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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의 이순신 이야기 - 해설난중일기 30]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일요서울 입력 2016-01-25 09:57 승인 2016.01.25 09:57 호수 1134 48면
- 한나라 군대를 격퇴한 명림답부의 지혜
- 성(城)이 백성이고 백성이 성(城) ‘신뢰’ 강조
<통영 세병관 석인>
《손자병법》을 비롯한 모든 병법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의 전략전술로 평가한다. 당 태종과 명장 이정이 병법을 토론한 기록인 《이위공문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태종이 말하길,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이고, 싸울 때마다 승리하는 사람이 중간이고,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잘 지키는 사람은 꼴등이다”
《위료자》란 병법서에는 싸우기 전에 적의 사기를 빼앗는 방법 5가지를 논하고 있다. 첫째는 적국 조정의 전략 보다 우수한 전략을 수립할 때, 둘째는 유능한 장수를 갖고 있을 때, 셋째는 기동력이 뛰어날 때, 넷째는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놓았을 때, 다섯째는 공격력이 뛰어날 때이다.
당 태종과 위료자의 말은 전체적으로 추상적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현실적인 방법 하나가 눈에 띈다.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는 것(深溝高壘, 심구고루)”이다. 맹자도 등문공이 약소국인 등나라가 강대국인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을 때,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연못(池, 해자)을 파고 성(城)을 쌓으라”고 권유했었다.
실제로 그 것은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실천한 방법이기도 하다. 한나라가 침입하자 고구려 조정에서 대응방법을 논의했다. 많은 신하들은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재상이었던 명림답부는 침략자의 드높은 사기를 꺾는 것이 필요하다며 장기전을 주장했다. 그는 당태종과 위료자가 주장했던 것처럼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놓고, 들판을 태워 적의 식량 보급을 어렵게 만들어 지치게 만든 뒤 공격하자”고 했다.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주장에 따랐고, 한나라 군대를 격퇴했다.
수군 이순신, 육지의 성까지 정비
《난중일기》에는 관점에 따라 의아한 장면이 나온다. 수군대장 이순신이 육지에서 성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 1592년 2월 15일.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새로 쌓은 포갱(浦坑, 해자)이 많이 허물어졌다. 석수 등에게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새로 쌓은 포갱이 허물어졌다고, 관련자를 문책했다. 포갱은 병법서에서 말하는 ‘구(溝)’, 흔한 표현인 해자(垓字·垓子)이다. 이순신은 1592년 1월 11일에는 ‘호자(壕子)’, 2월 4일과 3월 4일에는 ‘해자 구덩이(垓坑, 해갱)’, 2월 27일에는 ‘연못(池, 지)’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순신이 다양하게 표기했듯, 중국에서는 호(壕)지(池)·구(溝) 등으로, 일본에서는 굴호(堀壕)·공굴(空堀) 등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해자(垓字·垓子·海子)·해감(坑坎)·호지(濠池)·참호(塹壕)·호(濠) 등으로 표현했다. 해자는 육지의 성(城)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적이 성을 접근하기 어렵게 성 밖 둘레에 자연 하천을 이용하거나, 혹은 인공적으로 파낸 뒤에 물을 채워 놓았다.
(사)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에서 간행한 《성곽 조사방법론》에 따르면, 조선 후기 실학자 정상기와 유형원도 해자에 관심을 갖고 설치 방법 등을 상세히 논했다고 한다. 특히 유형원은 성의 4장(8.4m) 밖에, 너비 4장(8.4m), 깊이 2장(4.2m) 이상으로 파고, 그 주변은 반드시 벽돌로 쌓아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해자가 발굴된 고현읍성과 동래읍성의 잔존 깊이는 2.9m, 2.3m라고 한다.
백성이 성이다!
수군대장 이순신이 성을 쌓고 방비를 할 정도였다면, 당시 육지는 어땠을까.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다니면서도 일기를 썼던 오희문의 《쇄미록》에 따르면, 그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그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전에 조선 조정이 전쟁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통설은 사실이 전혀 아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것도 전쟁준비의 일환이었고, 바로 그 시기에 남부지방 곳곳에서는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해 성을 쌓고 있었다. 심지어 농사철에도 백성들을 징발해 성을 쌓았기에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분노 가득찬 노래를 불렀다.
“굽은 성 아무리 높이 쌓은들, 어느 누가 능히 적을 막겠나. 성(城)이 성이 아니라, 백성이 진짜 성이라네(曲城高築, 誰能守敵, 城非城也, 百姓爲城)”
성을 쌓는 과정이나 훗날 전쟁이 일어났을 때 상황을 보면, 백성들의 한 맺힌 노래는 사실이었다. 진짜 성인 백성의 삶을 무너뜨리고, 껍데기만 치장한 꼴이었다. 훗날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당시 육지 축성 모습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병법도 모르는 사람들, 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능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성을 쌓았다고 탄식했다. 실제로 전쟁 초기, 일본군의 파죽지세를 초래한 원인 하나가 민심이반이었다.
성을 쌓은 일에 가장 앞장섰던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특히 심한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런 김수가 전쟁 발발 후 무책임하게 도망쳤다고 생각한 의병장 곽재우는 “김수는 나라를 망친 적이기에 그의 머리를 베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김수를 베는 것이 “풍신수길의 머리를 베는 것보다 더 공이 크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전쟁 직전에 백성들이 무모한 축성, 무지한 축성에 얼마나 분노했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경상도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오희문이 전쟁 직전 전라도 강진에 들렀을 때, 강진도 경상도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순찰사의 강진 순시가 임박하자 그제야 성을 보수하고, 해자를 파고, 군사 훈련을 하는 등 한꺼번에 온갖 일을 하고 있었다. 높은 사람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즉시 매질을 했기에 원망하는 소리가 진동했다.
이순신의 2월 15일 일기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무리한 축성이나 가혹한 처벌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기 속의 축성 공사 시기는 백성들의 생계를 책임질 농사철도 아니었다.
또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도 농사짓는 일반 백성들이 아니었다. 돌공사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석수, 3월 4일의 일기처럼 당시 사회의 관점에서 잉여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승군(僧軍)을 활용했다. 처벌 기록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허술하게 공사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이었다. 이순신이 쌓은 성은 백성이었고, 백성의 신뢰가 쌓인 성이었다. 그것이 이순신이 쌓은 진정한 성이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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