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809150302627


고구려 영양왕 '요서 출병'을 둘러싼 미스테리

[고구려사 명장면 51] 

임기환 입력 2018.08.09. 15:03 


598년 2월, 영양왕은 1만 말갈 기병대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넜다. 당시 요서 지역에는 고구려의 군사초소인 무려라가 있었다. 문헌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아마도 영양왕은 이곳 무려라에서 군사를 정돈하고 수나라 영주(營州·지금의 요양)로 향했을 것이다. 영주는 대대로 요서 지역의 중심지였으며, 수나라 역시 이곳을 차지한 뒤 영주에 총관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당시 영주 총관은 위충(韋충)이었다. 위충은 고구려군의 공격에 곧바로 대응했다. 이때 전황은 전혀 기록이 없지만, '수서'에는 영주총관 위충이 고구려군을 격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가 동원한 말갈병 1만군이 요서를 공격하고 수 영주총관이 이를 물리친 전투. 점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던 고구려와 수, 두 나라의 변경에서 능히 일어날 수 있는 소규모 전투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런데 이 598년의 요서 출격이 장차 70여 년간 지속될 동북아시아 대전쟁의 서막이 되리라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 측에서 영양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고구려로서는 예사롭지 않은 무게감을 이 전투에 싣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고구려군 본대도 아닌 말갈병이 동원됐고, 병력도 겨우 1만명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이런 군대를 영양왕이 지휘했다는 점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비록 소규모 말갈병을 동원한 요서 출격이지만, 이 전투는 대전쟁의 서막이라는 점 외에도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전투였다. 무엇보다 고구려와 북중국 왕조 사이에 오랜 기간 전쟁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헌상으로 볼 때 광개토왕 때에 치열한 공방전을 하던 후연과 마지막 전투는 405년이었다. 또 직접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위기가 매우 높았던 때는 장수왕이 북연의 풍홍을 구원하러 보낸 군대가 북위군과 대치하였던 436년 화룡성 출병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보면 598년 요서 출격은 190여 년 혹은 160여 년 만에 벌어진 북중국 왕조의 전투였다는 점만으로도 그 의미가 간단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문헌 기록에는 없지만, 온달 설화에도 고구려와 북주의 전투가 언급돼 있다. 금석문인 한기묘지명에서는 북위말에 고구려가 요서를 공격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전투가 중국 왕조의 문헌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중앙정부에 보고될 정도의 사안이 아니었거나 정부 차원의 군사적 대응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598년 요서 출격에 대해 수의 중앙정부는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전투야말로 고구려와 북중국 왕조 사이에 190여 년 만에 벌어진 일대 사건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양왕의 요서 출격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첫째, 고구려는 598년에 왜 수를 선제 공격하였을까? 그것도 거의 190여 년 만에 이루어지는 북중국에 대한 공세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문을 갖게 된다.


둘째, 이 출격이 왜 영양왕의 친정(親征)으로 이루어졌을까?


셋째, 영양왕의 친정임에도 불구하고 왜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아닌 말갈병이 동원됐을까? 그것도 겨우 1만 병사라는 소규모로.


다소 돌발적인 요서 공격의 배경에는 10년 동안 계속된 국제 정세 변화가 깔려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전쟁의 동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0년 전인 588년에 수문제는 50만여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 남조 진(陳)을 정복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260여 년 만에 중국 대륙에 통일제국이 등장한 것이다. 통일제국의 등장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통일제국의 강력한 힘이 외부로 뻗쳐 나갈 경우, 그동안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유지해왔던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국제질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서방의 토욕혼(吐谷渾)은 남조 진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자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수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결국 609년에 수에 복속되고 말았다. 또 중국의 최대 적대 세력인 북아시아 초원세력인 돌궐(突厥)도 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앞서 돌궐은 북주와 북제의 대립을 이용해 급속히 세력을 키워간 바 있다. 그러나 수나라는 등장하자마자 돌궐에 대해 강경책을 구사했다. 수는 돌궐의 내분을 이용해 이간책을 시도했고, 그 결과 583년에는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됐다. 599년에 수는 동돌궐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시도해 내몽골 사막으로 내쫓았으며, 동돌궐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켰다.


고구려 역시 통일제국 수에 대해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그동안 고구려가 취한 중국 남북조에 대한 외교전략은 북위와 남조의 국가에 대해 모두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여기에 북방 유목국가와도 손을 잡아 서로 견제하는 다면 외교였다. 그런데 수에 의한 중원 통일로 이런 등거리 외교전략은 깨지게 됐다. 고구려는 장차 있을지도 모를 수의 침입에 대해 군사적 대비를 갖추는 한편 전통적인 외교 방식인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에 의한 외교 교섭도 재개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수 사이에는 조공, 책봉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달랐다. 수나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제 질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였다. 따라서 고구려에 대해 과거 북위나 남조 왕조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590년(혹은 597년)에 고구려에 보낸 수문제의 국서에는 통일제국으로서 수의 오만함이 잘 드러나 있다.


"왕은 해마다 사신을 보내와 조공을 바치며 번부(藩附)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고 있소. … 그곳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대로 비워둘 수 없으므로 결국 다시 관리를 뽑아 그곳에 가서 안무하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닦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어진 신하가 되는 것이니, 어찌 수고롭게 따로 사람을 보내겠는가? 왕은 요수(遼水)의 넓이가 장강(長江)과 비교해 어떠하며, 고구려 인구가 진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하다고 여기는가? 짐이 만약 왕을 포용하고 기르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이전의 잘못을 책망하려 한다면 한 사람 장군에게 명령하면 될 일인데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은근히 타이르고자 할 뿐이다." ('수서' 고려전)


이 국서에서 수문제는 고구려를 수의 신속국으로 굴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남북조 왕조와 조공, 책봉제 안에서 대등하게 교섭해왔다. 더욱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 있는 고구려로서는 이런 수의 요구를 결코 따를 수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외교적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천하관이 달랐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더욱이 수가 동쪽으로 요하 일대 요해(遼海) 지역으로 진출해오면서 이 지역은 동북아시아의 화약고가 됐다. 사실 6세기 중엽부터 돌궐이 요해지역으로 밀려오면서 거란을 압박했고, 580년을 전후한 무렵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충돌했다. 돌궐이 수에 격파돼 세력이 약화된 583년 이후에는 고구려가 송화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면서 속말말갈 지역으로 진출했다. 이때 속말말갈의 일부 세력이 수나라에 투항했다. 또 돌궐이나 고구려 세력 아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도 수나라에 귀부해 갔다. 이처럼 수의 영향력이 커져가면서 요해 지역의 거란, 말갈족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충돌이 높아지게 됐다. 영양왕의 요서 출격이 있던 전 해에도 이미 양국 사이에는 소규모 군사 충돌이 있었다.


의무려산. 북위말부터 고구려는 요서로 진출해 대략 의무려산을 경계로 요서의 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바이두


598년 영양왕의 요서 출격은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때 동원된 1만 말갈병은 고구려에 복속한 속말말갈임에 틀림없다. 이 전투는 요해지역의 말갈과 거란을 둘러싸고 전개됐던 그동안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 갈등을 하나의 사건으로 응축해서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요서 지역에서 빠르게 세력을 키우고 있는 수의 동향을 떠보고, 수나라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거란이나 말갈족들에게 고구려의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즉 말갈병만을 동원했다는 점은 요해지역 말갈인 세계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거나 혹은 말갈인은 고구려의 복속민이라는 사실을 수나라에 환기시키려는 목적 등을 함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동원된 말갈 군사 규모가 1만명이라는 점에서 이 출정이 본격적인 전쟁을 기도한 것이 아니었음은 금방 알 수 있다. 더욱 고구려 본군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수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왜 굳이 영양왕이 친정했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영양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는 점이 무엇보다 더 큰 상징성을 갖는 군사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598년 영양왕의 요서 출병은 그 성격이 파악하기 쉽지 않다. 영양왕의 친정이라는 고도의 상징성을 갖고 있음에도 국지전을 의도한 듯한 소규모 말갈병 동원, 그리고 이 출정은 앞으로 벌어질 대전쟁의 서막이 되었다는 점 등 어딘가 어울리지 않은 고구려측의 출정 양상에 대해 독자 여러분도 어떤 해석이 가능한지 생각해보시기를 권한다. 이에 대해서 필자 등도 앞서 언급한 이상의 답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다음 회에서 좀 더 첨언하고자 한다.


의무려산. 북위말부터 고구려는 요서로 진출해 대략 의무려산을 경계로 요서의 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바이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그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사례는 매우 많다. 개중에는 합리적인 논거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도 적지 않다. 위 요서 출병이 그런 사례이다. 아마 현실에서 벌어지는 중대한 많은 사건들이 바로 비합리적으로 결정되고, 전개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특히 전쟁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그러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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