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70622150404999


고구려는 왜 가야를 정벌했나

[고구려사 명장면 22] 

임기환 입력 2017.06.22. 15:04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과 관련된 언급을 해서 역사학계에서 이런저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가야사 연구나 교육이 삼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환영하는 소리도 적지 않다. 한편으로는 과거에 정치권이 역사 문제에 개입하면서 나타나게 된 부작용을 여러 번 경험한 터라 우려의 목소리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 물론 문 대통령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이런 기회에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삼았던 역사적 경험을 잘 돌이켜볼 필요가 있겠다. 지금까지 몇 회에 걸쳐 다루고 있는 광개토왕비문이야말로 일제 시기부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왜곡이 점철되고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가야의 기마인물형 토기(국립 경주박물관 소장) 국보 275호. 김해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가야 중장기병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사진=문화재청


어쨌든 마침 가야사가 눈길을 끌고 있는 때이므로 이번 회에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고구려와 가야의 전쟁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한반도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고구려와 한반도 남부 낙동강·남해안 일대에 있던 가야가 어떻게 전쟁을 치루게 되었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와 가야 사이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기에 어떤 형태로든 두 나라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전쟁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단지 고구려와 가야의 전쟁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 정세와 깊이 관련될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왕비문 영락 10년(400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장문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다소 장황하지만 내용 자체가 중요하니 잠시 인용해보자.


(영락) 1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신라도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고구려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물러났다. …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신라인 술병(戍兵)을 안치하였다(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을 □하였다. … 왜구가 크게 궤멸하였다. 성부의 열에 아홉은 모두 죽이거나 옮기고 신라인 술병을 안치하였다. … 신라인 술병을 안치하였다. …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와서 보고를 하며 논사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보다시피 위 기사는 판독되지 않은 글자가 많아 온전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대략 전체적인 맥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왜의 침공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한 5만명에 이르는 고구려군이 임나가라(任那加羅)에까지 진격하여 승리를 거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어떤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 오직 광개토왕비문에만 보이는 매우 귀중한 사료다.


물론 전체 문맥이 불분명하니 세부적으로 논란이 적지 않다. 예컨대 '안라인술병(安羅人戍兵)'에 대한 해석도 분분한데, 안라가야와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구려 병사 혹은 신라 병사를 안치했다는 해석도 유력하다. 필자는 후자가 타당하다고 보고 위와 같이 번역하였다.


그리고 위 문장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임나가라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지금 김해 지역에 있던 금관가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위 기사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군은 임나가라 즉 금관가야가 주도하는 가야연맹체에 상당히 심각한 타격을 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가야연맹 중 김해와 창원 등 낙동강 하구에 있던 세력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낙동강 동쪽 부산과 창녕 일대 세력들은 신라에 굴복하게 되었다. 즉 광개토왕이 보낸 고구려 원정군은 가야연맹 내부의 세력 판도를 일거에 뒤바꾸면서 가야사의 일대 전환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고구려군 특히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중장기병은 가야 군대가 맞서 싸우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야에서도 본격적인 중장 기병대는 아니더라도 어느 규모의 중장 기병을 갖고 있었음은 여러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듯이 경기병에서 중장기병까지 다양한 전력을 갖춘 고구려군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군사력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5만명에 이르는 막강한 고구려군의 위세 앞에 가야의 군대는 맥없이 무너졌음을 위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왜 고구려는 5만명이라는 대군을 파견하였을까? 근초고왕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그리고 장수왕이 한성을 공략할 때에 동원한 군사가 각각 3만명이었으니, 광개토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5만명의 군대가 당시 한반도 내에서 얼마나 대규모였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광개토왕은 이 시점에서 그런 대군을 보냈을까? 당시 왜군이나 가야군의 군세가 그럴 정도로 대단하였을까?


고구려군이 신라를 구원하기 전 해인 399년, 비문에 의하면 백제가 약속을 어기고 왜와 통교하자 광개토왕이 평양성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왜가 국경에 가득하고 성지를 부수고 있어 구원을 요청한다"는 다급한 소식을 전하였다. 이런 신라의 요청에 따라 이듬해에 광개토왕은 어떤 이유에선가 대규모 군대를 보내야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광개토왕이 5만 대군을 동원한 배경으로는 몇몇 가능한 추론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먼저 신라를 지원하는 명분으로 아예 백제의 우익이 될 수 있는 가야를 정벌하여 한반도 남부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표를 세웠을 가능성이 고려된다. 하지만 비문의 서술 방식을 고려하면 고구려 스스로 임나가라 정벌의 명분을 내세우는 게 비문의 서술법에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락 10년조에는 단지 신라의 위기 상황에 따른 고구려의 지원이라는 형태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고구려 스스로 별도 전략적 목표를 설정한 군사활동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신라의 교묘한 외교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당시 여러 기록을 보아도 왜군의 출병 규모는 바다를 건너야 하기에 그리 대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야와 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했다고 해도, 신라 국경 내에 왜군이 가득찼다는 표현은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또 고구려군이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상대방 전력을 과장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신라 사신이 고구려에 자신의 위기를 강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배경에는 고구려군의 대규모 지원을 얻어 가야를 제압하려는 신라의 외교 전략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즉 당시 신라는 가야와 서로 힘을 겨루면서 팽팽하고 맞서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가야가 다소 우세한 상황이었을 것이고, 여기에 왜의 군사를 동원하면서 신라는 힘의 균형이 기울어지지 않을까 우려하였을 것이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맞서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고구려군을 끌어들여 가야세력을 일시에 굴복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을 아닐까?


그렇다고 광개토왕이 신라의 전략에 모르고 말려들어간 것은 아닐 것이다. 400년 고구려군 출정의 목적은 신라를 온전하게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키고 백제의 우익인 가야를 굴복시키는 전략을 실현한 것이다. 실제로 위 비문 문장에는 신라 구원전의 성과로 신라 매금 즉 신라왕이 처음으로 고구려를 방문하여 조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00년 고구려군의 신라구원전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신라와 가야의 역관계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가야사에서도 커다란 전환이 일어났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4국이 벌이는 역동적인 각축전의 변곡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야사에 대한 더 깊고 넓은 연구와 교육은 환영할 일이다. 그것은 우리 고대사가 담고 있는 풍부하고 다양한 역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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