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cr.d_0008_0020
Ⅱ. 안학궁
안학궁성(安鶴宮城)은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安鶴洞)에 있는 왕궁성인데 5세기 초엽에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건설한 성이다. 궁성은 동·서 두 벽을 서쪽으로 10° 치우치고 남·북 두 벽은 북쪽으로 6° 치우쳐 평면생김새가 능형에 가까운 네모진 성이다. 성벽 한 변의 길이는 622m이고 그 둘레는 2,488m로서 넓이는 약 38만㎡에 달한다.〈사진 242〉
성안의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다. 성의 동·서의 두 성벽은 낮은 지대에 있다.〈도면 15, 16〉
〔도면 15〕 안학궁실측도
〔도면 16〕 발굴전 안학궁터 실측도
남쪽 성벽은 직선으로 되어 있는데 성벽의 표면은 모두 붉은 진흙으로 덮여 있었다. 성벽의 밑은 돌로 쌓고 그 위에 흙으로 쌓았다. 성벽 맨 밑의 너비는 8.2~10m인데 성벽의 안과 바깥 양쪽에는 성돌들을 70° 정도 안으로 약간 경사지게 계단식으로 쌓아올렸다. 성돌은 모두 대성산에서 가장 흔한 굳은 돌인 사암을 4각추 모양으로 다듬은 것인데 대체로 길이 40~60cm, 두께 25~30cm 정도 되는 것이다. 성벽은대개진흙에작은돌을섞어서쌓은것이많다. 맨밑의 성돌은비교적큰것을 썼다.돌로 쌓은 성벽의 높이도 지점에 따라 같지 않은데 대체로 성벽의 바깥쪽이 더 높고 안쪽이 낮다. 남쪽 성벽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그 높이는 바깥쪽이 60~240cm이고 안쪽이 35~240cm다.〈도면 17〉, 〈사진 243~249〉
〔도면 17〕 남쪽 성벽 단면도
돌로 쌓은 성벽 위에 흙으로 쌓은 성벽은 70~80° 경사도를 가지고 쌓아올려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졌는데 흙과 석비레를 섞어서 50~80cm 두께로 층층이 다졌다. 흙으로 쌓은 부분의 밑너비는 보통 3.3m이지만 성벽이 꺾어지는 모서리 부분은 3배가 넘는 11.2m다. 모서리의 성벽은 무너지기도 쉽거니와 그 위에 ‘각루’를 짓기 위하여 성벽을 이렇게 두텁게 하였던 것이다.〈도면 18〉
〔도면 18〕 남문기초와 성벽의 실측도
동쪽 성벽은 안학궁 성벽 중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있다. 이 성벽의 남쪽은 안으로 못자리가 있고 밖으로는 해자자리가 있어 원래 이 동쪽 성벽의 일부는 물 가운데 서 있게 되어 있었다.〈사진 251~264〉
성벽을 쌓은 방법은 남쪽 성벽과 같은데 이 성벽의 남쪽 부분은 양쪽에 물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길이 1m 정도 되는 큰 돌을 썼으며 흙도 굳게 다져 성벽 밑부분을 더 튼튼히 한 것이 특징이다. 이 성벽의 성돌도 남쪽 성벽처럼 생토가 나올 때까지 파고 다진 다음 60~70° 경사각을 이루게 쌓아올렸으며 돌로 쌓은 높이는 보통 5~7단에 110~160cm이다. 돌로 쌓은 성벽 위로 진흙을 다져 80° 경사각으로 토성을 쌓았는데 이 토성벽의 흙도 많이 흘러내려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성벽의 지형이 높은 곳(북쪽)은 지금 성의 높이가 160~220cm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지형이 낮은 곳(남쪽)은 이보다 훨씬 높이 남아 있다.〈도면 19〉
〔도면 19〕 동쪽 성벽 실측도
서쪽도 낮은 지대이므로 성벽은 동쪽 성벽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쌓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보통 5~7단이며 그 높이는 125~160cm이다. 그러나 성벽의 두께가 13m나 되는 남쪽 모서리부근의 성벽은 그 앞에 있는 해자에 물이 차는 것을 고려하여 돌을 15단이나 쌓아올렸으며 그 높이는 240cm나 된다. 이 성벽도 윗부분은 흙에 돌을 섞어서 쌓아올렸는데 현재 제일 잘 남아 있는 곳은 그 높이가 550cm 되는 남쪽 부분이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지형이 높아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점차 낮아졌다. 토성벽의 경사도는 60~70°이고 돌로 쌓은 부분은 70~80°이다.〈도면 20, 21〉, 〈사진 265~271〉
〔도면 20〕 서쪽 성벽 실측도
〔도면 21〕 서쪽 성벽의 안길 실측도
북쪽 성벽은 지형이 가장 높은 곳에 있었으므로 성벽이 그리 높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발굴결과에 따르면 그 높이가 350~550cm나 되었다. 성벽 바닥 부분의 두께는 810~830cm이며 성벽은 5~9단 돌로 쌓아올렸는데 그 높이는 115~200cm이다. 성돌은 10~20cm씩 안으로 들어가면서 계단식으로 쌓았다. 성벽의 안과 윗부분은 역시 진흙에 돌을 섞어서 다졌는데 다른 성벽보다 돌을 적게 쓰고 흙을 많이 썼다. 성벽의 경사각은 60~70° 정도로서 다른 성벽에 비하여 좀 덜 급하다.〈사진 272~276〉
북쪽 성벽을 발굴하는 과정에 북문 동쪽 성벽 세 곳에 직경 25cm 되는 기둥을 세웠던 구멍이 드러났다. 기둥구멍은 성벽의 양쪽 옆과 중심에 있는데 기둥 사이는 각각 4m이다. 이 기둥구멍은 성벽을 쌓을 때 여기에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판자를 댄 후 흙을 층층이 다져 넣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다.〈도면 22〉
〔도면 22〕 북쪽 성벽 실측도
안학궁의 성문은 토성의 남쪽 성벽에 3개, 동쪽과 서쪽 성벽에 각각 1개, 북쪽 성벽에 1개, 모두 6개 있고 남쪽 성벽에는 또 ‘수구문’자리가 있다. 안학궁의 성문들은 후세의 성문과는 달리 한 채의 큰 집을 지었던 주춧돌 자리만 남아 있다.
남문은 3개의 문자리가 일정한 사이를 두고 나란히 있다.〈사진 277~280〉
가운데 남문은 토성 남쪽 벽 중심에 있다. 문의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들은 모두 없어지고 주추자리돌들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3개씩 8줄로 배열되어 있다. 성문터 전체의 길이는 45.6m이고 너비는 18m이다. 주추자리돌은 둥글고 그리 크지 않은 돌들을 다져 깔아 만들었는데 그 두께와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땅이 굳은 곳에 작은 기둥을 세우는 데는 돌을 덜 두껍게 깔았고 땅이 무르거나 큰 기둥을 세우는 데는 돌을 더 두껍게 깔았다. 주추자리돌의 두께는 1~1.7m인데 앞줄의 것은 1.2m이고 가운뎃줄의 것은 1~1.2m이며 뒷줄의 것이 1.4~1.7m로서 제일 두껍다. 주추자리돌은 모두 둥글며 그 직경이 3m 되는 것과 3.5m 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앞줄 8개는 직경이 3.5m이고 가운뎃줄과 뒷줄 16개는 직경이 모두 3m이다. 주추자리돌 사이의 길이도 같지 않다. 이 성문은 정면이 7간인데 맨 가운데 간이 6.1m로서 제일 넓고 그 양쪽 간은 각각 5.1m씩 되며 그다음 간은 6m이고 양쪽 끝의 간들은 4.6m로서 제일 좁다. 성문의 측면은 2간인데 2간이 다 5m이다. 앞줄 양쪽 마지막 자리돌 2개만은 1m 더 나와서 뒷줄과의 사이가 6m이고 또 그 옆으로도 다른 것보다 0.6m 더 넓다. 따라서 이 주추자리돌의 총 길이는 37.5m이고 너비는 10m이다. 성벽은 성문 양쪽 마지막 기초시설 중간에서 성문과 맞닿았다.
이 성문의 기둥자리돌 사이의 너비로 보아 맨 가운데 간에 제일 큰 중심문이 달려 있었고 그 양쪽 옆간은 문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다음의 6m 너비의 간들은 또 문으로 되어 있으며 옆의 간들은 문이 없는 간이었다고 생각된다.〈도면 23, 24〉
〔도면 23〕 가운데 남문터 실측도
〔도면 24〕 가운데 남문기초
남문에서 동쪽으로 95m 되는 성벽에 동쪽 남문이 있다.〈사진 281~288〉
성문터의 크기는 정면 길이가 46m이고 너비는 18m이다. 안학궁토성의 6개 문 중에서 이 문이 제일 크다. 이 문자리의 주추자리돌도 8개씩 세 줄로 되어 있으므로 24개다. 가운데 남문의 주추자리돌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는데 앞줄의 8개는 직경 3.5m이고 가운뎃줄과 뒷줄의 16개는 직경 3m이다. 그리고 자리돌들의 두께도 1.2~1.5m로서 가운데 남문의 것과 비슷하다.〈도면 25, 26〉
〔도면 25〕 남동문터 실측도
〔도면 26〕 동쪽 남문의 기초와 성벽 단면도
서쪽 남문은 가운데 남문에서 서쪽으로 90m 되는 곳에 있다.〈사진 289~297〉 이 성문도 주춧돌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그 자리돌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주추자리돌들은 7개씩 세 줄로 배치되어 있는데 다른 두 남문보다 한 줄에 1개씩 적다. 이 성문터의 정면 길이는 36m이고 너비는 역시 18m이다. 남쪽 성벽에 있는 3개의 문 중에 이 문이 제일 작다. 주춧돌시설은 다른 성문의 것과 다름이 없다.〈도면 27, 28〉
〔도면 27〕 남서문터 실측도
〔도면 28〕 서쪽 남문의 기초와 성벽 실측도
동쪽 성벽에는 문자리가 하나 있다. 이 문자리는 동쪽 성벽 남쪽 끝에서 283m 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성벽의 중심에서 28m 남쪽에 치우쳐 있는 것으로 된다. 성문터의 앞면 길이는 30m이고 너비는 15.6m이다. 주추자리돌은 6개씩 세 줄로 배열되어 있다. 따라서 앞뒤 5간씩 10개의 문이 서 있던 자리라고 볼 수 있다. 6개로 된 주추자리돌 한 줄의 길이는 23.3m이며 맨 가운데 문간의 너비는 5.7m로서 제일 넓다. 가운데 문간의 다음에 있는 양쪽 문간 너비는 모두 4.5m이고 양쪽 옆에 있는 문간 너비는 둘 다 4.3m이다. 주추자리돌들을 만든 방법은 다른 성문과 똑같다. 이 성문은 성안에서 제일 낮은 지대에 있으며 성벽 밖으로는 해자가 있다.〈도면 29〉
〔도면 29〕 동문터 실측도 및 동문터의 남쪽·북쪽 벽 정면도
서쪽 성벽에도 1개의 문자리가 있는데 이 성벽의 남쪽 끝에서 265m 되는 곳에 있으므로 동쪽 성문과 같이 성벽의 한가운데서 남쪽으로 57m 치우쳐 있는 것으로 된다.〈사진 288~304〉 성문의 주추자리돌시설도 동쪽 성문과 같이 6개씩 세 줄로 되어 있다. 양쪽 옆의 주추자리돌시설은 2개씩 연속되어 있어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가운데 있는 6개는 장방형이다. 주추자리돌의 길이는 21.6m이고 옆으로 3줄의 너비는 8.6m이며 성문터의 앞면 길이는 29m로서 주추자리돌시설의 길이보다 크며 너비는 14.6m이다. 주추자리돌의 사이는 중간이 6m이고 그 양쪽의 간은 각각 4.3m이며 옆간의 사이도 역시 4.3m씩이다. 둥근 주추자리돌의 크기는 다른 성문의 주추자리돌 크기와 비슷하다. 이 성문자리에는 둥근 주추자리돌과 함께 장방형의 긴 주추자리돌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것은 북문에도 있다.〈도면 30, 31〉 이 성문도 낮은 지형에 있었는데 성 밖으로는 해자가 있다.
〔도면 30〕 서문터 실측도 및 서문터의 남쪽·북쪽 벽 정면도
〔도면 31〕 서쪽 성문의 기초와 성벽 실측도
북쪽 성문은 북쪽 성벽의 중심에서 서쪽으로 90m가량 치우쳐 있으며 6개의 성문 가운데 제일 작다.〈사진 305~313〉 이 성문터의 길이는 29m이고 너비는 15.2m이다. 또한 주추자리돌들의 전체 길이는 20.7m이며 너비는 9m이다. 이 성문의 주추자리돌은 둥근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 큰 장방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추자리돌은 4개로 되어 있다. 이 4개의 장방형의 주추자리돌은 크고 작은 것 두 가지인데 가운데 있는 것 2개는 작고 양쪽 옆의 2개는 그의 배나 되는 큰 것이다. 북쪽 성문과 성벽이 맞닿은 부분의 기초시설을 쌓은 방법은 서쪽 성문과 같다.〈도면 32〉
〔도면 32〕 북쪽 성문터 실측도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또 물을 성 밖으로 빼기 위하여 북쪽 성벽과 남쪽 성벽에 수구문이 있다.〈사진 314~320〉 북쪽 성벽의 수구문은 북쪽 성벽의 동쪽 끝에서 237m 들어와서 있었으나 지금은 다 깨져서 겨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남쪽 성벽의 수구문은 남쪽 성벽의 동쪽 끝에서 92m 안으로 들어와 있는데 그 윗부분은 다 깨지고 성벽도 10m 구간은 없어졌으나 수구문의 밑부분과 물도랑의 바닥시설은 남아 있다. 이 수구문의 바닥은 성벽의 바닥보다 80cm나 더 낮다. 남아 있는 수구문 밑부분의 길이는 10m이고 너비는 2m이며 깨지고 남은 양쪽 벽의 높이는 20cm밖에 되지 않는다. 이 수구문은 길이 1.5m, 너비 1m, 두께 20cm 안팎의 큰 돌을 밑바닥에 깔고 그 위에 2m의 너비를 두고 큰 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이 문의 윗부분이 없어져서 그 높이는 알 수 없으나 벽을 일정한 높이까 지 쌓고 그 위도 역시 바닥에 깐 것과 같은 큰 돌을 가지고 덮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도면 33〉
〔도면 33〕 남쪽 수구문터 실측도
양쪽 수구문 사이에는 물이 흘러내리는 물길시설이 있었던 자리가 군데군데 남아 있다. 이 물길은 북쪽 수구문과 남쪽 수구문을 거의 직선으로 연결시키는데 선 위에 있다. 이 물도랑도 돌로 바닥을 깔고 벽을 쌓는 등 매우 튼튼하게 만들었는데 지금 윗부분은 다 깨지고 바닥과 벽의 밑부분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물도랑의 바닥 너비는 평균 2m이며 남아 있는 벽의 높이는 1.2m 정도 된다. 현재 물도랑자리가 잘 남아 있는 길이는 307m이다. 물도랑의 바닥의 크기는 1~1.5m 되는 큰 돌과 50~60cm 되는 돌들을 가지고 빈틈없이 튼튼히 깔았으며 그 양쪽 벽도 길이 7m, 두께 80cm 정도 되는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려 센 물살에도 무너지지 않게 만들었다.
안학궁토성에는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동쪽 성벽과 서쪽 성벽 밖으로 해자를 팠던 자리가 남아 있다.
동쪽 해자는 성벽 밖으로 4.9m가량 떨어져 있다. 성벽과 해자 사이(벽에서 1.4m 떨어진 곳)는 돌과 진흙을 섞어 너비 3.5m, 높이 40cm가량 되는 둑을 쌓았다. 이 둑의 바깥벽을 큰 돌을 가지고 수직으로 든든하게 쌓았는데 여기서부터 해자가 시작되고 있다. 해자자리는 약 1m 깊이에서부터 검은 감탕흙이 계속되는데 지금도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물이 많이 솟아나온다. 해자의 너비는 현재의 지형으로 보아 80~120m가량 되었던 것 같다.〈도면 34〉
〔도면 34〕 동쪽 해자터 실측도
서쪽 해자는 성벽에서 1.6m 떨어진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성벽과 해자 사이는 50cm 높이로 돌을 차곡차곡 쌓아 길을 만들었으며 해자의 벽은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았다. 현 지층에서 1m가량 내려가서 감탕흙층이 시작되는데 이 감탕흙층은 성벽 가까운 곳에는 얇으나 성벽에서 멀어갈수록 점점 두꺼워지고 진한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다. 서쪽 해자의 너비는 지형상으로 보아 80m 정도 되었을 것이다.〈도면 35〉
〔도면 35〕 서쪽 해자터 실측도
안학궁토성의 성벽밑 안쪽과 바깥쪽에는 길이 있던 자리가 남아 있다. 이 길은 성벽 밑에서 1.6~3.5m 너비로 돌과 흙을 섞어서 40~50cm의 높이로 쌓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길은 대체로 낮은 지대에 쌓은 성벽에 있으며 높은 지대에는 이런 시설을 하지 않고 길을 닦은 후에 돌로 포장한 것이 잘 남아 있다. 이 성벽 길은 성벽에서 6m 안으로 들어와서 2m 너비로 성벽을 따라 돌고 있다. 길의 겉면에는 길이 20~30cm 되는 중돌을 깔았는데 길의 양쪽 옆에는 큰 돌을 세워 돌들이 밀려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성벽 길은 성벽을 따라 3.5m 너비로 돌아갔으며 서쪽 성벽 밖에는 성벽 밑으로 1.6m 너비의 길이 돌아갔는데 길의 높이는 두 곳이 다 40~50cm가량 되고 길에는 돌을 깔았다. 남쪽 성벽 안에도 이런 길이 있던 자리가 있다.
궁성 안에는 큰 궁전들과 회랑들 그리고 인공적으로 만든 산과 호수들로 아름답게 꾸려져 있었다.〈도면 36〉
〔도면 36〕 외전 제1호 궁전터·회랑터 평면도
안학궁토성 안의 지형은 대체로 동쪽과 남쪽이 낮고 중앙과 북쪽, 서쪽은 높은데 동쪽과 서쪽의 수평상 차이는 1.7m이며 남쪽과 북쪽의 수평상 차이는 2.5m 정도다.
안학궁터 안의 면적을 보면 낮은 부분은 약 10만m 2 정도인데 높은 부분은 28만m 2로서 낮은 부분의 근 3배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북쪽 성벽 중간 부분의 앞과 성안의 서남쪽에는 특히 높은 언덕이 있으며 서쪽 성벽의 안쪽은 훨씬 낮은 지대로 되어 있다. 이 두 높은 언덕은 원래의 지형도 좀 높았으나 인공적으로 작은 산을 만든 이른바 조산이다.
성안에는 남문과 북쪽 조산 사이의 남북 선을 중심축으로 하여 3개의 큰 궁전건축물들이 들어앉았으며 그 북쪽 구역의 동쪽과 서쪽에 또 큰 건축물이 하나씩 들어앉았다. 그러므로 궁전터는 5개의 건축군으로 되어 있다. 이 5개의 건축군은 남북중심축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 궁전의 배치는 매우 규칙적이고 정연하다.
남북중심축을 따라 맨 남쪽에는 남궁이, 그 뒤의 가운데에는 중궁이, 북쪽에는 북궁이 놓여 있고 중심선의 동쪽에 동궁이, 서쪽에는 서궁이 놓여 있었다.〈도면 37〉
〔도면 37〕 안학궁 유적 약도
남궁은 국가적인 큰 행사를 하던 정전이며 중궁은 왕이 일상적으로 정사를 보던 궁전이고 북궁은 침전 즉 왕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던 곳이다. 동궁은 왕위를 이을 자(태자)가 살던 곳이고 서궁은 궁전에서 복무하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이 5개의 궁전들은 회랑을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립된 건물은 거의 없다. 또 매개 궁전은 여러 개의 건축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도 모두 회랑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건축물의 터는 앞에서 뒤로 들어가면서 조금씩 높아졌다.〈도면 38~40〉
〔도면 38〕 남궁 제2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39〕 침전 제1호·제2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40〕 동궁터 실측도
건물들 중 가장 큰 것은 ‘중궁’에 있으며 ‘북궁’, ‘동궁’, ‘서궁’의 건물배치는 다른 것보다 좀 복잡하다. 안학궁터의 5개 건축군 구성에서 보는 이러한 특징들은 매 건축군의 쓰임새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된다.〈도면 41~43〉
〔도면 41〕 외전 제3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42〕 내전 제1호 궁전터 평면도
〔도면 43〕 중궁 제2호 궁전터 실측도
안학궁건축지 발굴과정에서는 52채의 건축지가 드러났는데 그중 궁전터는 21채, 궁전을 연결한 회랑터는 31채였으며 회랑들에는 모두 8개의 문채가 있었다.
이 밖에 안학궁터 안에는 여러 곳에 정원 자리가 4개소에 남아 있다. 또한 우물자리와 못자리도 있다. 우물은 동궁에 여러 개 있다. 못자리는 성의 동쪽 벽과 남쪽 벽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에 있다. 이 못은 대체로 사방 70m 되는 네모진 것인데 못의 깊이는 1.5~2.4m이다. 못자리는 남궁, 북궁 등에도 여러 개 있는데 크기는 사방 10~20m 정도의 작은 것들이다.
안학궁터에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유물이 나왔다. 유물은 주로 건물을 지었던 자리에서 나왔는데 제일 많은 것은 각종 기와 조각과 질그릇 조각이며 그 밖에 벼루, 유리제품 조각 등 귀중한 유물들도 있다. 집자리를 발굴하는 과정에 기와는 거의 다 건물의 추녀 밑에 해당하는 곳에 겹겹이 쌓여 나왔는데 건물이 무너질 때 깨졌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거의 없다. 질그릇 조각은 궁전터의 중심건축물이 있는 남궁·중궁·북궁 터에서 많이 나왔으며 발굴하기 전 땅 위에도 더러 있었다.
안학궁터에서 나온 유물을 종류별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와는 거의가 푸른빛이 도는 회색 기와이며 그 밖에 붉은 기와 조각이 더러 있다. 다른 고구려의 유적들에서는 붉은 기와가 기본으로 되어 있고 회색 기와는 매우 드문데 안학궁은 그 반대다. 색은 다르나 두 종류의 기와는 만든 솜씨나 무늬가 같으며 질도 같은 것이 많다. 고구려기와에서 두 가지 색이 있는 것은 건물의 크기와 중요성의 차이에 따라 기와의 색을 달리하여 썼기 때문이다. 안학궁터의 기와에는 암키와, 수키와, 마루기와 등 세 종류가 있다.
안학궁터에서는 지붕장식물로서 4개의 치미와 귀면 13개가 나왔는데 모두 건물의 모서리에서 나왔다.
안학궁터에서 도기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집자리를 발굴할 때 도기 조각들이 나왔으며 안학궁터 안의 무덤에서 일부 나온 정도다. 안학궁터의 도기는 모두 보드라운 흙으로 만든 회색 그릇인데 색이 진한 것과 연한 것의 차이가 있으며 속은 불그스레한 색과 회색 및 자주색의 세 가지가 있다. 모두 돌림판을 써서 만든 것으로서 모양이 고르며 무늬는 없는 것이 많으나 간혹 있는 것도 있다. 무늬가 있다고 해도 사각형무늬, 능형무늬, 물결무늬 등 단순한데 대부분 찍어서낸 무늬다. 도기에는 독, 항아리, 단지, 버치, 옹배기, 대야 등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이 밖에 손잡이, 뚜껑꼭지, 밑굽, 아구리의 조각 등이 여러 개 나왔으나 복원할 수 없는 것들이다.
북궁 제3호궁터에서 절반이 깨진, 흙으로 만든 벼루조각이 1개 나왔는데 원형으로서 밑에 짧은 다리가 4개 있으며 위에는 한쪽에 먹물이 고이는 구멍이 1개 있다. 벼루의 윗면에는 먹물이 흘러나가지 못하게 테두리처럼 선을 한 줄 파 돌렸으며 바탕에는 고운 모래가 얇게 씌워져 있어 먹이 잘 갈리게 되어 있다. 벼루의 직경은 13.5cm, 높이는 4cm이며 두께는 2.5cm이다. 물구멍은 길이 4.8cm, 너비 2.5cm, 깊이 0.9cm이다. 벼루의 질은 도기의 것과 비슷한데 검은 회색이며 보드라운 흙에 곱고 가는 모래를 약간 섞어 만들었다.〈도면 44~48〉
〔도면 44〕 북궁 제3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45〕 북궁 제4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46〕 북궁 제5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47〕 북궁 제6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48〕 북궁 제7호 궁전터 실측도
서궁 제4호궁전터 북쪽의 기와가 떨어져 몇 층 깔린 맨 밑에서 깨진 유리장식품 조각이 1개 나왔다. 유리가 있는 지층은 당시의 표토층이고 그 위에 쌓인 기왓장은 집이 무너질 때 떨어진 채 한 번도 다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는 철제 못도 1개 나왔는데 고구려의 무덤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것이다. 유리장식품은 깨진 조각이므로 원래의 모양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생김새로 보아 간단한 장식품의 일부인 것 같다. 남은 것의 길이는 6cm, 두께 5cm이며 색은 연한 초록색으로 투명하나 속에는 작은 기포가 여러 개 있다.〈도면 49~51〉
〔도면 49〕 서궁 제1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50〕 서궁 제2호 궁전터 실측도
〔도면 51〕 서궁 제3호·제4호 궁전터 실측도
구슬은 모두 3개 나왔는데 둥근 것과 타원형의 두 가지 모양이고 재료는 옥돌, 백토, 진흙 세 가지다. 옥구슬은 모양이 계란과 비슷하며 표면은 반질반질하게 다듬었다. 가운데 구멍이 곧게 뚫려져 있어 실을 꿰게 되어 있으며 색은 유백색이다. 길이 4.4cm, 가운데 직경 3.7cm, 구멍 직경 0.6cm이다. 흙구슬은 흙을 빚어서 만들었는데 표면이 정갈하며 색은 누른 회색이다. 구슬은 직경 3.1cm, 구멍 직경 0.7cm이다. 사기구슬은 백토로 만들어 구은 것인데 크기는 직경이 3.2cm이고 구멍 직경은 0.4cm이다. 구슬의 크기는 직경이 3.2cm이고 구멍의 직경은 0.4cm이다. 구슬의 크기나 재료로 보아 몸에 차고 다니는 데 쓴 것 같지는 않고 건물의 장식으로 쓴 것 같다.
안학궁터에서 철제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즉 활촉 1개와 못 3개뿐이다. [주]
주 001
김일성종합대학(1973), 『대성산의 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04~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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