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1202070233985


[여심야심] "내 법은 내가 막는다" 신박한(?) 필리버스터 활용법

장혁진 입력 2019.12.02. 07:02 



주말 동안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는 '필리버스터'가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에 오른 모든 안건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란 의원들이 시간 제한 없이 발언해서 의사 진행을 막는 행위를 뜻합니다. 다수당에 유리한 신속처리안건, 패스트트랙 제도가 '창'이라면, 필리버스터는 소수당을 위한 '방패' 입니다. 우리 국회에서는 1973년 폐지됐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 입법으로 다시 도입됐습니다.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총회를 진행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총회를 진행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모든 안건에 필리버스터 신청…이유는?


지난달 29일 본회의 안건 중 패스트트랙 법안은 유치원 3법이 유일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당은 유치원 3법을 제외한 나머지 196건에도 필리버스터를 신청했을까요? 선거법 처리를 막아야 하는 한국당으로서는 필리버스터 상태에 일단 '돌입'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됐다면, 한국당은 이번 정기 국회 회기(12월 10일 종료)의 선거법 상정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기 국회가 끝나버리면 다음 임시회에서 선거법이 상정될 겁니다. 그러면 그때 선거법에 필리버스터를 또 신청하는 겁니다. 결국 임시회에서의 선거법 표결은 어려워지고, '다음 회기에 해당 안건을 지체 없이 표결해야 한다'는 국회법에 따라 선거법 처리는 다음 회기로 미뤄지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선거법 처리를 최대한 늦춰, 내년 4월인 21대 총선에 적용되지 못하도록 물리적으로 막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199건 중 일부만 필리버스터를 신청했어도, 정기국회 무력화가 가능하지 않으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로 법안 한 건에 대해 한국당 의원 108명이 4시간씩만 발언을 해도, 충분히 12월 10일까지 시간을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당은 본회의 안건의 순서를 변경할 수 있고, 질서 유지를 위해 산회를 선포할 수 있는 국회의장 권한에 주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국회의장은 필리버스터가 걸려 있지 않은 안건부터 순서대로 처리하다가, 필리버스터 안건 순번이 오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지면 산회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따른 책임은 의장이 질 몫입니다. 한국당은 의장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본회의 중간에 산회를 선포할 수 있다고 보고, 안건 전체에 필리버스터를 거는 '모험'을 택했습니다. 본회의가 열리기만 하면 한국당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서 당내에선 '묘수'란 평가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여론 악화까지는 예상 못 한 듯합니다. 그래서 나온 게 '민생 법안은 다 처리하고 5개 법안에만 필리버스터를 하겠다'는 카드입니다. 한 개나 두 개도 아니고, 왜 하필 5개일까요. 필리버스터 종결 규정에서 의도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국회법은 재적 의원 3분의 1이 요구하면, 24시간 뒤 표결을 실시해 5분의 3(현재 기준 177명) 찬성으로 필리버스터를 종료시킬 수 있도록 합니다. 즉 하나의 안건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결시키는 데 하루나 이틀가량 걸린다고 감안할 때, 5개 안건이면 정기 국회 종료일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연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연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필리버스터 신청' 한국당 대표 발의 법안 50건


여기까지가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신청 배경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선택에 따른 황당한(?) 결과들입니다.


KBS는 지난달 29일 본회의 안건 199개 중 한국당 의원들이 대표 발의한 법안들을 세어 보았습니다. 한국당 의원이 대표 발의해 상임위에서 대안 법안이 만들어지고, 대안반영 폐기된 법안도 함께 포함했습니다. 이런 법안은 모두 50건에 달했습니다.


이 중에는 한국당 김정재 의원(경북 포항 갑)이 발의한 '포항 지진 특별법'도 있습니다. 포항 지진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할 센터를 만들고, 지진 진상 조사를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진 발생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피소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재민들에겐 절실한 법이지요.


만약 한국당의 의도대로 필리버스터가 실행됐다면, 김 의원은 자신이 발의한 법안에 '방해 토론'을 할 수 있었을까요. 김 의원은 KBS와의 통화에서 "굳이 나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냐"면서 "지역 주민들에게도 이해를 구했다, 주민들은 선거법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당의 최종 입장은 5개 법안에 대해서만 필리버스터를 하겠다는 것이고, 여기에 포항 지진 특별법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민주당이 본회의를 열지 않고 통과를 외면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포항 지진 특별법뿐만이 아닙니다. 한국당 신보라 최고위원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청년 정책을 세우게 하는 '청년기본법'의 입법을 주도했습니다. 청년기본법이 지난달 25일 정무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하자 신 최고위원은 SNS에 "만감이 교차한다, 이제 법사위와 본회의만 남았다"고 밝혔습니다. 만약 본회의에서 청년기본법에 대한 필리버스터가 개시됐다면, 신 최고위원은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을까요.


이 밖에도 소상공인의 법적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는 소상공인기본법(김명연 의원), 환자안전사고 관련 정보의 공유를 위한 환자안전법(김승희 의원), 재해어선원에 대한 의료 서비스를 향상시키는 어선원재해보험법(이양수 의원) 등이 필리버스터에 걸려 있는 법안들입니다. 필리버스터 신청 효력은 따로 한국당이 철회 요구서를 내지 않는 한 20대 국회 내내 유지됩니다.


1일 열린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의 기자간담회

1일 열린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의 기자간담회


국회법의 창조적 파괴?…이인영 "모순이고 또 모순"


자신들이 발의한 법안을 스스로 막는 모순적인 상황. 민주당에선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이인영 원내대표는 1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순수하게 한국당 의원이 발의한 법이 26개가 있는데, 이조차 필리버스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모순이고 또 모순"이라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모자라고 또 모자란 경우가 있나, 한마디로 엉터리"라고 말했습니다.


민병두 의원은 자신의 SNS에 "본인들이 대표 발의한 법안을 필리버스터라는 수단을 통해 죽기 살기로 저지하겠다는 집단 심리와 정치적 히스테리에 대해 국민적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고 꼬집었습니다. 2012년 필리버스터 규정을 담은 국회선진화법 입법을 주도한 원혜영 의원은 "많은 국민이 국회를 파괴해도 저렇게 창조적으로 할 수 있구나 새삼 깨달았을 것"이라며 "국회 모두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아주 안 좋은 사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필리버스터 정국' 최악의 20대 국회 한 획 긋다


필리버스터는 합법입니다. 소수당은 '우리의 논리를 정당한 절차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당당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합의와 토론, 설득의 가치를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소중한 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필리버스터는 오히려 장려되어야 합니다. 게임의 규칙인 선거법을 정하는 데 제1야당을 배제하고 강행하겠다고 한다면 민주당의 입장도, 집권 여당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한국당의 이번 선택은 필리버스터의 본래 취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불법은 아니지만, 편법적 활용입니다.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제때 처리됐어야 할 법안들의 통과가 또 기약 없이 미뤄졌습니다. 민주화 이후 가장 낮은 30%대 법안 처리율. 역대 최악의 대한민국 국회는 나날이 신박한(?)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장혁진 기자 (analog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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