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tapa.org/article/gP-nq
[전두환 프로젝트] ⑮ "전두환은 새시대 영도자"...언론부역자도 잘 살고 있다
강민수 2019년 12월 11일 08시 00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민국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의 일환으로 ‘전두환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전두환 세력이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정권을 탈취한 뒤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을 환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이 땅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1979년 발생한 신군부의 12·12군사반란 40년을 맞아 준비한 ‘전두환 프로젝트’는 1차로 2019년 12월 10일까지 모두 15회에 걸쳐 방송됩니다. 뉴스타파는 2020년 5월 광주항쟁 40주년을 즈음해 ‘전두환 프로젝트’ 후속 시리즈를 기획, 보도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1979년 12·12군사반란으로 시작해 80년 5월 광주학살로 이어진 ‘전두환 쿠데타’는 신군부의 권력찬탈 시나리오 하에 진행됐다. 이 쿠데타의 배후에는 중요한 조력자가 있었다. 바로 제도권 주류 언론이다.
아무런 정통성이 없이 권력을 손에 넣은 전두환은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는 과정, 그 이후 7년 집권 기간 내내 언론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우리 언론은 전두환을 ‘하늘이 내리신 대통령’, ‘유머가 넘치는 자상한 대통령’, 심지어 ‘단비를 몰고 오는 대통령’ 같은 식으로 추앙하며 떠받들었고 여론을 호도했다.
뉴스타파는 12·12군사반란 40년을 맞은 올해 <전두환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전두환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전두환과 그의 잔당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역사적,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준비한 기획이다.
뉴스타파는 올해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 마무리하면서, 1980년대 전두환 세력의 조력자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던 우리 언론, 그리고 언론인들을 고발한다. 전두환과 신군부에 부역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 게다가 전두환 시대에 쌓아올린 부와 명예를 바탕으로 지난 40년간 잘 먹고 잘 살았던 언론인들에게도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 참여 언론인 36명 행적 추적
뉴스타파는 먼저 얼마나 많은 언론인이 전두환 정권에 부역했는지를 확인해 봤다. 특히 전두환의 5공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폈다. 과거 기사와 지난 2003년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작성한 전두환 언론 부역자 명단 등을 참고자료로 활용했다.
그 결과, 36명의 언론인이 전두환의 5공 정권에 참여한 사실을 확인했다.(아래 표 참조) 이들 중 전두환이 쿠데타 직후 만든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에 들어가 국회의원 배지를 단 사람은 20명, 전두환 정권에서 청와대 공보비서관 등을 지내며 전두환 찬양에 나선 언론인도 16명이나 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서도 장관과 공기업 사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1981년 2월, 대통령이던 전두환은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전두환이 처음으로 외교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언론은 앞다퉈 전두환의 방미 소식을 보도했다. 특히 공영방송인 KBS와 MBC는 전두환의 출국부터 귀국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했다. 방송 속에서 전두환은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처럼 묘사됐다.
“아, 그런데 이상해요.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는 곳마다 약간씩 비가 내리는데 말이죠. LA에 도착하자마자 단비를 내렸습니다. 워싱턴에서도 마찬가지에요.”
KBS(1981. 2. 1)
“엄하고 딱딱한 군인출신으로만 알고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이 뜻밖에도 유머가 넘치고 자상한 면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MBC(1981. 2. 7)
당시 한 회사였던 MBC와 경향신문은 무려 17명의 기자를 동원해 전두환의 방미일정을 챙겼다. 전두환만을 위한 특별취재팀이었다.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뉴욕 등 전두환이 가는 곳마다 수행기자를 따로 둘 정도였다. 그리고 방미일정이 끝난 뒤, 취재진 중 일부는 전두환의 부름을 받고 5공 정권에 참여했다.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전두환을 수행했던 김길홍은 방미 직후 전두환 청와대로 자리를 옮겨 정무비서관이 됐고, 이후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에 들어가 국회의원이 됐고 재선까지 했다. MBC 정치부 기자였던 하순봉 역시 민정당에 들어가 국회의원을 지냈고, 외신부 기자였던 김기도는 전두환 정권에서 청와대 공보비서관, 노태우 정권에서 안기부장 비서실장을 지낸 뒤 국회의원이 됐다.
전두환 정권 대표 ‘언론 부역자’ 이진희 전 MBC 사장
전두환 정권의 언론부역자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력을 가진 사람은 MBC 사장을 지낸 이진희다. 그는 서울신문에서 논설위원을 지낸 뒤 전두환이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입법위원을 지냈고,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에 앞장섰다.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1980년 7월 MBC와 경향신문 사장에 오른 그는 이후 전두환 정권을 대표하는 나팔수가 됐다.
전두환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이던 1980년 8월 11일, 당시 MBC 사장이던 이진희가 진행한 전두환 인터뷰는 우리 언론사에 길이 남을 ‘언론 부역’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래는 인터뷰 당시 이진희 발언 중 일부.
국보위 발족 이후 괄목할 만한 사회개혁 성과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지 않나 봅니다. 그동안 국보위를 만드시고 맡아오시면서 노고가 크신 전 장군께서는 새 시대를 영도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좋든 싫든 맡으셔야 할 위치에 있지 않나 봅니다.
이진희 전 MBC 사장(1980. 8. 11)
▲ 이진희 전 문화공보부 장관 (전 MBC 사장)
이진희가 사장으로 있던 경향신문 역시 5공 정권 내내 전두환 찬양에 앞장섰다. 전두환의 이른바 ‘체육관 대통령’ 등극을 앞두고는 나흘에 걸친 연재기사에서 아예 전두환 신화를 만들어냈다. 연재기사의 제목은 ‘새 역사의 창조자’였다.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인 1980년 8월 21일, 경향신문은 1면에 ‘국민여론, 전두환을 새 지도자’라는 제목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기사화 했다. 하지만 기사내용 어디에도 국민이 전두환을 차기대통령으로 원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여론조사 항목에는 단지 ‘국민이 가장 원하는 지도자는 역사적 안목이 있고, 박력있는 사람’이라는 내용뿐이었다. ‘박력있는 지도자가 곧 전두환’이라는 논리는 경향신문이 제멋대로 만든 소설이었다. 이 기사를 낸 경향신문 사장 이진희는 이후 전두환 정권의 초대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영전했다.
뉴스타파는 1988년 5공 청문회 이후 행적을 감췄던 이진희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어렵게 이진희의 친동생인 이상희 전 의원을 만나 이진희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형님(이진희 전 MBC 사장)은 딱 두문불출이야. ‘내 시대는 끝났다’고 딱 끊어버렸어요.
누구도 만나지 않습니다. 외부 접촉을 안 하고 삽니다.
이상희 전 의원/ 이진희 전 MBC 사장 동생
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냈던 하순봉은 전두환이 미국을 방문한 직후 민정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5공 실세였던 노신영 국무총리의 비서실장을 거쳐 이후 4번이나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하순봉은 지난 2010년에 ‘나는 지금 동트는 새벽에 서 있다’는 제목의 자서전을 냈는데, 이 책에서 자신이 ‘모셨던’ 전두환을 ‘리더십이 있는 대통령’으로 기록했다. 또 탈북자들의 증언이라며, 1980년 5월 광주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소장은 김재규, 정승화가 주도하는 쿠데타 세력이 국가를 지배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신속한 사태파악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국민 앞에 돋보이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잃은 혼란기에 그 이상 리더십을 발휘한 사람은 없었다...치안 부재의 무정부 상태가 계속 되는 광주 지역의 혼란을 틈타 당시 북한이 심상치 않은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중략)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예 전투원들이 봉기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하순봉 자서전 중
뉴스타파는 전두환 정권에 부역한 언론인의 현재 심경을 듣기 위해, 정계를 은퇴한 뒤 고향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하순봉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 강용식 전 KBS 보도본부장
강용식 전 KBS 보도본부장, “KBS와 MBC가 전두환에 충성 경쟁”
뉴스타파가 추적한 전두환의 언론 부역자 중에는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언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활개치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전두환의 1981년 방미 당시 KBS의 보도책임자였던 강용식이 대표적이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서 국회의원이 됐고 이후 3선 의원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방송통신정책 자문위원장이 됐다. 현재 그는 서울 강남에 ‘21세기방송통신연구소’라는 이름의 연구소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나의 방송 인생’이란 제목의 자서전에서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던 때가 KBS보도본부장 시절”이라고 밝혔던 강용식은 뉴스타파 취재진과 장시간 인터뷰를 했다. 강용식은 5공에 부역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래 내용은 강용식과의 일문일답.
- 전두환 정권 때 KBS나 MBC가 전두환을 찬양하는 방송을 한 사례가 많았는데.
“KBS와 MBC가 경쟁하는 식이었다.”
- 당시 KBS 보도본부장이었는데, 방송이 권력감시를 못 했던 것이 아닌가?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그때도 솔직히 방송을 하면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전두환부터 역대 정권, 정권 장악한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정권 장악한 사람들이 KBS나 MBC를 선호하고 의지하고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당시 뉴스에 대해 책임은 있지만, 부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사과하거나 반성할 생각 없나?
“지금 와서 뭘 반성하나.”
강용식 전 KBS보도본부장 인터뷰
▲ 김기도 전 국회의원 (전 MBC 기자)
전두환이 미국을 방문할 당시 MBC외신부 기자였던 김기도는 현재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헌정회의 정책실장을 맡고 있다. 그는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80년대의 서장’이라는 이름의 특집프로그램을 기획해 전두환을 노골적으로 찬양했던 사람이다.
1983년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김기도는 퇴임 때까지 전두환을 곁에서 지켰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에는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가 됐지만, 노조의 반발로 사퇴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 다시 부활해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을 2년간 지냈다.
취재진은 헌정회 사무실을 찾아가 김기도를 만났다. 그리고 자신의 ‘전두환 시절 언론부역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엉뚱하게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취재를 피했다.
- MBC에서 ‘80년대의 서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두환을 미화했었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난다. 1982년이면 정치부장 때인데, 제작은 후배들이 했을 것이다. 다 지난 얘기다.
- 그때 그 프로그램을 만든 것 때문에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된 것 아닌가?
“여러 언론사 정치부장들보다 뉴스 감각이 있어서 간 것 아니었겠나.
- 전두환을 찬양하고 미화한 것에 대해 반성하지 않나?
“내 나이가 지금 80이 다 됐다. 몸도 잘 주체를 못한다.”
김기도 전 MBC 정치부장 인터뷰
5공 정권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전두환 정권 당시 부역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이후 승승장구한 사람도 있었다. KBS 사장을 지낸 김인규다. 5공 당시 그가 방송한 내용은 지금도 유튜브 등에서 ‘유명 콘텐츠’로 유통되고 있다. 아래 내용은 김인규의 5공 시절 방송 리포트 내용 중 일부.
제5공화국 출범 1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지난 30년 헌정사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일들을 국민의 여망과 화합속에 획기적인 1년이었습니다.
김인규 전 KBS 기자(1982. 3. 1)
지난 6년 전 극심한 혼란과 시대적 상황속에 출범한 민주정의당은 무엇보다 구정치질서의 청산과 개혁을 위해 새시대 새정치 기치를 내걸고 새역사 창조에 나섰습니다. 민정당은 창당때부터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김인규 전 KBS 기자(1987. 1. 5)
KBS에 재직하며 주요 보직을 섭렵했던 김인규는 2007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언론특보를 거친 뒤 KBS사장에 올랐다. KBS 노조는 그의 사장 임명 직후 “땡전뉴스를 진행했던 김인규가 이제는 땡박 뉴스를 조장한다”며 퇴진을 요구했지만, 김인규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김인규는 현재 한 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김인규는 뉴스타파의 인터뷰 요청에 “시간이 없다”며 답변을 피했다.
▲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나온 ‘광주소요사태 언론인취재유도계획’이라는 제목의 문건. 1980년 5월 당시 신문과 방송이 광주학살을 폭도로 왜곡한 이유가 이 문건에 담겨 있다.
‘광주 폭도’ 왜곡 기사들... “전두환 보안사 돈으로 만들었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권력을 손에 넣었던 1980년대, ‘언론 부역’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 만들어진 건 80년 5월 광주학살 때였다. 당시 언론은 하나같이 군정종식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았고, 신군부의 유혈진압에 동조했다. 1980년 5월 25일 조선일보는 광주 상황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고 기록했고, 다음날 서울신문은 “폭도가 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당시 광주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의 논조도 대동소이했다.
뉴스타파는 <전두환 프로젝트>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당시 신문의 제작, 배포 과정에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보여주는 문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나온 2건의 문서(‘광주소요사태 언론인취재유도계획’ 등)다.
먼저 문건에는 당시 보안사가 신문과 방송, 통신사 기자 49명을 광주로 초청했고, 현지 취재 비용을 지원했다고 적혀 있다. 사회부 기자를 보내는 언론사에는 30만 원, 국방부 기자를 보내는 언론사에는 20만 원씩, 총 33개 언론사에 820만 원이 취재비로 지급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안사가 지원한 건 취재비만이 아니었다. 기자들을 실어 나른 버스는 보안사 군수처가, 비행기는 706보안부대가, 기자들의 취재를 돕기 위한 브리핑은 505보안부대가 진행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심지어 보안사는 직접 일간 신문을 구입해 광주지역에 배포했다. 문건에는 보안사가 5개 일간신문을 각각 2만부씩, 총 10만부를 부당 40원에 사들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보안사가 사들인 신문은 80년 5월 26일자 신문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의 난동’ 등으로 표현했던 바로 그 신문이었다. 결국 1980년 5월 광주 현장 기사는 한마디로 전두환의 보안사가 낸 돈으로, 보안사의 요구에 맞춰져 만들어진 청탁기사였던 것이다.
전두환의 방미 일정을 수행한 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안사 청탁 신문’을 제작했던 언론인 중에도 전두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1980년 5월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던 김용태다. 그는 편집국장을 지낸 뒤 곧바로 전두환의 민정당으로 들어가 국회의원(11대)이 됐고, 이후 4선 의원에 올랐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김용태도 찾아갔으나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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