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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 대패했지만 왜 등 외교관계 탁월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47> 백제 위덕왕 

기사입력 2020. 12. 09   15:59  최종수정 2020. 12. 09   16:01


신라 매복군에 성왕 참수당하고 백제군도 3만 명이나 잃고 퇴각 

중원과 외교 수립으로 고립 탈피 왜에 경전·석불 보내 불교 전파

외교적 수완으로 원격 조정 조명 


백제 26대 성왕(재위 523~554)은 태자 창(昌·525~598)을 극진히 아꼈다. 창은 유년 시절부터 태자 수업에 몰두했고 성장하면서는 무예에도 걸출해 부왕의 국경 전쟁을 수없이 수행했다. 왕은 일찍부터 태자를 국정 운영에 참여시켜 철저한 제왕 교육을 받게 했다. 조정 대신들은 태자의 정책 결정에 별다른 이견 없이 순응했다. 554년 여름 태자가 신라와의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를 선포했다. 이번에는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고구려와의 전쟁(551)으로 민생이 피폐한 데다 적군에게 역습당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능산리고분군. 사진 오른쪽의 동하총(東下塚)이 위덕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필자 제공


태자가 대신들을 질타했다. “신미년(551) 전투는 백제·신라·가야 3국이 고구려를 쳐 점령한 영토를 분할키로 한 전쟁이었소. 3국 군이 승리해 백제가 잃었던 6군을 회복하고 신라는 10군을 획득한 대신 가야에는 막대한 군비를 지불했소이다.” 태자가 말을 이었다. “교활한 신라 진흥왕(24대·재위 540~576)이 고구려와 내통한 뒤 백제·가야군의 후미를 공격해 한수 이남 우리 영토를 탈취했소. 기필코 신라 관산성을 빼앗아 설욕하고야 말겠소.”


태자 의지는 결연했다. 성왕도 대신들도 만류할 방도가 없었다. 백제군 선봉에 선 태자가 왜에서 긴급 파병한 지원군과 함께 관산성을 공략했다. 성왕은 태자의 성급한 혈기를 염려했다. 554년 7월 초순 밤. 성왕이 근위병 50명의 엄호 속에 관산성으로 향했다. 허술한 방만이 참화를 불렀다. 왕의 이동 정보를 사전 입수해 매복 중이던 신라군에게 포위돼 성왕은 참수되고 근위병도 몰사했다. 태자는 3만 명의 병사를 잃고 사비성(충남 부여)으로 퇴각했다.


태자에 대한 문책론으로 조정이 들끓었다. 태자가 통곡하며 대신들 앞에 굴신했다. “아바마마의 참사는 모두 나의 불찰이오. 목전의 제반 업장을 내려놓고 출가해 수도승으로 참회하며 살겠소이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대신들이었다. “태자마마, 이 어인 분부이시옵니까? 지난날 공과를 잊으시고 속히 보위에 오르시어 백척간두에 선 종묘와 사직을 보전해 주시옵소서.” 용상은 한시도 비워 둘 수 없는 게 국법이었다.


대신들의 간곡한 읍소를 수용해 태자가 윤지(綸旨)를 내렸다. “경들의 의중이 정 그러하다면 대통은 승계하되 아바마마 3년 상을 치른 후 용상에 착좌하겠소. 장차 경들의 고견을 청취해 국가를 경영할 것이오.” 태자 창이 27대 왕으로 등극하니 위덕왕(재위 554~598)이다. 보산(寶算) 30이었다. 조정은 비명에 간 성왕을 잊고 새 임금 치세에 적응했다.


왕 1년(554) 10월. 고구려가 말갈 기병을 앞세워 백제 웅진성(충남 공주)을 기습 공격해 함락 위기에 처했다. 신라가 한수 이남 침공로를 열어주며 군량미까지 공급하자 고구려군은 가야까지 위협했다. 웅진성은 수도 사비성에서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 근접 거리였고 백제는 국상 중이었다. 즉위 3개월째인 왕은 크게 당황했으나 인면수심에 격분한 조정·백성들이 총력전을 펼쳐 고구려군을 패퇴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백제는 장정 부족으로 고전했고 그때마다 위덕왕의 관산성 패전 책임론이 거듭 대두됐다. 갈수록 왕권은 축소되고 대신·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증대됐다.


왕 9년(562)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신라 17대 내물왕 4대손)와 사다함(5세 풍월주)을 대장군으로 출정시켜 대가야(경북 고령)를 정복했다. 왕 33년(586)에는 고구려가 평양 대성산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하며 새로 즉위한 평원왕(25대·재위 559~590)이 백제를 더욱 압박했다. 왕의 입지는 한층 좁아졌다. 왕은 중원 국가와 왜국 외교에 사활을 걸었다.


왕은 중원의 남·북조 왕조와 외교 관계를 수립해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자 했다. 왜에는 백제 도편수·화공들을 보내 사찰·불탑·벽화 등을 완성해 주고 유사시 지원군 파병을 약조 받았다. 왕 18년(571) 북제(550~577)는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 동청주자사’란 책봉 교서를 보내 백제 영토에 대한 왕의 지배권을 승인했다. 고구려·신라도 중원의 조공 외교에 국력을 기울였다.


왜도 국내 정국이 불안했다. 왜는 영토 대부분이 척박한 산악 험지인 데다 농지가 거의 없는 섬이어서 만성적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왜는 부족한 식량의 절대량을 섬진강 하류 아라가야와의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신라가 강제 합병한 가야의 재건은 왜에도 절박한 외교적 현안이었다. 백제와 왜는 상호 이해관계가 교착돼 금관가야 멸망(532) 이후에도 양국 군은 가야 부흥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왜 조정은 불교의 국가 공인 여부로 나뉘어 있었다. 성왕 30년(552) 성왕이 왜와의 문화교류 차원에서 금동석가상·경전·미륵석불과 함께 친서를 보냈다. 그 내용이 사서에 전한다. ‘이 법은 우주의 모든 법 중 가장 신묘한 법이다. 무량무변한 복덕 과보를 낳고 무상 보시에 도달할 수 있다. 이해하기도 입문하기도 어려워 주공과 공자도 알지 못했다. …천축에서 삼한에 이르기까지 숭앙하는 법이며 마음먹은 대로 성취되는 신통 묘법이다.’


왜 조정 실권자 소아도목이 흠명왕(29대·재위 539~571)에게 아뢰었다. “서역 모든 나라가 지성으로 섬기고 있사온데 어찌 아국만 배반할 수 있겠사옵니까?” 소아도목의 정적 연겸자가 나섰다. “이는 조상 대대로 신봉해 온 신도를 배반하는 처사로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옵니다”라며 극구 반대했다.


왜의 불교 승인 문제는 30대 민달왕(재위 571~585)과 31대 용명왕(재위 585~587) 시까지 국가적 난제로 대립하다 소아도목 세력이 승리하며 공인됐다. 위덕왕은 신라의 가야 합병으로 인한 왜의 식량난과 불교 전래로 야기된 조정의 내홍을 명경지수처럼 관통하고 있었다. 

 

백제 임금 제향을 모시는 숭목전. 능산리고분군 입구에 있다. 필자 제공


불교 공인 후 왜왕이 백제왕에게 고승 파송을 요청했다. 588년 위덕왕이 승려 혜총(생몰년 미상)을 보내 불법(佛法)을 전파하도록 윤허했다. 이후 왜국 불교는 백제 불교를 모태로 도서 국가 특유의 불교문화로 정착되었다. 현재 일본 불교계에서는 위덕왕을 일본 불교의 비조로 숭배하고 있다.


사학계에서는 왜 조정 내 친백제파였던 소아도목의 승리로 위덕왕의 국제적 위상과 운신 폭이 크게 확대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찍부터 왜 조정에는 백제 도래인과 현지인이 조정 세력을 양분해 반목하고 있었다. 불교 전래를 통해 왜 정계를 원격 조정한 위덕왕의 외교적 수완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위덕왕은 재위 45년 만인 598년 12월 보령 74세로 훙서했다. 조정에서는 위덕(威德)이란 시호를 봉정하고 부여 능산리고분군(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에 안장했다. 『삼국사기』에는 위덕왕 치세와 가족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으나 『일본서기』에는 위덕왕 태자 아좌(阿左)가 597년 왜에 와 성덕태자(574~622) 상을 그렸다고 전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능산리고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 산 중턱에 동·서·중앙의 3군 16기(基)로 분포돼 있다. 사학계에서는 이 가운데 중하총은 성왕릉으로, 동하총은 위덕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적 제14호로 지정된 고분은 중앙의 7기뿐이다. 자좌오향의 정남향으로 고분군 서쪽에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된 능산리 사지(寺址)가 있다.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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