "먼바다에서 돌 매달아 빠트리거나 총살 뒤 수장…"


4·3 수장 학살 희생자 김기유 씨의 시신이 떠밀려온 제주 사라봉 해안. (사진=고상현 기자)


4‧3 당시 수장으로 학살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군‧경이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는 인근 바다로 나가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돌을 달아매 물속에 빠트렸다. 또 배 위에서 총을 쏴 바다로 던졌다.


민간인에 대한 첫 수장은 1948년 11월 5일에 이뤄졌다. 이 시기는 군‧경이 제주 전역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당시 제주에 주둔하던 제9연대는 사상범으로 분류된 직장인 30여 명을 재판도 없이 제주 앞바다에 수장했다.


이 수장 학살은 사건 발생 18일 만에 한 시신이 제주시 사라봉 밑 해안가에 떠오르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그 시신은 신한공사 제주농장의 직원이었던 김기유(당시 26세)씨였다. 이후 김 씨 시신을 포함한 몇 구만 수습됐을 뿐 나머지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친정집으로부터 동생이 바다에 던져진 것 같으니 사라봉과 삼양 해안을 찾아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배에 동생을 싣고 갔던 선원을 만나 산지부두와 관탈섬 사이(제주시) 바다에 33명이 던져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기유 씨 누나 김기순 씨의 증언)


이러한 수장 학살은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진행됐다. 제주도에 수장 학살 희생자로 신고된 명단을 보면 이 시기 희생자들이 '제주시 건입리 앞바다' '서귀포 앞바다' '모슬포 앞바다' 등에 수장된 사실을 알 수 있다.


4·3 당시 정방폭포에서 아버지를 잃은 오순명(76)씨. 오 씨 뒤로 정방폭포가 보인다. (사진=고상현 기자)


이 밖에도 이 시기 제주도 전역의 모래사장이나 해안가에서 총살됐다가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도 대마도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있다. 썰물에 의해 시신이 바다로 흘러갔다가 해류에 의해 대마도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48년 11월 초 해안가와 인접한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총살로 아버지를 잃은 오순명(76)씨는 "서귀포시 중문면, 안덕면 주민들이 정방폭포에서 총살되거나 죽창으로 살해돼 폭포 아래로 떨어졌다. 시신을 찾은 유가족도 있지만, 100여 구는 여태껏 수습을 못 했다"고 말했다.


◇ 예비검속 500명, 배 10척에 실려 제주 바다에 수장


수장 학살은 초토화 작전 시기에만 집중된 게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제주경찰서에 예비검속으로 연행됐다가 같은 해 7월과 8월 사이 제주항 앞바다에서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500여 명도 잔인하게 수장됐다.


4·3 당시 제주경찰서가 있었던 제주목관아지. (사진=고상현 기자)


그 당시 오빠 김임배 씨를 수장 학살로 잃은 김이선(88·여)씨는 "경찰서에 수감된 오빠에게 옷을 주려고 갔더니 경찰관이 없다고 했다. 그 경찰관 말로는 오빠를 배에 태워서 3시간 정도 바다에 나간 뒤 총 쏘아 죽이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트렸다"라고 증언했다.


김 씨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잃은 강창옥(83)씨도 "1950년 7월 중순쯤 아버지가 다른 주민 500여 명과 함께 알몸으로 배에 실려 가 수장당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그해 8월 대마도에서 시신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들었다"고 흐느꼈다.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있다.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제주항 부두에 파견돼 경비를 섰던 故 장지용 씨는 생전에 "1950년 한여름 밤 알몸 상태의 500여 명이 배 10여 척에 태워져 바다로 나갔는데 한참 지나고 배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 "수장에는 고기잡이배가 이용됐는데 수장 닷새 전 제주시 탑동에서 먹돌을 가져다가 배에 싣고 있었고, 먹돌에 손가락 굵기만 한 줄을 매다는 것을 근무 중에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 재판도 없이 무더기로…시신 흔적까지 없애


2014년부터 3차례에 걸쳐 대마도에서 4·3 수장 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열고 있는 나카타 이사무(71) 한라산회 고문. (사진=고상현 기자)


수장 학살 과정은 이처럼 개인마다 다르지만, 비밀리에 자행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특히 정식재판 없이 불법적으로 임의 처분됐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없다. 무더기 학살로 나중에 후환이 있을까 봐 청소하듯 시신의 흔적까지 없앤 것이다. 수장 학살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일본 대마도까지 대마난류를 따라 시신이 떠밀려온 사실을 안 뒤 지난 2014년부터 3차례 위령제를 열고 있는 일본인 나카타 이사무(71) 한라산회 고문은 4‧3수장 희생자를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말살당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살았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 생각한다. 지금 대마도에 수장 학살 희생자 시신 수백 구가 표착이 됐는데, 살았다는 기억조차 누가 없애 버렸다. 이렇게 먼 타국에 버려져 있다는 것이 4‧3 사건의 잔인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김수열 시인은 <물에서 온 편지>라는 시에서 4‧3 수장 학살 희생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거기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없듯이 /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없어 / 그게 슬픔이구나 / 봉분 하나 없다는 게 서럽구나 안타깝구나 / 그러니 아들아 / 바람 불 때마다 내가 부르는가 여기거라 / 파도 칠 때마다 내가 우는가 돌아 보거라"


제주 4·3 당시 제주 앞바다에서 수장된 희생자 시신들은 대마난류를 따라 대마도까지 흘러 갔다. 24일 오후 제주항 앞바다 모습. (사진=고상현 기자)

kossang@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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