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ispy.d_0001_0020_0020


고려시대 서경성


태조 왕건은 원년 9월에 평양 옛 도읍이 황폐한지 오래지만, 그 기지(基址)가 오히려 존재하고 있는데 번인(蕃人)의 근거지가 되고 있다면서 황주 등의 인호(人戶)를 이주시켜 대도호로 삼고 당제 식렴을 보내 지키게 하였다. 이는 고려의 서경성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기초로 하여 축조되었다.


고려시대 당시의 평양성(이하 서경성) 규모나 현황은 기록이 소략하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다. 여기에서는 서경성의 구조에 대해서 고려시대 문헌과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검토해 보겠다.

고려시대 서경성 축성에 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1) 태조 2년(919) 10월 평양에 성을 쌓았다. [주9] [주10


2) 태조 5년(922) 서경에 행차하여 官府員吏를 새로 두고 在城을 始築하였다. [주11] [주12


3) 태조 21년(938) 西京羅城을 쌓았다. [주13


4) 定宗 2년(947) 봄에 西京王城을 쌓았다. [주14] [주15


5) 현종 2년(1011) (송악성을 증수하고) 西京皇城을 쌓았다. [주16

 

위 기사를 보면 태조 2년 평양에 쌓은 성은 왕건의 즉위 초 금수산 일대에 긴급한 방어에 필요할 정도의 규모로 쌓은 성이 아닌가 한다. 태조의 행제소가 을밀대 남쪽인 관풍전 부근에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태조 2년에 금수산 기슭에 성을 쌓았으며, 5년에는 관부를 설치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2년 성의 바깥쪽에 재성을 쌓았으며, 통일을 완수해 여유가 생긴 21년에는 재성 바깥 쪽에 나성을 건설하였다. 정종은 서경 천도를 위해 2년에 궁전과 그것을 보호하는 궁성인 왕성을, 현종은 2년에 개경과 동격의 궁궐을 경영하기 위해 궁성 바깥쪽에 황성을 건축하였다. 현종 2년 이후 서경성은 재성(在城)과 나성(羅城), 왕성(王城), 황성(皇城)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대해 외성은 나성, 내성은 재성, 그 안에 황성과 궁성으로 생각된다. 나성과 재성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며, 황성 및 궁성은 국가의 위엄 과시와 국왕을 위한 시설의 보호가 주목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평양성의 윤곽은 대체로 고려 말의 것을 이어받았고, 고려말 평양성의 윤곽은 고려전·중기의 것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서경성 축성기사와 묘청의 난이 끝난 후에도 당시 성곽과 궁궐이 모두 보존되었다는 김부식의 전승보고 내용 [주17] 을 통해 보면 중첩된 성곽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묘청의 난 당시 서경성은 김부식이 1135년 2월에 서경이 북으로는 산을 등지고 3면은 물로 막혔으며 성이 높고 또 험하여 졸연히 함락시키기는 어렵기에 지구전을 펼쳐야 한다는 내용을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서경성 전투에서 김부식 군대는 토산을 일으켜 양명포를 넘어 화공으로 양명문을 불 태웠는데, 북한에서는 양명문을 나성의 서문인 다경문으로 보고 있으며, 선요문을 양명문의 북쪽에 위치한 나성의 서문으로 보고 있다. 개경군의 진경보 부대는 양명문으로 들어가 목책을 뽑고, 연정문을, 지석승 부대는 성을 넘어 들어가 함원문을, 이유 부대는 성을 넘어 홍례문을, 김부식의 본대는 광덕문을 공격하였다. 이 때 외성을 넘어 공격한 연정문, 함원문, 홍례문, 광덕문은 재성(내성)의 남문들로 여겨진다. 함원문은 함구문으로, 흥례문이 정남문(후에 정양문)으로 여겨진다. 윤언이의 중군은 칠성문을 공격하여 심하게 파손시켰으며, 경창문에 가서 효유하여 적장 홍걸의 항복을 받는다. 칠성문은 을밀대 근처에, 경창문은 칠성문 남쪽의 만수대 근처로 보인다. 을밀대~만수대 지역은 황성 중에서도 궁성이 자리잡는 곳으로 칠성문과 경창문은 황성의 문으로 파악된다. 경창문은 서문으로, 북두칠성과 관련되는 칠성문은 북문으로 판단된다. 당시 중성의 성문에 대해서는 그 후 기록이 나오지 않으나, 도면 3을 통해 보면 조선시대에는 암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서경성은 몽골군의 전쟁 속에서 파괴되었다. 원간섭기 이후 공민왕의 반원개혁이 진행되면서 서경성의 일정한 부분이 복구되어 내성이 되었다. 이 내성은 홍건적의 침략으로 불타는데, 조선은 건국 초기에 이를 복구하여 평양부의 부성(내성)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기사 내용은 조선 초기 평양부 기록과 조선 후기 고지도에서 보이는 현황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 009 冬十月城平壤. 『高麗史』. 卷1 世家1 太祖 2년

주 010 太祖二年城龍岡縣一千八百七間門六水口一. 城平壤.『高麗史』. 卷82 志36 城堡, 太祖 년간

주 011 幸西京新置官府員吏始築在城. 城平壤.『高麗史』. 卷1 世家1 太祖 5년

주 012 太祖 五年始築西京在城在者方言畎也. 凡六年而畢.『高麗史』. 卷 82 志36 城堡, 太祖 년간

주 013 築西京羅城.『高麗史』. 卷82 志36 城堡 太祖 년간

주 014 二年春築西京王城.『高麗史』. 卷2 世家2 定宗 2년

주 015 定宗二年城德昌鎭又築西京王城及鐵甕三陟通德等城. 城德成鎭. 『高麗史』. 卷82 志36 城堡 定宗 2년

주 016 顯宗二年增修松岳城築西京皇城. 『高麗史』. 卷82, 志36 城堡 顯宗 2년

주 017 於是入淮西而宣布上意如解倒懸復長安而撫綏遺黎盖云歸處豈特市廛之不改巍乎城闕之俱存… 『高麗史』. 卷98 金富軾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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